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속으로] 간암 말기 한인 시한부 환자와 필그림교회 호스피스 돌봄 프로그램
삶과 죽음, 그 경계를 함께하다
병원 오갈 때 손발 역할…말벗 돼주기도
사람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떠나야만 하는 길이 있다. 누구라도 마지막 순간 죽음이라는 운명을 피할 순 없다.
그 길을 잘 떠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준비가 필요하다. 곁에서 몸과 마음을 보듬어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각박한 이민 생활을 살면서 가족도, 금전적 여유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과의 이별을 맞게 되는 사람들이 주변에 적지 않다.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뉴저지주 파라무스에 있는 필그림교회(담임목사 양춘길) 사역센터의 ‘호스피스 돌봄 프로그램’ 봉사자들이 그들.
지난 2009년부터 ‘삶의 편안한 마무리를 위한 총체적 돌봄’이라는 호스피스의 의미를 실천하고 있는 이들은 지난해 10월부터 간암 말기 환자 박모(50)씨의 마지막 순간을 돌보고 있다.
#아름다운 마침표 찍기
지난 6일 오전 10시30분 필그림교회 호스피스 프로그램의 리더를 맡고 있는 양유환 장로는 뉴저지주 패터슨의 하나선교회(대표 김항욱 목사)를 찾았다. 이 곳의 셸터에서 지내고 있는 박씨를 보기 위해서다.
양 장로와 박씨가 처음 만난 것은 지난해 11월. 앞서 10월 20일 홀리네임병원 응급실을 찾은 박씨는 말기암으로 인해 더 이상의 삶이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
아무런 가족도, 재산도 없다는 박씨의 사정을 듣고 병원 측은 필그림교회 호스피스 프로그램에 연락을 했고 양 장로가 박씨를 찾아왔다.
이후 양 장로와 호스피스 자원봉사자들은 1주일에 3~4번씩 병원에 입원해 있는 박씨를 찾았다.
하지만 이미 시한부 판정을 받은 박씨가 무작정 병원에 입원해 있을 수는 없었다. 박씨가 월세로 살던 팰리세이즈파크의 집 주인도 박씨가 돌아오는 것을 꺼렸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던 박씨를 품은 것은 패터슨에서 노숙자·빈곤층 주민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는 하나선교회였다. 여기에 홀리네임병원 측도 어려운 형편의 박씨를 돕기 위해 모든 병원비를 면제해주기로 결정했다.
올 1월부터 박씨는 하나선교회 셸터에서 생활하고 있다. 아무도 찾는 이들이 없는 가운데 유일한 낙이 있다면 양 장로를 비롯한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방문이다.
양 장로는 “지난 2009년부터 10여 환자들의 마지막을 도왔지만 박씨가 가장 어려운 경우”라며 “불체자인 데다가 미국에 가족 한 명이 없다”고 말했다.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의료진의 판단이 내려진 지 8개월이 지났지만 박씨는 여전히 삶을 이어가고 있다.
그간 응급실을 3~4차례 찾는 등 긴박한 순간도 있었지만 배에 찼던 복수가 빠지고 퉁퉁 부었던 다리의 붓기가 빠지는 등 이제는 다소 안정을 찾은 상태다. 그런 그를 곁에서 돌본 것은 호스피스 봉사자들이었다.
박씨를 찾은 양 장로는 그의 배부터 살폈다. 또 다시 복수가 차오를까 싶어서다. “밥 먹는 데 불편한 것은 없나요? 어디 아픈 곳은 없어요?” “괜찮습니다. 등에 있는 딱지가 좀 가렵습니다.” “그거 떼면 안 되요. 내가 연고 발라 줄게요.”
맨해튼·플러싱·뉴저지 등지에서 식당 주방장으로 일했다는 박씨의 유일한 희망은 한국에 있는 자녀들을 보는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몸이 건강해진다면 다시 일하고 싶습니다.”
