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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5·끝] 하늘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하던 재미한인들, 그들은 영웅이었다

지금까지 연재된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는 일제강점이라는 암흑기에 공군력을 앞세워 독립을 얻고자 했던 한국인들의 기록이다. 이는 광복을 위해 오늘날에는 상상조차 어려운 희생과 헌신을 조국에 바쳤던 재미 한인들의 영웅담이기도 하다.

총 64회에 걸쳐 연재된 이 이야기의 요지를 간략히 돌아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말 한반도에 드리운 일제의 침략 야욕이 짙어지자 한국인들은 아시아 및 미국으로 민족 대이동을 시작했다. 오늘날 각국의 해외동포 비율에서 한국이 세계 3~6위를 기록하게 되는 이유다.

해외로 떠난 한국인들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자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군사적 노하우를 얻기 위해 미군·러시아군·영국군 등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들 가운데 미 육군 조종사로 유럽에서 활약하며 156회 출격을 기록한 재미 한인 이응호는 수천 년 한민족 역사가 낳은 최초의 파일럿이 됐다.



1차대전을 지켜본 안창호·윤병구 등 재미 한인 지도자들은 비행기가 향후 전쟁에서 승패를 가늠할 것임에 주목하는 가운데 애국청년들은 미 육·해군 비행학교나 민간비행학교를 통해 비행을 배우기 시작했다.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이동휘와 초대 군무총장 노백린(현재 국방장관)은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1920년 북가주 윌로우스(Willows) 일원에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했다. 이 비행학교/비행대는 임시정부의 공식 군사조직이었으며, 벼농사로 거부를 일군 당대의 사업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김종림의 재정지원을 주축으로 만들어졌다.

이 비행학교/비행대는 비행기 10대를 보유하고 연간 200명의 조종사를 배출한다는 야심찬 계획에 따라 1920년 3월 출범했다. 이후 불과 3개월 만에 실제로 비행기 3~5대를 보유하고 생도 수십 명을 기숙시키며 훈련시킬 정도로 급속히 발전했으나, 결국 재정문제라는 난관을 넘지 못하고 이듬해 날개를 접었다.

그러나 이 비행학교/비행대 출신인 박희성·이용근은 1921년 7월 조종사가 됐고 임시정부는 이들을 '비행병 참위(현재 소위)'로 임명, 수천 년 한국사를 통틀어 우리 정부가 임명한 최초의 비행장교가 됐다.

오늘날 한국 공군은 "대한국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정신에 입각해 이 역사를 수용,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공군의 법통적 기원이라는 역사를 재정립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1949년 미국으로부터 연락기 10대를 지원받아 출범했다."는 것이 한국 공군의 공식 입장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한국 공군이 역사를 알게 되면서 다시 쓰기 시작한 초기 단계에 들어가 있는 정도로 아직 모든 것이 완전히 정리된 상황은 아니다.

한국 공군은 이 역사를 대내외적으로 확고히 밝히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를 기념하는 조형물(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소요예산 약 18억 원을 국방중기예산계획에 지난해 반영시켰다. 이와 관련, 최차규 공군참모총장은 "이 동상의 제막식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2019년에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지난 20일 공군본부에서 필자에게 밝혔다.

김은기 전 공군참모총장/극동방송사장에 따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사안은 단순히 공군의 기원을 밝히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광복군이나 독립군과 오늘날 한국군 전체의 역사적 법통적 연계성과 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해주는 사안이라는 점에서 훨씬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 더욱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사안은 군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사 그 자체이며 나아가 한국현대사의 중요한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한인사회는 재미한인들의 애국심과 희생과 헌신의 연장선에서 오늘날 한국 공군과 육·해군 항공대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면서 앞으로도 이들의 발전을 위해 관심과 애정을 가져야 한다.

재미 한인으로서는 오늘날 미 육·해·공군사관학교나 기타 과정을 거쳐 미군에서 파일럿으로 활약하는 한인들 역시 이 비행학교/비행대에서 독립전쟁을 꿈꾸며 하늘로 날아올랐던 애국청년들의 후예라는 점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어제 그들이 뿌린 작은 씨앗이 오늘 커다란 나무로 자라난 것을 보며 오늘 우리가 뿌리는 작은 씨앗 역시 내일 또 다른 큰 나무로 자라날 것임을 믿으면서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를 일구고 그곳에서 하늘을 통해 독립을 얻고자 했던 모든 선구자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한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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