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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천고(天高)와 마비(馬肥)

아침저녁으로 제법 차갑게 얼굴에 닿는 싸늘한 바람에 슬쩍 옷깃을 바로잡게 됩니다. 가을이 문턱을 밟고 서서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문고리를 잡고 있는 여름을 흘기는 시절이 왔습니다. 일 년 내내 그리 큰 변화가 없이 따뜻하다는 남가주지만, 세워둔 자동차에 내려앉은 찬이슬을 보면 그렇게 뙤약볕을 내리치던 여름도 물러서는 때가 왔구나 싶습니다. 하늘은 높고 말들이 살찐다는 가을은 그래서인지 가득한 곳간과 색색의 과일을 떠오르게 합니다.

당나라 대시인 두보의 조부였던 두심언은 변방으로 출정하는 벗 소미도에게 시 한 수를 쥐여줍니다. 그는 가을을 맞아 하늘은 드높고 말들도 살이 찌니 속히 영웅의 기상으로 적을 물리쳐 승리하고 돌아오라는 마음을 글에 실어 벗을 보냈습니다. 여기서 시작되었다는 천고마비는 가을이 주는 풍요로움도 보여주지만 기실 이 풍요를 앗아가려는 주변 나라들의 노략질이 시작된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변방에 살던 이들에게는 풍요가 마음을 졸이고 아픈 상처를 만드는 또 다른 이름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천 년도 훌쩍 넘긴 오늘날, 우리는 시장에서 풍요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없던 살림에도 사과와 배를 먹을 수 있던 것은 가을이 주는 선물이었습니다. 이제는 사철 내내 각양 과실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밥상에 올라 김을 내던 하얀 햅쌀밥 냄새도 이젠 가을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수확의 기쁨과 함께 하나님의 은혜도 기억하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가을은 풍요라는 자신만의 이름을 잃어가고 우리는 감사라는 말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변방에 살던 이들은 노략질하는 칼과 창은 없지만, 우리 마음은 칼처럼 날카롭고 싸늘하며 서로에게 아픔과 상처가 되어갑니다. 풍요가 익숙해지고 마음이 높아진 것입니다.

천고마비 중에 마비만 남아버렸습니다. 풍요가 당연해진 우리는 더 살을 찌우려고 합니다. 우리는 풍요하지 않고 오히려 빈곤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부자인 줄 알지만 헐벗은 자요, 곤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사가 사라진 마음은 근심과 염려와 불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마음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땅이 서늘해지고 먼지가 가라앉는 가을은 그래서 맑고 높은 하늘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을 하늘은 우리에게 선선해지라고 합니다. 모든 일에 앞서가야 하고, 이겨야 하기에 사랑도 전쟁처럼 하는 우리에게 마냥 뜨겁기만 하면 먼지만 뿌옇게 올라간다고 말해줍니다. 어디로 가야 하고 왜 뛰어야 하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열심히 뛰는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 가는 길인지를 차분히 생각해보라고 합니다.

자욱했던 먼지가 가라앉으면 우리는 많은 것들을 찾게 될 것입니다. 먼지 때문에 보이지 않던 아내와 남편, 자녀의 소중한 얼굴이 또렷이 보일 것입니다. 아내의 아픔이 보이고, 남편의 외로움이 보일 것입니다. 내 이웃의 아픔과 어려움도 보일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한성윤 목사 나성남포교회

sunghan0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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