그는 약 10년 전 “새로운 사업 아이템을 배워보자”는 식당 사장의 권유로 함께 미국을 찾았다. “사장이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갔어요. 미국에 왔는데 그냥 가기는 뭐해서 돈이라도 조금 벌고 돌아가자던 것이 벌써 10년이 흘렀습니다. 처음 2~3년간은 한국의 가족들과 통화도 하고 그랬는데, 사는 게 바빠서 어느덧 연락도 끊겼네요.”
다른 과거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현재 유일한 소일거리가 성경 읽기라고 말한 박씨는 출애굽기의 한 구절을 매일 같이 읽고 있다고 말했다. 출애굽기 16장 “나는 너희를 치유하는 여호와임이라”이다.
그는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국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양 장로 역시 박씨의 소망을 알고 있다. 그는 수소문 끝에 한국에 있는 박씨의 아내와 형제들과 연락을 했지만 여건상 박씨를 보기 위해 미국에 올 수 없다는 대답만 들었다.
양 장로는 “가족들이 원하진 않지만 한국 논산에 있는 한 요양원에서 박씨를 받아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박씨의 임시 여권이 나온 상태이기 때문에 건강만 호전된다면 박씨를 한국으로 보내 잠시라도 가족들과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 곳에서는 양 장로와 호스피스 봉사자들이 박씨의 가족 역할을 하고 있다. 응급실에 가거나 약을 받아와야 할 때 박씨의 손발이 돼주고 있다. 또 수시로 그를 찾아 회복을 위해 기도하고 찬송을 부른다. 그의 유일한 말벗도 이들이다.
양 장로에 따르면 현재 박씨의 건강 상태는 보호자가 있더라도 비행기를 타기 어려운 상태다. 곧 있을 병원 검진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담당의가 한국행을 허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양 장로는 “이 곳에 가족이 없기 때문에 박씨의 장례 절차도 준비해놨다. 이 역시 호스피스의 사명이라는 생각”이라며 “’산다면 가족의 품으로, 죽는다면 하나님의 품으로’란 생각으로 봉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호스피스 전문 센터 필요
양 장로는 “사실 호스피스는 더 이상 회생 가능성이 없다는 선고가 내려진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이기 때문에 박씨처럼 오랫동안 돌본 경우가 없다”며 “박씨의 사례를 통해 배운 것이 많다”고 말했다.
박씨처럼 불체자 등 신분이나 경제적 상황 때문에 제대로 도움을 받기 어려운 한인들을 위한 전문 호스티스 기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
필그림교회 호스피스 프로그램의 봉사자가 되려면 6주간의 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매년 두 번의 정기교육과 네 번의 보충교육을 계속 받아야 한다. 이렇게 교육을 받은 20여 명의 봉사자들이 있지만 이들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 양 장로의 설명이다.
양 장로는 “홀리네임병원이나 밸리병원 등에서 시한부 선고 환자에 대한 호스피스 봉사에 대해 문의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한 병원에서 도움이 필요한 불체 신분의 환자가 있다고 요청한 상태지만 박씨 등을 돌보는 데도 손이 많이 부족해 대기 상태”라고 말했다.
유니스 강 홀리네임병원 코리안메디컬프로그램(KMP) 홍보 담당도 “시한부 환자에게는 의학적인 치료보다는 호스피스들의 도움이 더 필요하지만 한인 대상 프로그램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밝혔다.
양 장로는 “전문 기관 설립을 위해서는 의사·간호사·상담사·자원봉사자 등 다양한 일손이 필요하다”며 “공간 마련과 재정적인 안정을 위한 기부와 이사회 설립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호스피스는 결코 치료를 포기하고 수동적으로 임종을 기다리는 게 아니다”며 “오히려 환자들이 끝까지 삶의 의미를 포기하지 않도록 사랑으로 돌봐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도움을 받을 길이 없는 한인들을 위한 전문 호스피스 기관 마련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호스피스 봉사 및 지원 문의. 201-461-0909.
서한서 기자 hseo@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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