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중앙신인문학상/논픽션 부문-가작] 증언

현영아

에버그린 양로원의 정원에도 봄은 무르익고 있었다. 잔디가 연두색으로 살아나고 있었고, 물기가 오른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망울망울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담장 밑으로 보이는 화단에는 각종 봄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화단 앞쪽으로는 정원사들이 새로운 모종을 옮겨 심었나 보다. 각각의 모종이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새로운 모종 사이로 개미들이 줄지어 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언니를 위해 들고 온 빵 봉지를 열어서 빵가루를 뿌렸다. 놀랍게도 개미들은 빵가루를 중심으로 즉시 모여들었다. 큰 덩어리는 두 마리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간다. 그들의 근로정신은 누가 훈련시킨 것일까? 세상은 천지를 지으신 분의 섭리 안에서 생동하고 있었다.

꽃향기를 따라 눈을 드니, 분홍색 매화가 한창이다. 매화나무 밑 긴 의자에 앉아서 잠시 그 향기에 취해본다.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그 꽃말은 고결, 결백, 충성, 인내라고 한다.

매화꽃 닮은 우리 언니를 만나려고 나는 거의 매일 이 양로원을 방문한다. 언니는 치매에 걸려 있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세수도 방금 한 것을 잊고 수십 번을 씻고 또 씻는다. 덕분에 매화꽃처럼 깔끔하고 청결하여 향기롭다. 동부에 있는 시골 병원 의사인 외동아들을 따라서 한인이 없는 곳에서 지낸 것이 치매의 원인이 된 듯하다. 나는 삼 남매가 다 출가하여서 홀가분하였고, 아직은 건강하므로 내가 언니를 돌보기로 하고, 한인타운의 이 양로원으로 언니를 모셔온 지 2년이 지나고 있다. 언니는 비록 나를 알아보지 못하나, 나는 언니를 잊을 수 없다. 치매에 걸리기 전에 진작 모셔오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다.

현관 앞 분수대에서는 시원하게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분수대를 돌아서 양로원 현관으로 들어섰다. 나를 아는 간호사들이 인사를 한다.



“Good morning(안녕하세요)?”

“ Hi, Good morning(네, 안녕하세요)?"

나는 양로원에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그곳에 머문다. 일손이 바쁜 한국인 간호사를 돕기도 하고,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 되기도 한다.

응접실 T.V에서는 며칠 전에 일어난 ‘천안함 침몰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서해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우리 해군의 초계함이 선체가 절단된 채 피격·침몰당하여, 젊은 우리 해군 장병 40여 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정부는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보고 진상을 규명 중에 있다고 한다. 북한은 아직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이층 언니의 병실로 오르면서, 반세기도 더 전에 내가 경험한 두려운 기억 속으로 침몰한다.

1950년 6월 27일 밤에는 내내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하늘도 ‘민족상잔의 슬픔’을 같이 했던 것 같다. 이튿날에는 철없게도 아침 햇살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북한 공산당들은 부잣집 지주는 무조건 총살시킨다는 풍문이 돌아서 우리 식구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지혜를 모은 결과, 한강 다리가 끊겨서 남하하지 못하고 귀가하는 피난민들 틈에 섞여서 우리 다섯 식구는 서울 시내 낙산 밑에 사시는 할아버지댁으로 옮기기로 했다. 우리 집을 행낭 아범 식구에게 맡기면서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고향은 서울특별시에 들어 있었지만 외각지대였다. 약 300세대가 정답게 이웃하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ㅡ. 나는 그 마을에서 유일한 한남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주변에 미루나무들이 심겨져서 경계를 나타내 주었는데, 여름에는 미루나무에 앉아서 우는 매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학교 근처는 거의 논밭이었고 그 사이로 한강 줄기가 흐르면서 철둑 밑을 지나 한강 나루에 이르고 있었다. 마을 버스는 세 시간마다 운행되었는데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서울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이 버스를 이용했다. 우리 아버님은 서울 시내 종로 5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건재 약국을 운영하고 계셨다.



