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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신인문학상/ 수필 부문-가작] 잘매

주영희

늦은 봄날, 감꽃이 떨어질 때면 너댓살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희뿌옇게 동이 틀 무렵이면 일어났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가서 마을 중앙에 있던 잘매 집의 뜰에 밤새 하얗게 떨어져 있는 감꽃을 주워 담았다. 감꽃을 다 줍고 나면 잘매는 나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여 나의 찬 손을 녹여주며 기특하다느니 부지런하다느니 조막만 한 손도 예쁘다느니… 온갖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하시며 내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그 재미로 더욱 나는 이른 아침,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일어나서 잘매 집으로 향했다.

잘매는 작은 엄마의 줄인 말과 경상도 방언이 합쳐진 말이다. 잘매는 산너머 가동에서 시집온 셋째 숙모님이다. 사촌들 모두 가동잘매라고 불렀다. 나는 큰어머니와 둘째 작은어머니에게는 존댓말을 했지만 가동잘매에겐 그러지 않았다. 잘매의 남편인 셋째 삼촌은 아버지 바로 위의 형님이었는데 일본으로 징용 가서 돌아갔다고 했다. 그때는 잘매 나이 스무 살이었고 잘매의 무남독녀 순자 언니는 채 돌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고 했다. 아흔셋이 된 잘매는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온 것이다. 양반집안 딸이라 다른 선택은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우리 잘매의 아프고 외로웠던 삶은 시대와 관습이 만든 잔인한 희생의 시간이다.

잘매는 삯바느질을 해서 순자 언니를 중학교까지 보냈다. 그 당시에 시골에서 딸아이를 중학교까지 보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마을 아낙들에게 둘러싸여 재봉틀을 돌리던 우리 잘매를 생각만 해도 내 눈엔 눈물이 고인다. 잘매 집 안팎은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화단에는 항상 고운 꽃이 가득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빛깔 고운 단풍잎을 한지 사이에 넣어 창호지 문을 은근하고 멋스럽게 장식하던 분이다. 성품이 온화해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따랐다. 겸손하고 항상 양보의 미덕을 보이는 분이다. 한문과 한시를 놀라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다. 집안에 사위를 맞이하면 가문에 빠질 수 없는 엄격한 음주문화를 가르치며 품위 있게 권주가를 부르는 멋쟁이였다. 내가 시집갈 때 “시어른 잘 모시고 시댁일 친정에서 얘기하지 말고 친정일 시댁에서 말하지 말고 말을 아껴라”라고 했다. 잘매의 말로는 나는 언제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항상 그 말씀을 명심하고 지켜서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이려고 노력했다.

잘매는 나에게는 엄마와 다름없는 존재다. 엄마는 나에게 야단도 치고 꾸지람도 했지만 잘매는 무조건 내 편이고 나의 온갖 응석과 억지를 다 받아 주었다. 나는 잘매 앞에서는 공주보다 더 귀하고 대통령보다 대단하고 천재보다 똑똑하고 미스코리아보다 잘 생겼고 천사보다 착했다. 잘매는 이 세상에 있는 좋은 말들과 칭찬들이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입이 마르도록 나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니 엄마보다 잘매를 찾았을 때가 더 많았다. 늘 잘매한테 업혀 다니다가 큰아버지께로부터 걱정을 듣기도 다반사였다. 잘매의 집앞에는 나지막한 토담이 있었는데 내가 그 토담에 이르러면 잘매가 와서 나를 업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마당을 걸어 들어간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바느질 일로 바빠서 잘매가 나를 업으러 오지 않으면 나는 심술이 나서 토담의 흙을 떼어먹으면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면 아무리 바빠도 버선발로 뛰어와서 나를 안고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섯 살이 되어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잘매도 같이 가자고 울며 매달렸다. 잘매도 곧 따라갈 것이라는 말에 속아서 이사를 하였는데 끝내 잘매는 오지 않았다. 그 후로는 일 년에 두 번 씩 방학이면 어김없이 잘매 집에 가서 대부분의 방학을 보냈다. 잘매집 근처에 오면 큰소리로 ‘자-알-매-애’ 하고 뛰어오면 잘매는 ‘아이고 내 새끼 왔네!’ 하면서 뛰어와서 나를 꼭 안아주었다. 영화 속의 연인들이 상봉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잘매와 나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잘매집에는 내 이불, 요, 밥그릇, 숟가락, 요강 등이 다 갖추어 져 있었다. 잘매가 내 운동화를 빨아 널었을 때는 잘매의 새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다녔다.

