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신인문학상 / 단편소설 부문] [가작] 산으로 간 기러기
최지만
사회자는 의상과 화장을 손 보고 있었고, 초대손님은 대본을 보며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객석에 있는 주부 방청객들 중 일부는 처음 와본 방송국 모습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쳐다보며 구경하기 바빴다.
“자, 녹화 들어가겠습니다. 스탠바이!”
머리에 헤드폰 마이크를 쓴 조감독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실내는 순간,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무대 위에서 사회자를 도와주던 사람들도 어느새 썰물처럼 사라졌고, 무대 앞 방송용 카메라 다섯 대에는 일제히 빨간 불이 들어왔다.
“쓰리, 투, 원, 큐!”
조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대한방송의 인기 프로 '상쾌한 아침'의 경쾌한 시그널 음악이 울려 퍼지며 녹화가 시작됐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상쾌한 아침의 이재웅입니다!”
“안녕하세요? 홍은아입니다!”
남녀 아나운서의 인사가 끝나자 방청객은 조 감독의 수신호에 따라 열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자, 오늘은 저희 프로에 특별한 손님을 한 분 모셨습니다. 오늘 저희 방송을 보시는 분 중에서 현재 농촌에 사시거나 앞으로 농촌으로 이주하실 계획이 있는 분들은 이분을 통해 유익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으니 끝까지 채널 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자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 여자 사회자가 말을 잇는다.
“네, 이분은 농어촌 부흥대회에서 영광의 대상을 수상하고, 그것도 모자라 노동부에서 주관한 일자리 창출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신 김철수씨입니다.”
여자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초대석에 앉아있던 철수는 밝은 얼굴로 방송 카메라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김철수씨 축하 드립니다!”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김철수씨는 현재, 경남 칠곡군 남진면 진성 2리 이장 님이죠?”
“네, 제가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삼장이나 사장은 못 되고 이장입니다.”
“하하!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네요!” 남자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여자 사회자는 “그러게요, 예능 감이 아주 좋으시네요!”라고 맞장구쳤다.
“자, 김철수씨는 어떤 분이시기에 그리고 어떻게 하셨기에 정부에서 주관한 대회에서 연속으로 수상할 수 있었는지 시청자 분들께서 무척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네, 저는 원래 서울에 살다가 3년 전에 농촌으로 내려간 귀농인입니다.”
“아니, 귀농을 하셨다고요?” 여자 사회자가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농촌으로 내려가시게 된 특별한 동기라고 있으신가요?” 이번에는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었습니다…….”
철수가 입가의 미소를 거두고 잠시 뜸을 들이자 사회자와 방청객들은 그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2.
크리스마스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던 2011년 어느 겨울 밤, 철수는 영안실에 앉아 친구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웃고 있는 원규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던 철수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답답함을 담배 연기에 얹어 길게 내뿜었다. '휴~'
“참, 원규 와이프랑 애들은 다음주나 돼야 온다며?”철수 옆에 앉아있던 친구 재우가 말했다.
철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재우는 목소리 톤을 높여 말을 이었다, “아니, 남편이 죽었는데 애들 기말고사 보고 귀국한다는 게 말이되, 말이 되냐고?”
간간이 창문을 후려치는 차가운 겨울 바람만큼이나 상주 없는 영안실은 차갑고 쓸쓸했다. 철수는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허공에 피어 오른 담배 연기는 마치, 한마디 말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라진 원규처럼 영정 사진 앞에 머물던 향 연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원규는 아내와 아이 둘을 캐나다에 유학 보내고 지난 5년 동안 외로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가끔 친구를 만나 소주 잔을 부딪칠 때도 그는 늘 웃음을 달고 살았다.
그랬던 친구가 갑자기 생을 마감하자 철수는 더 마음이 아팠다.
“남편? 아버지? 우린 그냥 돈 버는 기계일 뿐이야!”
오랜 침묵을 깨고 철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재우가 물었다.
“바람 좀 쐬려고……”
영안실 밖으로 나오자 차디찬 겨울 바람이 철수의 얼굴을 때렸다.
답답한 마음을 찬 바람으로 털어내고 싶었을까?
평소 같으면 옷깃을 조였을 텐데 철수는 오히려 코트를 벗어 어깨에 걸쳤다.
새벽 두 시가 넘은 늦은 시간, 세상은 잠들고 거리는 조용했다.
