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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4] 인터뷰: 김창규 전공군참모총장 "임시정부 비행대는 우리공군의 빛나는 역사의 시작"

아래는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와 관련,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과 가진 인터뷰 요지다.

"(일제 강점기에) 조국 광복을 위한 독립전쟁을 위해 멀리 미국에서 비행을 배웠던 선배들의 희생과 헌신이 그동안 잘 알려져 있지 않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들의 정신과 의식은 공군은 물론 우리 국군과 국민 모두의 귀감으로 앞으로 적극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김창규 전 공군참모총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 일원에 설립했던 비행학교/비행대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표시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김 전 공군총장(5대)은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나 자신도 그동안 이 사안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공군의 자랑스러운 뿌리를 자세히 알게 되면서 깜짝 놀랐고 지금이라도 정확히 알게 돼 다행"이라고 14일 평화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를 통해 밝히고 "이 사안을 모든 장병에게 교육해 선배들의 선견지명과 정신을 본받게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생존해 있는 전 공군참모총장들 가운데 최선임이다.



김 전 총장은 "우리 헌법 전문이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비행학교/비행대와 한국 공군의 연계성에는 헌법적 정의가 내려져 있음"에 주목했다.

당시 비행학교/비행대가 실제로 사용했던 여러 건물이 2개만 현존하고 있으며 그나마 1개는 현재 소유주가 철거할 계획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우리 공군의 빛나는 역사가 시작된 이곳을 보존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전 총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대위)로 해방을 맞았으며, 해방 후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직후인 1948년 후반 채병덕 장군(후에 육군참모총장)과 이종찬 장군이 함께 그의 집으로 찾아와 해방된 조국에서 군인으로 봉사할 것을 강력히 권유해 국군에 들어갔다.

그는 육군 조병창장으로 조병창의 초석을 다진 후 6.25전쟁 초기인 1950년 가을 공군에 합류, 정전 후에는 군사정전위원회 한국 측 대표를 맡기도 하고 공군사관학교장, 공군참모차장을 거쳐 공군참모총장(1958-1960)을 역임했다.

그는 일본 육사 졸업과 관련, "일본 육사를 택했을 때는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 같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조선유학생들이 훗날 한국군에 기여하기 위해 각각 다른 병과를 택하는 협의를 들으면서 민족정신이 자라기 시작했다."고 술회했다.

평화연구원에서 만난 김 전 총장은 전형적인 외유내강형의 노신사였으나 사관학교 재학 시절 모든 조선인을 대상으로 창씨개명을 강요하기 시작한 조선총독부의 압박을 의논해온 부친의 서신을 받고 "자고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욕은 '성을 갈 놈'이라는 것입니다."는 한 줄 메모를 답신으로 보내 자신을 포함해 그의 집안 모두의 창씨개명을 막았을 정도로 강단 있는 인물이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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