감을 유난히도 좋아하던 내가 단감이 익기 전에 방학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자 잘매는 떫은 감을 소금물에 담가 주었다. 그러면 며칠이 지나면 떫은맛은 가시고 아삭아삭 맛있는 ‘담은 감’이 되어 있다. 겨울이면 빈 장독 안에다 감홍시를 저장했다가 내가 가면 시루떡을 쪄서 따끈할 때 그 당시에는 귀했던 설탕 가루와 홍시에 찍어서 내 입에다 넣어주곤 했다. 내가 제법 컸을 때도 내 입에 떠먹여 주고 먹는 모양도 예쁘다며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학교에 도시락을 싸갔을 때, 나는 그때까지도 젓가락질을 할 줄 몰라서 포크를 젓가락 대신에 갖고 갔다. 어릴 때부터 덩치가 컸던 나를 언제나 팔베개를 해서 재웠다. 내가 성인이 됐을 때까지도 팔베개해 줬던 분이다.

잘매는 언제나 깔끔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 쪽진 머리에 쇠 비녀를 단정하게 꽂고 다니시던 잘매. 가녀린 몸매에 다소곳하던 모습. 신문화가 들어와 마을 대부분 여자가 짧은 파마머리를 해서 시원하고 편해했지만 홀로된 과부가 그럴 수는 없다고 쪽진 머리를 고수했다. 색깔이 선명한 옷 또한 멀리했다. 세상살이에서 언제나 지는 편을 택했고 조용하게 속으로 삭이면서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것 같았다. 동네아주머니들의 의상을 좌지우지했듯이 미적 감각과 정서가 풍부한 분인데 고운 색깔과 멋을 몰랐을 리 없다. 스스로 평생 죄인으로 산 것이다.

잘매의 단 하나 분신인 순자 언니가 시집가서 딸 셋을 낳고 막내가 돌이 되기 전에 남편을 잃었다. 이제 언니도 고희의 나이지만 삭풍이 불어 재끼던 인생길에서 심하게 시달리더니 깊은 우울증의 늪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잘매의 무너지는 가슴, 끝나지 않는 죄 없는 죄인의 세월 속에 얼마나 숨죽이며 몸부림쳤을까. 속으로만 속으로만 파고들던 피눈물에 멍든 가슴을 부여안고 아파하더니 말년에는 담배와 커피를 시작했다. 하루에도 담배 한 갑 이상은 피고 커피도 여러 잔 드는 듯했다. “이것들이 몸에 해롭다 카더마는 우째 이리 아직도 안 죽는지 모르겄다” 커피와 담배를 기호품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얌전한 우리 잘매는 빨리 죽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순자 언니를 겨우 설득해서 우울증 치료차 산속의 뉴스타트 프로그램에 데리고 가기 전 날, 나는 잘매와 하룻밤을 같이 잤다. “내 뼈를 깎아서 네게 먹여도 아깝지 않다.” 라고 내게 말하는 잘매 앞에서 나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다. 잘매는 주는 것에만 익숙했고 나는 받는 것에만 익숙했던 지난날들. 역할이 바뀌면 서로가 서글퍼지고 어색해지는가보다. 나야말로 내 뼈를 깎아서라도 잘매에게 줘도 아까울 것이 없을 텐데 말이다.

