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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40주년 - 뉴욕 한인사회 40년]가발업 쇠퇴 후 1970년대 청과·수산업 급부상

인구 유입 늘며 한인사회 팽창
한인회도 이 때부터 역할 강화
현 한인사회 중심 퀸즈 플러싱
80년대부터 본격 상권 형성돼

40년 전인 1970년대 중반은 뉴욕의 한인사회가 급변하는 시대였다. 68년 시행된 새 이민법으로 한인 유입이 늘어나면서 인구 규모가 커졌고 자연스레 한인사회도 팽창했다.
뉴욕의 대표적인 한인 단체인 '뉴욕한인회'는 1960년도에 창립됐지만 70년대 중반부터 규모와 기능이 확대, 강화됐다. 그리고 83년도에 현재 맨해튼 24스트릿에 있는 지금의 한인회관 건물을 구입했다.

인구 증가와 커뮤니티의 팽창은 한인 경제 규모 확대로 이어졌다. 70년대 초까지 뉴욕 한인들의 주요 사업 종목은 가발이었다.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을 맞아 발행된 '대뉴욕 한인 100년사'에 따르면 65년 맨해튼 브로드웨이 등지에 35개의 가발 수입 및 도매상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발 사업은 75년 이후 쇠퇴기를 맞는다. '뉴욕한인모발조합'이 시장 독점 공급을 시도했다가 반독점 금지법 위반 혐의로 미국 업체들로부터 소송을 당하고 말았다. 때마침 불어닥친 경기 침체와 이 사건을 계기로 가발 사업은 급격히 사양길로 접어들었고 한인들은 잡화상 등으로 업종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인 상권 형성의 본격화

가발업이 쇠퇴하면서 가발상들이 모여있던 브로드웨이는 각종 도매업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를 중심으로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주변에 하나 둘씩 한인 도매업소들이 들어섰다. 이들 도매상들은 한인들이 운영하는 소매 잡화업소와 흑인과 히스패닉 패들러 등을 고객으로 확보하고 확장해 나갔다.

'뉴욕한인경협 10년사'에 따르면 78년도에 브로드웨이 일대에는 잡화, 액세서리, 가방, 모자, 의류, 서비스, 장난감, 안경 등 약 60개 업체가 운영되고 있었고 이 규모가 86년에는 100여 개로 증가했다.

이 시절 뉴욕 한인 경제계의 확대는 업종의 다양화로 이어졌다. 지금 한인 경제계의 중심이 되고 있는 청과업, 드라이클리닝, 수산업, 네일, 델리 등이 7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헀다.

뉴욕의 주요 일간지 중 하나인 데일리뉴스는 79년 당시 "한인청과상들이 신선한 야채를 먹여주고 있다"고 보도하며 한인 청과업을 조명했다. 매년 추석맞이 행사를 개최하는 청과협회가 74년에 발족했다.

수산업도 청과업과 함께 당시 한인사회의 주요 양대 사업으로 주축을 이뤘다. 78년엔 '뉴욕지구한인어물상인회'가 발족되면서 사업자들의 모임도 정식으로 결성됐다. 출범 당시 30여 명이던 협회 회원 규모는 83년도에 250명으로 증가하며 명칭도 '뉴욕한인수산인협회'로 바꿨다.

수산인협회가 처음 발족한 78년엔 '뉴욕한인드라이클리너스협회'도 창립됐다. 유대인들이 주로 하던 사업인 드라이클리닝은 협회 창립 당시 50개 상점이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으나 5년 뒤 700개로 늘고 90년도에는 2000여 개로 급성장했다. 현재는 5000여 개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한인들의 네일업은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한인들은 당시 유대인들이 하던 기존 네일업소를 사들이면서 운영하기 시작했고 그 후 자체적인 창업 붐이 일어났다. 네일업은 90년대 들면서 절정을 이뤘으나 90년대 말부터는 중국인 등 타민족의 시장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한인 네일업계를 위협했다.

뉴욕의 한국 식당

뉴욕에 처음으로 문을 연 한국 식당은 62년 유학생 출신의 차정훈씨가 맨해튼 브로드웨이 56스트릿에 차린 '아리랑 하우스'로 '대뉴욕 한인 100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어 67년 맨해튼 매디슨애브뉴와 5애브뉴 사이 40스트릿에 '뉴코리아'가 개업했다.
한국 식당도 7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72년엔 '우리하우스(대표 줄리 홍, 7애브뉴, 56스트릿)' '삼복식당(대표 박명규, 43스트릿)' '호심(대표 박정숙, 44스트릿)'이 각각 개업했다.