우리 식구가 서울 시내로 들어서니, 빨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데, 빨간색 완장을 두른 국방색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지프를 타고 우리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달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빨갱이가 남침했다’는 어른들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정말로 ‘뿔이 솟은 빨간 귀신같은 사람’인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1950년 9월 28일, 우리 국군과 U. N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우리 식구는 꼬박 3개월을 공산 치하에서 보냈다. 서울 수복이 한 달만 더 늦어졌더라도 우리 식구는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나보다 열 살 위인 언니도, 일곱 살 위인 오빠도 더 이상은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언니와 오빠는 기차로 통학을 했다. 마을 중앙에 자리한 우리 집에서는 기찻길이 건너다보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에 걸쳐 기차가 우리 마을 간이역에 섰다. 아침에 통근 기차가 오면 각 골목에서 여름에는 흰색으로, 겨울에는 검은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달려나오면서 천천히 떠나는 기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올라타기도 했다.



‘기차 통학’하면 수용오빠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수용오빠는 우리 집 행랑아범의 아들이다. 그는 기차 도착 시각에 늦은 법이 없었다. 그가 일류 고등학교 교복을 단정히 입고 학생 모자를 눌러 쓰고 기차 통학을 할 때면, 다른 기차 칸에 실려 오던 여학생들이 모두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수용오빠를 넘겨다보곤 했다. 수용오빠는 키가 훤칠했고, 얼굴도 희고 귀티가 있었으며 검은 눈썹에 쌍꺼풀진 눈은 영롱했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좋아서 그가 말을 걸어오면 마치 달콤한 꿈속으로 끌려가는 듯했다. 그런 그가 우리 언니를 좋아했다. 언니의 외모는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냘프고 깨끗하고 고상했다. 마치 수선화를 연상시켰다. 언니는 거의 매일 기차 도착 시각에 늦는 편이다. 저녁에 잘 때 물수건으로 줄을 세운 바지를 요 밑에 깔고 잔 것이 아침에 두 줄로 바지 주름이 잡혀 있으면 그대로 입지 않고 그때야 다리미를 꺼내서 다시 바지 주름을 잡느라고 시간이 걸리거나, 식모 아줌마가 싸준 도시락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바꿔 담느라고 항상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었다. 기차 기적 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는 언니를 기다렸다가 수용오빠는 언니가 기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같은 칸으로 올라타곤 했다. 그래서 수용오빠가 우리 언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머슴의 아들이 주인집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수군대고들 했다. 어느 날 아버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영애와 수용이가 사귀니? 그렇다는 소문이 있던데…?”

나는 수용오빠가 언니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아닌 데요! 왜, 그러면 안 되나요?”

하며 능청을 떨었다.

“안 되지! 언니에게 조심하라고 전해라!”

언니는 성격도 나와는 전혀 반대였다. 내가 수용오빠의 편지를 전하면 ‘더 이상 받아오지 마’하며 내숭을 떨었다. 매번 잘도 받아가면서 말이다. 언니는 아버님이 아시게 되면 혼이 날 것이므로 무척 조심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나 모르게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언니가 한동안 학교에서 특별 수업이 있었다고 하면서 늦게 귀가하는 날이 잦아졌으니까.

그런데 비상시국으로 돌변하자 수용오빠가 징집영장을 받고 말았다. 우리 고향에서는 청년 9명이 군인으로 뽑혔다. 6월 27일 아침이었다. 그때 철둑길로 달리는 기차에는 많은 군인들이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마 수용오빠도 그들처럼 기차를 타고 북으로 달렸을 것이다. 철모르는 우리들은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힘껏 두 손을 흔들어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이튿날 새벽 친구와는 이별식도 갖지 못하고 할아버지댁으로 향했다. 그것이 정든 고향과의 마지막 이별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언니는 식사를 막 끝내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평안한 얼굴이 다. 나를 보더니 빙긋 웃는다. 매일 자기를 찾아오는 친구쯤으로 아는 모양이다. 같은 병실을 쓰고 계신 세 분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가지고 간 빵을 나누어 드렸다. 노인이 되면 어린이가 된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두 분 할머니는 누가 빼앗아 갈 사람도 없는데 움켜쥔 빵을 주위를 살피며 얼른 서랍에 넣어 감추신다. 옆의 할머니는 90이 훨씬 넘으셨는데 방금 식사를 끝내신 듯한데도 곧 빵을 오물오물 맛있게 드신다.