잘매께 전화를 종종 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도 어려워졌다. 청력이 나빠져서 전화선 양쪽 끝에서 고함을 치다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할 말을 다 못하고 끝나고 만다. 잘매는 이제 쪽지던 머리는 짧게 자르고 등도 많이 굽었다. 몰라보게 왜소해진 모습으로 양발 도르래가 달린 워커에 의지해서 걷는다. 옛날의 단아했던 모습은 간 곳이 없다. 하지만, 눈빛은 그 옛날 총명을 잃지 않았다. 정신이 맑아서 옛일들을 그림처럼 기억해 낸다. 이제는 물기를 잃어가는 낙엽 같은 입술로 옛날처럼 내 어린 날의 칭찬을 흥분한 목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한국방문 때마다 잘매를 찾아가면 “이것이 널 마지막으로 보는 것인 갑다” 하며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언제나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다.

잘매는 삶의 막바지 길을 내리 걷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 대책이 없다. 내가 잘매한테 해 줄 수 있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만큼도 되지 않는다. 나와는 달리 우리 잘매는 혼신을 다해 주기만 했던 분이다. 흥분과 기쁨으로 주었던 분.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맘졸이고 안타까워했던 분. 줄 수 있어서 고마워 했던 분. 주는 대상에게 더 감사하는 분이다.

어릴 때 읽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주인공 노라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누구나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녀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살아볼 만한 일생이었다고 말하고 삶을 마감했다. 모든 사람이 우리 잘매의 인생이 몹시도 불행했다고 혀들을 찬다. 하지만, 불행했던 우리 잘매의 베풀기만 했던 인생에서도 주면서 만끽했을 희열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언제나 소나기처럼 사랑을 퍼부으시던 잘매의 표정과 몸짓에서 나는 확실하게 보았다. 턱없이 기울기만 했던 잘매와 나의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잘매도 행복한 순간은 있었을 것이다.

잘매에게 받은 사랑을 잘매께 갚을 길을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잘매는 나의 존재를 더 고마워한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게 잘 살아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잘매는 말한다. 끝까지 뒤에서 내 행복을 바라보기 원하는 분이다. 나는 거칠고 황량한 인생길 모퉁이에서 넘어져 일어나기 힘들 때 어디선가 사랑의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을 잘매를 생각하며 웃으며 일어설 수 있다. 그것은 잘매에 대한 참으로 이기적인 내 사랑의 숙제이기도 하지만 잘매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나의 삶의 힘이기에 그렇다.

소박하게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우리 잘매의 삶은 누구에게나 모뎀이 될 것이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잘매가 내게 퍼부었던 사랑을 되돌려 줘야 할 것이다. 잘매를 따라 나도 조용히 혼신을 다해 베푸는 사랑의 절정에 도달하여 그 희열을 맛보고 싶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그것이 엄숙한 우주의 이치인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시시때때로 그 귀한 사랑과 추억이 내 속의 깊은 곳을 훑어 내리며 불을 지필 때마다 나는 철을 뒤늦게 알아가는 늦둥이처럼 속울음을 삼킨다.

▶수상소감

오래도 머물렀던 겨울이 아직도 모퉁이를 돌아서지 않으려 버팅기고 있을 때, 당선소식은 향긋한 봄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의 늪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던 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앞뜰의 적 목련도 살포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수선화와 튤립을 선두로 하여 줄줄이 해동된 땅을 뚫고 강한 힘으로 올라오는 꽃들은 지난봄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다. 죽음과도 같이 세상이 미동도 않고 꽁꽁 얼어붙어 있던 겨울에서 소생의 봄을 주신 창조주께 감사합니다. 글을 다시 쓰고 싶은 용기를 주신 중앙일보에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권고를 아끼지 않는 스승님과 사랑하는 가족들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소생의 희망을 주고 세포 하나하나가 기쁨으로 전율할 수 있는 글을 쓰기를 원합니다.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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