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한인보'는 부자간 이어준 끈 의미 일깨워준 중앙일보에 감사
'독도화가' 권용섭씨 편지
이번 '자유한인보' 시리즈 기사를 보면서 중앙일보는 흙탕에서도 진주를 캐는 신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자유한인보를 미국까지 안고 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았겠습니까. 그들에게는 돼지 목에 진주였던 것 같습니다.
자유한인보는 아버지와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끈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무뚝뚝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이었습니다. 왔나?, 가라, 밥 묵어라, 자자, 이런 경상도 대화법. 게다가 우리집은 유별난 유교집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내인 저는 아버지가 좋아 남달리 따랐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이장을 오래 하셨는데 시골 이장 업무라는 게 별별일을 다하는 거지만 저는 아버지의 봉사가 숭고해서 심부름을 도맡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저 보고 '작은 이장'이란 별명을 붙여주었습니다.
제가 1977년도에 독도를 가려다가 울릉도에서 4명이 죽고 2명만 돌아와 혼이 나간 상태로 멍해 있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아 야 죽음이란 순식간이고 산 사람은 움직여야지 맨날 그카고 있을 끼가? 사람이 죽는 건 정한 이친데…" 하시며 "내가 오키나와에서는 말이야…"이렇게 증언은 시작되었습니다.
"아부지~그거 진짜 아부지가 겪은 이야깁니꺼?" 하며 제가 아버지께 빈 노트를 한권 드리며 숙제를 드리고 고향 집에 갈 때마다 독촉한 게 바로 증언 연재물' 태평양전쟁'입니다.
아버지 세대들에 대한 불쌍함, 생전에 이해 못 하고 잘 해주지 못했던 죄책감, 아쉬움….
저에게는 자유한인보는 자료나 유물이기 전에 아버지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향기이자 유일한 끈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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