창가로 가서 내가 사다 놓은 난초화분에 물을 준 후 라디오 채널을 음악이 나오는 곳으로 맞췄다. 옆의 할머니들은 흘러간 노래를 좋아하셨다. 그러나 언니는 귀를 막으며 곧 싫증을 낸다. 옆의 할머니들이 딴생각에 빠져드는 틈을 타서 나는 슬그머니 채널을 고전 음악으로 바꾼다. 언니는 고전 음악은 하루 종일 들어도 물리지 않았다.

“내 고모가 고등학교 음악 선생이었어. 내가 그 고모 덕분에 이런 음악을 많이 들었지…….”

언니가 느닷없이 과거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렇다! 우리의 고모님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경찰인 남편과 뜨겁게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지…….’

공산 치하에서 석 달을 지내면서 우리는 많은 사건을 겪었다. 할아버지댁에서는 항상 대문을 잠그고 살아야 했다. 오빠가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도록 몸을 숨겨야 했고, 언니도 여성 동맹에 가담하지 않도록 숨어있어야 했다. 어느 누구라도 아무리 급하게 대문을 열라고 두드려도 언니와 오빠가 몸을 숨긴 후에야 어린 내가 ‘누구세요?’하며 천천히 문을 열러 나가곤 했다. 수시로 인민군들이 가택 수색을 나왔다. 그들의 눈은 항상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는 항상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한 번은 인민재판이 있다고 한 집도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전갈이 왔다. 참석하지 않으면 사상이 불순한 반동으로 몰린다고 했다. 어린 내가 우리 집을 대표해서 참석했다. 인민의 피를 빨아 먹던 반동분자를 재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포승에 묶인 한 젊은 남자를 내세웠는데, 나는 그분을 본 후에 기절할 뻔했다. 내 고모부가 끌려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수염은 깍지도 못하여 덥수룩이 자라있었고,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잡혀왔는지 바싹 마른 얼굴은 햇빛을 못 보아 쉬어 있었다. 고모부는 순경이었기 때문에 벌써 남하한 줄 알고 있었는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모양이다. 그분은 ‘인민의 피를 빨아 먹은 자’가 아니었다. ‘민중의 지팡이’로 표창을 받으신 분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악질분자는 총살형에 처해야 하갔디오?”

구레나룻이 시꺼먼 빨간 완장을 두른 인민 위원이 외치니까 모인 군중들은

“옳소! 옳소!”

모두 오른손을 주먹 쥐어 올리면서 외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대신 내보내시면서 ‘너는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만 하면 된다.’고 일러주신 말씀이 떠올랐지만, 나는 도저히 남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깔고 앉았던 운동화를 걷어들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저분은 악질분자가 아닙니다! 저분은 내가 잘 압니다! 내 고모부니까요!”

나는 마음속에서 북받치는 말을 뱉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다. 힘차게 부르짖고 주위를 둘러보니, 군중 모두가 나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벌게진 우두머리 인민 위원이 소리쳤다.

“저, 간나 새끼를 묶으라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완장을 두른 인민 위원 서너 명이 곧 내게로 다가와서 거칠게 내 팔을 낚아채며 나를 단상으로 올렸다.

“보라우요! 반동분자 새끼들은 어린 조카까지도 악질인 거, 보셨디오?”

고모부는 앞으로 묶인 두 손을 입가로 올리고 검지를 펴서 자기 입에 대고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또 다른 발언을 할까봐서 애처롭게 나의 입을 막고 있었다. 그런 그분을 그들은 총살로 처형하려고 몰고 나갔다.