바람에 날려 이리, 저리 나뒹구는 낙엽과 휴지 조각들이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는 게 뭔지…….” 혼잣말을 내뱉은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원규의 모습이 보였다. 영정 사진처럼 웃고 있는 친근한 그의 모습.
철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때였다. 등 뒤로 ‘여기 있었구나!’하는 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수는 손 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왜 나왔어?”
“조문 오는 사람도 없고 답답해서 그리고 네 걱정도 되고……”
“내 걱정이라니?”
“너도 기러기잖아! 혹시 알아? 너도 원규처럼 엉뚱한 짓 할지? 넌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나이 마흔다섯에 친구들 줄 초상 지르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지?”
그랬다. 철수 또한 아내와 아이 둘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였다.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조기유학'이란 명분 하에 소중한 가족이 멀리 떨어져 사는 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 또한 원규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만 들어가자. 원규 혼자 외롭겠다.” 철수는 재우의 등을 감싸며 말했다.
3.
얼마나 잤을까?
철수는 핸드폰 문자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원규의 장례를 마치고 5일 만에 집에 와 제대로 된 잠을 잔 그는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철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탠드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병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벌컥벌컥~'
오전 11시쯤 침대에 쓰러졌던 것 같은데 열 평 남짓한 그의 오피스텔 창 밖 세상은 벌써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침대 옆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자 시간이 보인다, 'PM 11:07'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철수는 혼자 말을 내뱉었다.
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문지르자 직장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온 안부 문자 등 그가 자는 동안 도착한 문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대충 문자를 확인한 그는 의자에 앉아 친구 재우의 번호를 눌렀다.
두세 번 신호음이 울리더니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잘 잤냐? 안 그래도 지금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내일 우리 와이프한테 전화하는 거 잊지마!”
“나야 네가 시키니까 한다만 철수 네 와이프가 많이 놀랄 텐데 꼭 그래야겠어? 결심한 거야?”
“응!” 철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알았어. 그럼, 내일 병원에 환자 뜸할 때 전화할게.”
“고맙다.”
전화를 끊자 또다시 적막이 몰려왔다. 철수는 무의식적으로 원규의 번호를 누르려다 문득, 더 이상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습관은 무서웠다. 평소 잠이 오지 않으면 원규에게 전화해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버릇이 한동안 쉬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철수는 혼자라는 느낌이 싫어 여느 때처럼 노트북 컴퓨터에 저장된 음악을 틀었다. 경쾌한 리듬과 함께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더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게~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줄~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이 노래는 철수와 원규가 고등학교 시절 통기타를 치며 즐겨 부르던 그들의 18번이었다. 철수가 지그시 눈을 감자 원규와 함께했던 추억이 흑백사진처럼 떠올랐다.
‘원규야, 나중에 우리가 어른이 되면 우린 아이들한테 공부해라, 공부해라 잔소리하지 말고 이렇게 넓고 푸른 초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게 해주자?’
‘그래! 그리고 철수야, 우린 나중에 도시에 살지 말고 이렇게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같이 살자?’
‘오브가 콜스고, 두 말 하면 입 아프지!’
‘하하하!’
추억에서 눈을 뜨자 여전히 혼자라는 현실만이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엔 현실 속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철수는 복잡한 생각을 지우려 볼륨을 높였고 적막했던 그의 공간은 힘찬 노랫소리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접어드는 초저녁~ 누어 공상에 들어~ 생각에 도취했소~ 새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4.
근 일주일 만에 학원에 출근한 철수는 먼저, 원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화초에 물을 주던 원장이 그를 발견하고 말한다.
“아니, 이게 누구에요? 김 선생님, 얼굴 잊어 먹겠어요! 참, 친구분 장례식은 잘 치르셨어요?”
“예, 덕분에 잘 치렀습니다.”
철수 눈에 비친 50대 후반의 원장은 일주일 사이에 머리숱도 빠지고 배도 조금 더 나온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인사를 나눈 그들은 잠시 후 고급 가죽 소파에 앉아 원장 비서가 가져다 준 녹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전라도 보성출신 후배가 준건데 어때요? 맛이 괜찮죠?” 원장이 말했다.
“네, 향이 아주 좋습니다.” 철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이제 장례식도 끝났으니 다시 강의 하셔야죠? 그동안 우리 학원 최고의 강사인 김 선생님이 없어서 고생했습니다. 김 선생님 언제 나오냐고 학부모들 원성이 아주 난리가 아니었어요, 하하!”