1년 뒤에는 '인천집(대표 이희호, 30스트릿)'이 문을 열었고 74년엔 '명동식당(대표 심재길, 35스트릿)' '우동하우스(운영자 미상, 27스트릿)' '갈비하우스(대표 최두철, 31스트릿)'가 차례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79년엔 '뉴욕곰탕하우스(대표 김유봉, 32스트릿)'가 열었고 '강서회관(대표 곽현규)'과 '서울하우스(대표 이창현)' 등이 영업을 개시했다. 이들 한국 식당들은 당시 한인들의 사업 활동의 중심지였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인근 지역에 퍼져 있었다.

중화요리 식당은 70년대 말 5애브뉴와 6애브뉴 사이 35스트릿에 문을 연 '홍빈원'이 첫 한인 중화요리 식당으로 알려져 있다. 82년에는 '아사원(대표 추명순)'도 문을 열고 홍빈원과 쌍벽을 이룬다. 퀸즈 지역에는 87년 개업한 '취영루(대표 왕준방)'가 최초로 알려져 있다.

플러싱 한인상권의 태동

현재 뉴욕 한인사회의 중심으로 평가되는 퀸즈 플러싱은 80년대부터 상권이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메인스트릿과 유니온스트릿 일대에 다양한 한인 업소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플러싱은 한인 소매업과 주거지로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시절 한인 업소들은 대부분 건물 임대료를 내고 장사를 했기 때문에 건물주의 횡포에 속수무책이었다. 또 90년대 이후부터 중국인들이 밀려들면서 메인스트릿은 90년대 후반엔 한인 업소가 급격히 줄었고 유니온스트릿에 있는 유니온상가가 유일한 한인 업소 밀집상가로 남아있다.

이후 한인들은 노던블러바드 상권을 이루기 시작했다. 한인상권은 베이사이드와 리틀넥으로 뻗어갔고, 지금은 노던과 베이사이드가 뉴욕 한인사회의 주요 상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외에도 퀸즈에는 서니사이드에 '대동면옥'이 운영되는 등 80년대에 한인 상권이 형성됐다가 지금은 쇠퇴한 상태다. 또 퀸즈 중부 지역인 잭슨하이츠와 엘름허스트 일대에도 한인 상권이 번성했으나 지금은 일부 업소만 남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한인 상권은 브롱스와 브루클린 일대에도 퍼지기 시작했다. 브롱스에서는 포담로드, 킹스브리지와 제롬애브뉴 상가, 170스트릿, 화이트플레인로드, 딕맨스트릿, 헌츠포인트, 보스턴로드, 용커스 메인스트릿 등지에 한인 업소들이 모여들었다.

브루클린에는 풀턴스트릿, 플랫부시애브뉴, 처치애브뉴, 유티카애브뉴 등 흑인 밀집지역에 한인 미용재료 업소들이 주요 한인 사업체로 상권을 이뤘다.

사회봉사 단체의 출현

70년대 들어서면서 한인사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은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각종 봉사단체가 발족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60년대까지는 뉴욕의 첫 한인 교회로 알려진 '뉴욕한인교회'가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했지만 70년대부터 전문적인 기능을 갖춘 봉사단체가 활동을 시작했다.

현재 뉴욕의 봉사단체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뉴욕한인봉사센터(KCS)'가 74년 창립했다. 퀸즈한인교회의 부설 기관으로 운영돼던 기구가 한인사회 팽창에 따라 독립적으로 창립됐다.

74년에는 또 뉴욕한국여성회가 발족했고 퀸즈한인천주교회가 한인사회 처음으로 무료 건강검진 행사를 열기도 했다.

76년에는 대뉴욕지구한인상록회가 정식 노인 단체로 출범했다. 85년엔 뉴욕예지원과 한국부인회가 창립됐고 89년에는 뉴욕가정상담소가 발족했다.

80년대와 90년대는 한인사회에 청소년 문제의 심각성이 대두되는 시기였다. 특히 폭행과 패싸움, 강도와 총격사건 등 사태가 악화되면서 청소년센터가 설립됐다. 당시 청소년센터를 설립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백인이었던 대니얼 데이비드 당시 전도사였다. 한국어를 했던 데이비드 전도사는 새생명선교회를 창립해 청소년 선도 활동을 벌였고, 이 기관이 나중에 청소년센터가 됐다.

신동찬 기자
shin73@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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