군중이 흩어지고 나는 조사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끌려왔다. 그들은 ‘자식 사상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자식이 반동발언을 서슴지 않느냐’고 하면서 내 부모님께 발길질을 했다. 어머니의 허약한 체구는 몸을 옹그리며 매를 맞았고, 아버지의 가는 허리는 그들의 발길질에 꺾였다.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즉석에서 부모님께는 강제 노동형벌이 내려져서 앞으로 3 개월간 방공호 파는 작업에서 솔선수범하라고 하면서, 어린 나는 풀어주었다. 나의 뿔뚝 성질 때문에 억울하게도 내 부모님은 이튿날부터 아침 6시에 나가서 저녁 8시까지 부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낮에 점심으로 보리콩밥이 한 덩어리씩이 나왔는데, 부모님은 한 덩어리를 두 분이 나눠 드시고, 한 덩어리는 집으로 숨겨 오셔서, 물을 한 솥 붓고 보리죽으로 끓여서 우리들의 저녁으로 때웠다. 양식이 떨어져서 굶게 되었다. 우리는 돈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빨간 색 북한 돈만 통용되었기에 쓸 수가 없었다. 그동안에는 어머니의 금비녀나 금가락지로 물물 교환하여 양식을 마련해 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인민부에서 곡물을 공출해 갔다는 것이다. 고모는 우리보다 서울 시내에서 오래 살았기에 그곳 곡물상과는 깊은 인연이 있을 것으로 보고, 언니와 내가 고모댁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기로 했다. 여자 둘이 가서는 얼마 못 가지고 온다고 하면서, 고모부가 처형된 후 슬픔에 잠겨있는 고모님도 위로할 겸 오빠가 가기를 자청했다. 식구가 모두 반대했지만, 한창 나이에 집에만 갇혀 있기에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하면서, 낮에는 인민군들이 가택 수색에 동원 되느라고 직행으로 달리는 전차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애원하는 오빠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빠와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고모댁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빠는 고모댁에 거의 도착했을 때에 내무서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서대문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잡혀와 있었다. 오빠를 데리고 그들이 학교로 들어섰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 하니, 그 중의 한 명이 막아섰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오빠와 헤어졌다. 내가 목 놓아 우니까, 수위실 경비가 어디에다 전화를 거는 것이 보였다. 조금 있더니 장교인 듯한 인민군 한 명이 운동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어디서 본 얼굴이다. 군인으로 뽑혀 나갔던 수용오빠 같았다. 전보다는 조금은 여윈 듯했지만 틀림없는 수용오빠였다. 훤칠한 키며 부리부리한 눈망울이며 옛 모습 그대로였다. 반가웠지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군인이 적군이 되어 나타나는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지금 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다.

“영아 아니니?”

“오빠가, 저기 영철 오빠가…….”

나는 울면서 뒷줄에 엉거주춤 서 있는 오빠를 가리켰다. 그가 곧 오빠 곁으로 갔다. 오빠와 동행한 내무서원과 한동안 얘기하더니, 오빠를 데리고 나왔다. 우리끼리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수용오빠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가까운 고모댁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여 두 남자가 한 자루씩 메고 동대문 우리 집까지 동행해 주었다. 자기는 바로 근무처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반갑게 만난 언니와는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섰다. 수용오빠는 군인으로 나가 싸우다가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다시 인민군 옷을 입혀서 전선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수용오빠는 틈만 있으면 언니를 찾아왔다. 올 때마다 밀가루나 의약품들을 가져왔다. 식품부와 위생부를 관리하고 있어서 가능하다고 했다. 그 와중에서 수용오빠는 우리의 구세주였다. 수용오빠의 아버지가 충직하게 우리의 고향집을 지키다가 폭격에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우리도 들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언니와의 교제를 굳이 막지 않으셨다. 그러나 할아버님은 마뜩찮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두 젊은이들이 날이 어두워지면 낙산을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는 날에는 나는 언니의 충실한 보호자가 되기도 했다. 언니가 늦게 돌아올 때 할아버지가 깨지 않으시도록 대문을 열어줘야 했으므로 나는 언니의 낮은 음성을 기다리며 대문 곁을 지키기도 했다. 언니는 항상 흥분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떨리는 가슴을 털어놓기도 했다.

“첫 키스를 했어. 얼마나 황홀했던지……. 세상이 모두 달라 보인다, 영아야!”

하며 언니는 몸을 떨었다.

양로원 내부의 세계는 외부와는 너무나 달랐다. 밖의 세상은 생동하는 봄을 맞이하고 있지만, 양로원 내부의 세상은 낙엽 지는 가을 같았다. 며칠 전까지도 인사를 나누었던 일층 끝 방의 노인이 낙엽 지듯이 떠났다. 그 방에 새로 노신사가 들어오셨다고 한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나 간호사는 ‘죽음’에 대해서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늘 미소를 짓는가 보다. 곧 떠날 분들이기에 더욱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동부에서 근무하는 언니의 아들이 방문했다. 조카는 잠들어 있는 언니를 깨우려고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니ㅡ!”

그랬더니, 옆 침대의 노인들 세 분이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킨다. 자기 아들들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 부산하게 머리를 매만지거나 옷깃을 여미면서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하다가, 자기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힘없이 다시 옆으로 몸을 눕히는 노인들의 굽은 등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삼켰다. 곧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터이므로, 마치 나의 미래를 보는 듯했다.