철수는 말 없이 양복 안 주머니에 있던 편지봉투를 꺼내 원장 앞에 내려놓았다.
“아니, 이게 뭡니까?” 원장이 봉투를 집어들며 말했다.
“사직서입니다.”
“뭐라고요?”
적잖이 놀란 듯 원장은 안경을 올려 쓰며 말을 이었다. “김 선생님, 연봉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면, 제가 김 선생님한테 실수라도 한 게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철수는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곧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원장은 철수를 잡기 위해 높은 연봉 등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원장은 철수가 한 달에 한번 인터넷 수학강의만 녹화해주는 조건으로 그의 사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철수는 원장에게 머리 숙여 깍듯하게 인사하고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참, 김 선생님!” 원장이 말했다.
“네?” 철수는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이건 제가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학원 그만 두시고 뭐 하실 건가요?”
그러자 철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행복의 나라로 가려고요!”
“행복의 나라요?” 원장의 얼굴에 궁금함이 피어 올랐다.
학원에서 나온 철수는 테헤란로를 따라 역삼동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인지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점심때라 건물 여기저기에서 직장인들이 하나, 둘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철수는 문득, ‘내 정신 좀 봐!’하고는 가던 길을 멈췄다.
그는 점심을 함께하려고 원규가 다니 던 회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씁쓸한 표정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미국에 있는 부인이었다.
철수는 걸음을 멈춘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기야, 나 방금 자기 친구 재우씨랑 통화했어. 재우씨가 그러는데 자기 암이라며? 그게 정말이야? 농담이지, 그렇지?”
울먹이듯 다급하게 말하는 부인과 달리 철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이야.”
“뭐? 사실이라고?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해?”
울먹이던 그녀는 결국, 펑펑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우는소리를 듣고 있자니 철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보다 7살이나 어린 아내는 철은 좀 없지만 착한 여자였다.
하지만 철수는 '행복의 나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울어. 나 오늘 낼 죽는 거 아니야!”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철수 아내의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둘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했고, 철수는 그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기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미국에 있겠어?” 그녀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그러자 철수 마음에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원규 와이프와 달리 주저 없이 귀국을 결심해준 아내가 고마웠고, 자신의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보지 못했던 지난날 자신의 불효에 대해 미안했다.
“고마워!”철수는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긴, 하루빨리 여기 정리하고 갈 테니까 그때까지 약도 잘 먹고, 밥도 잘 먹고 있어야 해, 알았지?”
“그래, 그럴게!”
통화를 끝낸 철수는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알 수 없는 그 어떤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5.
택시를 타고 서울 역에 도착한 철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만에 와 보는 서울역이던가!'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현실이란 바쁜 먼지 속에 묻혀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울 역에 왔던 소중한 기억'을 꺼내 잠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빠, 시골에 가면 토끼도 잡고, 꿩도 잡아주세요?’
‘알았다! 이 아빠가 토끼 잡는 덴 선수 아이가?’
‘정말이죠? 와, 우리 아빠 최고!'
잠시 후 철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목적지에 빨리 가려고 KTX를 탔지만 그는 일부러 몇 대 안 남은 새마을호를 택했다. 육중한 열차가 기지개를 펴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창 밖으로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의 순수한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KTX를 타면 너무 빨라서 잘 보이지 않던 풍경이 새마을호에서는 잘 보였다.
3시간 정도 달린 기차는 어느덧 대구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1시간쯤 달리자 철수의 고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오는 곳이지만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발전 없는, 말 그대로 완전 촌이었다.
“아저씨, 저 앞에 세워주세요.” 철수가 말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마을 어귀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후 5시,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겨울이라 세상은 벌써 검게 물들었고, 낯선 방문객의 냄새를 맡았는지 여기저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철수가 어느 집 대문을 밀자 '끼 이익!' 거리는 녹슨 철 대문 소리가 그의 방문을 알렸고, 마당 한구석에 묶여 졸던 개는 이내 낯선 철수를 잡아먹을 듯 짖어 대기 시작했다. 철수가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미닫이 문으로 된 안방 문이 열리더니 집 주인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형님? 저, 철수에요!”
“아니, 이게 누고? 철수 아이가?”사촌 형은 신발도 신지 않은 체 마당으로 내려와 철수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형님,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래, 잘 지냈다. 근데, 니 어디 아프나? 전보다 얼굴이 마이 말랐다?” 사촌 형은 철수의 얼굴을 좌우로 살피며 말했다.
“아프긴요, 괜찮아요!"
잠시 후, 그들은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술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뭐라꼬? 철수 니가 이 촌에 와서 살겠다꼬?”
“네!”
“야야, 그거 말처럼 그리 쉬운 일 아이다!”
“아니, 도련님은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오신 분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촌에서 살려고 그런데요?” 옆에 있던 형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철수는 술 잔을 들이키고는 기차를 타고 오며 느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형님, KTX를 탔을 땐 잘 보이지 않던 바깥 풍경이 새마을호에서는 잘 보이더라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고?”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란 미명 하에 다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보고 느껴야 할 삶의 중요한 것들을 못보고 사는 것 같아요.”
사촌형과 형수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철수의 말을 경청했다.
“제가 KTX대신 새마을호를 탔어도 이렇게 형님을 만났잖아요! 그리고 비록, 한두 시간 늦게 왔지만 대신 KTX에선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자연도 보고,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진 시간도 가질 수 있었고요.”
철수는 갈증을 느꼈는지 물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저 또한 남보다 빨리 출세하는 게 행복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남보다 조금 늦게 가고, 남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 삶에는 성공이나 물질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가치 있는 거? 그게 뭔데?” 사촌 형이 물었다.
“이렇게 형님하고 술 마시며 옛 추억도 더듬고 앞날에 대해 의논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죠!”
“그게 가치가? 그럼, 우리 가치 있는 일 마이 하자. 자, 마시자!”
“네!”
“이 양반은 또 생선이 물을 만났다!”형수가 웃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오랜 만에 만난 그들은 동네 개들이 짓다 지쳐 잠든 새벽 녘까지 술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철수는 사촌 형과 함께 부모님이 영면해 있는 묘지를 찾아 인사 드리고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촌 형 말에 의하면 농촌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직장이니 애들 교육이니 해서 하나, 둘 도시로 떠나고 촌에는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노동력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했다.
“야야, 오십 대인 내가 우리 마을서 막내 소리 듣는다! 이게 말이 되나?”
그는 또 노동력이 부족하다 보니 특산물 재배 같은 소득창출을 위한 기회가 생겨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사료나 비료 값은 매년 오르는데 수확물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게다가 FTA때문에 외국 농산물은 물 밀 듯이 밀려오는데 자국농민을 보호해야 할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현실과 동 떨어진 마치, 농민들은 냉장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늘 보일러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농촌이 잘 될 턱이 없다고 했다.
철수 손에는 수첩과 볼펜이 들려 있었고, 그는 사촌형이 농촌의 현실과 문제점에 대해 말하는 걸 꼼꼼히 기록했다.
“야, 철수야! 니 그거 다 적어서 모할라고 그라는데?”
“적을 알아야 싸울 준비를 하죠?”
“싸울 준비? 니 어디 싸우러 가나?”
“하하! 그게 아니고요, 농촌에 정착하려면 우선, 농촌의 문제를 알아야 거기에 맞는 적당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 난 또 니가 누구랑 싸우러 간다는 소리로 들었다.”
“형님, 보청기라도 하나 맞춰드릴까요?”
“아이다. 이래뵈도 내가 이 마을 막내 아이가? 막내가 무슨 보청기……”
철수는 사촌형과 걸어가며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이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철수가 어렸을 때 이곳에 오면 수 많은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쏟아낸 웃음 소리가 마을 전체를 뒤덮었는데 그 많던 아이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어쩌다 우리 농촌이 이렇게 됐는지 가슴 속 답답한 감정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일주일간 사촌형 집에 머물며 농촌답사를 끝낸 철수는 아침 상을 물리자 마자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 앞에는 미리 불러놓은 택시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이제 가면 또 언제 오는데?”사촌 형이 말했다.
“오늘 애들 엄마가 귀국하니까 상의해보고 가급적 빨리 와야죠. 그래야 봄 되기 전에 형님 따라 내년 농사 준비하죠.”
“근데, 니 진짜 오는 거 맞나?”
"아니, 당신은 가짜로 오는 사람이 집을 삽니까?”형수가 말했다.
“맞다, 니 벌써 집도 샀지! 아, 동네 막내가 이래 정신이 왔다 갔다 하면 안 되는데? 나는 막낸데!”