‘어머니ㅡ’

얼마나 고귀한 이름인가? 얼마나 듣고 싶은 자녀의 음성인가? 나는 언니가 오히려 치매 상태에 있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매화 향기에 취하여 그리움이나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있는 언니를 차라리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일은 언니를 모시고 봄의 생기가 감도는 봄꽃이 만발한 정원으로 안내를 해야겠다. 언니가 화단을 가꾸는 일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 해 8월의 한여름 더위는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언니와 오빠는 겨울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작전 하에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고, 드디어 9월 27일에 서울의 남산과 낙산에서 서울 시내를 사이에 두고 공산 진영과 민주 진영이 마주 서게 된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양측의 교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우리는 방송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9월 27일 저녁 시간이었다. 누가 대문을 조용히 흔들었다. 나는 언니와 오빠가 숨은 뒤에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수용오빠가 냉수 한 그릇을 청하고 있었다. 몹시 그가 지쳐보였다. 각 동회로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들은 모두 낙산으로 집합하라고 해서 서대문에서부터 걸어왔다는 것이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 국군이 낙산으로 대포를 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오빠를 구해준 수용오빠에게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얼른 판단이 서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수용오빠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오빠는 목이 마른 것이 아니고, 배가 고픈 것 같다. 들어오세요!” 나는 대문을 활짝 열었다.

“내가 얼른 밥을 해 드릴 터이니, 잡숫고 떠나세요.

오늘도 부모님은 부역에 나가고 안 계셨다. 나는 밥을 짓는 척, 되도록 시간을 끌 었다. 일부러 ‘수용오빠’를 큰 소리로 불러서 언니와 오빠가 수용오빠가 온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다락에서 솜이불을 덮어쓰고 숨어 있던 언니가 내려왔다. 청소도구를 넣어두는 변소 뒤칸에서 분뇨 냄새를 맡으며 숨어있던 오빠도 나왔다. 오빠는 수용오빠에게 라디오로 들은 정세를 알려 주었다. 지금 낙산으로 가는 것은 무덤 으로 가는 길임을 알려서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언니는 오빠 옆에서 말없이 애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안 가면 전 가족을 총살시킨다고 했는데……. ”

망설이는 수용오빠는 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가족과 애인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드디어 남기로 결정하자 오빠는 자기 옷을 가지고 나와서 수용오빠의 인민군 옷을 벗기고 갈아 입혔다. 나는 다시 망을 보고 언니가 저녁을 차렸다. 그때 대문이 또다시 흔들렸다. 우리가 긴장을 하고 있는데, 조그맣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엄마다. 문 열어라.”

오늘은 감독관도 안 나오고 부역에 참여한 자도 몇 명 안 되어서 도망 나오셨단다. 부모님이 수용오빠를 보고 놀라셨다. 정세 소식과 함께 수용오빠의 경위를 말씀 드렸더니,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우리는 저녁에 벌어질 전투에 대비했다. 주먹밥을 만들어 각자의 가방에 분배했고, 약간의 돈과 옷가지도 넣었다. 약품도 나누어 챙겼다. 옷은 되도록 두꺼운 겨울옷으로 입었다. 파편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활동하기 좋도록 바지차림이었다. 오빠는 할아버지와 짝이 되어 안전을 책임지기로 했다. 아버님은 어머님을, 언니와 수용 오빠는 나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나는 언니의 손을, 수용오빠는 언니의 손을 잡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쌍방에서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집이 흔들리자 온 동네 사람들은 집이 무너져 깔리는 것을 피하려고 골목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만일 헤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안전지대로 갈 것이며, 내일 다시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피-웅ㅡ!”
하며 박격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조금 뒤에는 천지를 흔드는 폭발음이 들린다. 뒤의 낙산에 포탄이 떨어지면 파편이 우두둑 우두둑 떨어진다. 우리들은 이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았다. 아군 비행기가 뜨면 시가지에 파 놓은 방공호에서 인민군이 대포와 기관총으로 대응하는 총소리가 요란하다. 시가전이 벌어져서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가로 나가면 안 되었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몰려다니며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맸다. 우리 식구도 많은 인파에 휩쓸려 헤어졌다. 파편에 맞은 어머니를 붙잡고 식구들이 ‘어머니! 어머니!’ 아우성치며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가족도 보였다. 어디인지 인파에 휩쓸려 정신없이 내려왔을 때 언니가 하수도 구멍이 노출되어 있는 곳을 발견했다. 언니는 나에게 그 구멍으로 들어가라고 강요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망설이는 나에게

“아니면, 죽어! 지금 냄새가 문제야?”