“하하! 자,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내려올 때 전화드릴께요!”
“그래, 조심해 가라!”
“네!”
이윽고 철수를 태운 택시가 힘찬 엔진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창 옆으로 펼쳐진 마을 풍경을 바라보던 철수가 문득, 고개 돌려 뒤 돌아보니 사촌 형과 형수는 아직도 택시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철수의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래, 서로 아껴주고 배려하며 인간의 따듯한 정을 느끼며 사는 거, 이게 바로, 사람답게 사는 거야!’
6.
'상쾌한 아침'의 녹화는 단 한번의 NG도 없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철수는 난생 처음 해보는 방송출연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잘 적응했다.
“그럼, 친한 친구분의 갑작스런 죽음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이유였나요?”남자 사회자가 물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님과의 약속 그리고 제 아이들의 미래와 농촌지역의 발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버님과의 약속이라니요?”
“제 아버님은 농촌에서 태어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아버님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이 저희 아버님도 많이 배우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못 배우셨기 때문에 농촌발전에 도움이 못 된다는 생각에 저를 가르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진 철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철수에게 지식을 얻기 위한 교육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참교육의 목적은 바로, 남을 배려하며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반드시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안 지어도 좋으니 고향과 지역발전을 위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제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철수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버님이 참 훌륭한 분이셨군요!”남자 사회자가 말하자 여자 사회자는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공부의 목적은 상급학교 진학이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는데 말이에요.”라고 거들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제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예전 아버님의 말씀이 늦었지만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더군요.”
“아무리 동기부여가 확실하다고 해도 서울에 살다가 하루 아침에 농촌에 적응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초창기 농촌 생활은 어떠셨나요?”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5년 했었는데요, 말도 틀리고 문화도 다른 남의 나라에서도 살았는데 하물며,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내 나라 내 땅에서 못살게 뭐 있겠나 라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사모님과 자녀분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암에 걸려 공기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참, 건강은 어떠세요?”여자 사회자가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럼, 완쾌되신 건가요?”
“오늘 처음 밝히는 건데 저는 암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네?” 여자 사회자의 눈이 커졌다.
“암은 핑계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농촌으로 이주하자고 하면 집 사람이나 아이들의 반대가 심하고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가족간에 사이가 나빠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하얀 거짓말을 했습니다.”
“너무 하셨어요! 그 동안 사모님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여자 사회자가 말했다.
“그 점은 저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 사람이나 애들이나 다들 농촌생활에 만족하고 너무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이 방송 나가면 저희 집 사람이 절 가만히 안 둘 텐데 큰일입니다. 하하!”
“사모님도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가족의 생계와 앞 날을 책임져야 하는 김철수씨도 비록, 말씀은 안 하시지만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거에요. 그건 제가 남자라서 조금은 압니다.”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철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남자 사회자가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 공기 좋은 귀농생활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농촌에서의 제한된 경제활동 그리고 도시에 비해 선택의 폭이 적은 아이들의 교육시설 등을 이유로 포기하는 게 현실입니다. 김철수씨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건 말입니다……” 철수가 입을 열자 사회자와 방청객들은 그의 입에서 또 다시 어떤 이야기가 쏟아질지 자못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7.
첫 술에 배부른 일 없듯 귀농 첫해 가을에 받아 든 철수의 농사성적표는 낙제 수준이었다. 사촌형을 따라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던 철수에게 낙제점수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갈수록 농촌생활에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맨 처음 시골에 내려와 도시와 다른 생활환경 때문에 불편해 하던 그들은 세월이 한 장, 두 장 쌓여갈수록 농촌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철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꿈꾸던 '행복의 나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것 같아 기뻤고 아울러,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더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했다.
저녁식사를 끝낸 철수네 가족은 여느 때처럼 마을 인근의 들로 산책을 나왔다.
중학교 3학년인 장남 재원이와 초등학교 6학년인 차남 재성이는 강아지를 데리고 벌써 저 만치 앞으로 달려가 반딧불을 찾는다며 들녘을 누비고 있었다.
“우리 재성이가 살이 많이 빠졌네?”아내의 손을 잡고 걷던 철수가 말했다.
“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 아토피도 없어지고, 체중도 10키로나 빠졌어요!”아내는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서울에서 살고 싶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문득, 서울이 그립다가도 저렇게 애들이 살도 빠지고 아토피도 없어져서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걸 보면 이곳이 좋기도 해요.”