하면서 내 엉덩이를 발로 차서 나를 하수도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얌전하던 언니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코를 막고 그 하수도 구멍 깊이 기어들어갔다. 언니와 수용오빠도 뒤따라 들어왔다. 코를 막을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막아야 포탄의 위력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고 수용오빠가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엎드려서 눈과 귀를 막았다.



밤새도록 포격은 계속 되었다. 남산에서는 낙산을 향하여, 낙산에서는 남산을 향하여. 새벽 동이 틀 무렵에 포성이 그쳤다. 잠잠했다. 하수구 끝자리에 있던 수용오빠가 하수구에서 나갔다 오더니 우리를 불렀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숨어 있던 곳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거의 시가전이 벌어졌던 동네까지 내려와 있었다. 집으로 향하려고 허리를 펴고 둘러보니, 동대문부터 서대문까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폭격으로 전소하여 남아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가게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길가 방공호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본 사람들은 방공호 안에는 불탄 시체가 가득하다고 전했다. 우리의 온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했고 옷은 형편없이 더럽혀져 있었다. 그래도 이 전쟁터에서 안전했던 것이 행운이었다. 할아버지 집은 아래채 지붕이 날아갔고, 다른 집들도 부분적으로는 파손되었으나 전소한 집은 없었다. 아군이 일반인 집에는 포격을 삼갔던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오빠가 반겨주셨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할아버지가 파편에 발등을 다치셔서 누워 계셨다. 할아버지는 수용오빠가 전심으로 돌봐 드렸다. 전에 수용오빠가 의약품을 갖다 놓은 것이 유용하게 쓰였다. 성실한 수용오빠의 간호에 할아버지의 눈길도 점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솜이불을 쓰고 뉴스를 듣던 오빠가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국군이 이겼대요! 두 시간 후에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린답니다!”

눈물이 글썽해진 오빠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 안았다.

“우리, 태극기를 그리자!”

내가 외쳤다. 우리는 시간이 없었다. 도화지에 둥근 원을 그리고 아래위로 붉은 색과 남색을 칠했다. 그리고 네 귀퉁이에는 구별 없이 검은 색으로 작대기 세 개씩을 그렸다. 언니와 내가 태극기를 들고 시내로 뛰어나갔다. 벌써 많은 인파가 국군 과 U. N군을 환영하고 있었다. 중앙청에는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휘날리고 있었고 군중 중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제대로 된 태극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군복과 철모에 나뭇잎을 꽂은 채로, 진흙을 묻힌 채로 U. N군과 국군들은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인파를 헤치고 앞자리로 나섰다. 나도 한 국군 아저씨와 악수를 하였다. 어느 할아버지가 국군의 손을 잡아 흔들며 울면서 호소하고 있었다.

“내 손자가 지금껏 잘 숨어 있었는데, 한 시간 전에 잡혀갔어! 어서 뒤따라가서 구해줘요!”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내 오빠의 일처럼 생각되어 눈물이 나왔다. U. N군들은 시민들과 악수를 하면서 ‘땡큐! 땡큐!'를 연발하고 있었다. ‘잘 참아주어서 고맙다’는 뜻인 것 같다. 우리 시민들도 ‘땡큐! 땡큐!'를 연발하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주어서 고맙다’는 뜻일 것이다.

‘자유! 자유가 이리도 좋은 것을…! 자유가 이리도 귀한 것을…!’

언니와 나는 유쾌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한 반공 청년단’이라고 쓴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집 마당에 가득했다. 우리가 국군을 환영하는 동안, 이들은 정보에 따라 공산 치하에서 활동하던 공산당원들을 색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청년들은 수용오빠를 무릎을 꿇리고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마도 공산당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돌연 내 가슴 속으로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솟구쳤다. 도대체 우리는 지금 동족끼리 서로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왜 우리는 이래야만 하는가? 사상이 무엇이기에 인간을 벌레보다 못하게 죽이고 서로에게 상처를 내며 피를 내뿜고 있는 것인가? 내 아둔한 머리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이 세상은 확실히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오빠가 수용오빠를 위해서 열심히 변호하고 있었다.

“이분은 국군 포로였습니다. 공산당 치하에서도 인민군으로 끌려가는 나를 구해준 분입니다.”

“할 말이 있으면 ‘반공 청년단 사무실’로 오시오!”

그들 중 높은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무조건 수용오빠를 결박해 끌고 갔다. 개같이 끌려가면서도 수용오빠는 고개를 돌려 눈으로 언니를 찾고 있었다. 언니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크게 소리쳤다.

“영애 씨, 사랑해ㅡ!”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언니가 나는 듯이 달려가서 열정적으로 수용오빠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수선화 같았던 젊은 날의 내 언니는 아름다운 첫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이제는 양로원에서 과거를 잊고 매화 향기 속에 취해 있다. 언니가 잠든 사이에 나는 언니의 서랍은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낡은 공책 한 권이 있었다. 무심코 읽어 보았다. ‘사랑하는 수용 씨...’로 시작되는 편지 형식의 글은 언니가 수용오빠와 헤어진 후부터 결혼 전까지 써가던 ‘사랑의 목마름’이었다. 어찌해서 이 공책이 아직 까지도 언니가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살며시 다시 그 ‘사랑’을 서랍에 보관하였다.



오늘은 참으로 따뜻한 날씨다. 언니가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언니를 모시고 산책에 나섰다. 언니가 요새는 식사량이 많이 줄었고 힘이 없어 보여서 햇볕을 쪼여드리고 싶었다. 휠체어에 태운 후에 두꺼운 담요를 둘렀다. 분수대에서는 여전히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또 한 분의 노신사가 휠체어를 타고서 분수대를 돌고 있었다. 새로 오신 분인 것 같다. 언니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거워 했다. 나는 언니를 매화나무 밑으로 옮기려고 휠체어를 돌리는데 갑자기 언니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수용 씨!”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언니는 덮고 있던 담요를 떨어뜨린 채 우뚝 서 있었다. 언니 의 눈길을 따라 나도 바라보았다. 분수대를 돌고 있는 또 한 대의 휠체어에 계신 노신사에게 언니의 시선은 멈추어 있었다. 그분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 멋졌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많이 수척해 있었다. 나도 못 알아본 그분을 언니가 먼저 알아본 것이다. 그것도 제정신으로.

“혹시 수용 오빠…?”

그분은 나를 찬찬히 살피셨다.

“언니는 안녕하신가…?”

그분은 나를 알아보셨다. 그리고 60년 전 옛 사랑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언니 옆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듯했다. 언니도 그처럼 변해 있었나 보다.

“언니! 언니가 바로 보았어. 바로 수용오빠야!”

그러나 언니의 표정은 덤덤해져 있었다. 언니의 눈은 다시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제야 수용오빠는 언니를 알아보고는 조용히 다가와서 언니의 손을 잡았다. 언니가 기겁을 하며 손을 빼냈다. 노신사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우리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흘러내리는 분수처럼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바라보며 한참을 말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노신사는 그 후에 매일 언니의 침상을 찾았다. 그러나 언니는 다시는 옛 사랑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삼 개월 후에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언니의 장례식에 수용오빠는 휠체어의 몸으로 장지까지 따라와서 언니를 배웅해 주었다. 나는 그날 수용오빠에게 언니가 고이 간직했던 공책을 전해 주었다. 이제 수용오빠는 매화의 전설에 나오는 ‘휘파람새’가 되어 언니 곁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며 언제까지 나 매화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전설의 새처럼…….

▶수상소감

1950년 6월 26일 월요일 아침, 저는 평소대로 등교를 하였지요. 아침공부가 시작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천진한 어린 우리들은 공부하지 않는다고 좋다고 책상을 두드리며 떠들었지요, 교무회의를 끝내시고 교실로 오신 선생님은 엄숙하고도 슬픈 표정으로,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수업은 없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에서 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야 한다!” 이렇게 황급하게 우리는 선생님과 급우들과 헤어진 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는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제 이 적은 <증언> 이 어찌 민족의 큰 비극을 대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제는 부디 주님의 공의를 펼쳐주옵소서!

제 보잘것없는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 깊이 감사 드리며, 더욱 좋은 글로 보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