“더 살아봐. 그럼, 농촌이 더 좋아질 테니까!”철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참, 내년에 재원이가 고등학생이 되는데 적당한 학원이 없어서 걱정이에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수능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인터넷이 있잖아!”
“인터넷이요?”
“그래, 인터넷! 우리 때야 인터넷이 없어서 부모들이 시골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유학 보내고 그랬지만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음악, 영어, 논술 같은 사교육도 받을 수 있고, 게다가 티비에서 하는 교육방송도 얼마나 좋은데! 걱정 마 우리 애들은 잘 할 테니까!”
“정말 그럴까요? 남들처럼 학원에 안 보내도 될까요?”
“당신, 부모의 참된 역할이 뭔지 알아?”
“뭔데요?”
“부모의 참된 역할은 바로, 아이들한테 공부 외에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야.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래서 결국엔 본인이 잘하는 것 또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야!”
“정말 그럴까요?”아내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 봐! 우리 아버님이 나한테 도시와 농촌생활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농촌을 선택한 것처럼 우리도 아이들한테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고 무엇을 할지 최종선택은 아이들 몫으로 남겨두자고.”
“당신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다가도 서울에 사는 친구들 말 들으면 괜히 우리 아이들만 경쟁에서 뒤 쳐지는 것 같고……”
“어렵지?”
아내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바로, 자식농사라고 하는 거야.”
“그나저나, 당신 몸은 좀 어때요?”
“괘, 괜찮아!”철수는 순간, 뜨끔했다.
“내일 서울에 학원강의 녹화하러 가면 재우씨한테 들러 검사도 받고 와요!”
“그, 그래. 그럴게……”
8.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가서 학원강의를 녹화하는 철수는 시골로 내려가기 전 가끔 친구 재우를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철수야, 앞으론 좀 자주 보자!”식당 문을 나서며 재우가 말했다.
“자주 보고 싶으면 너도 빨리 시골로 내려와!”
“나야 그러고 싶은데 우리 마누라 님 때문에……”
그 때였다. 저 앞 길에서 한 남자가 손에 잡지를 들고 판매하는 모습이 보였다.
“재우야, 저게 뭐야?”철수가 호기심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거! '빅이슈(Big Issue)'라는 잡지인데 저걸 팔면 일정 수익이 노숙자한테 돌아가서 그들이 재활하는데 도움이 된데. 영국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우리나라는 작년 여름 터 시작했다지 아마…….”
“아,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순간, 철수의 눈이 빛났다!
“그 생각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재우야, 나 먼저 간다. 나중에 보자.”
말이 끝나자마자 철수는 지하철 역 쪽으로 냅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재우와 헤어진 철수는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평소와 달리 KTX에 몸을 실었다. 평소 즐겨 타던 새마을호와 달리 KTX는 바깥 풍경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빨랐지만 무슨 연유인지 그는 평소보다 더 늦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에 철수는 핸드폰을 꺼내 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동네 어른 들하고 인근 마을 이장 님들 좀 모아주세요!”
재우와 헤어지고 사촌형과 만나기로 한 마을회관까지 단 2시간 반 만에 도착했지만 철수에게 그 시간은 몇 날 몇 일처럼 길게 느껴졌다. 택시에서 내려 마을회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철수네 마을 어른과 인근 마을 이장 님들까지 대략 열 두 어명이 모여있었다. 얼마나 급히 왔는지 쌀쌀한 가을 밤 날씨였지만 철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뭐 땜시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겨?” 철수를 발견하고 충청도가 고향인 인근 영촌리 이장님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철수는 사람들 앞으로 나가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모이시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고요……”
철수는 먼저 사람들 앞에서 지난 1년간 농사를 지으며 경험했던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해 설명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으로 어렵게 농사를 지어도 중간상인들의 농간 때문에 애써 키운 농산물이 제 값을 받지 못하고,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농가부채는 갈수록 커지는 악순환을 면치 못하는 게 농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게 뭐 한 두 해 일인가?”금정 면 이장님이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생각을 하나 제안할까 합니다!”라고 철수가 말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클린 카트(Clean cart)' 라는 게 있었습니다.”
“뭐? 크, 클린트? 그거 미국 대통령 아녀? 비서랑 바람 피다 걸려서 아주 동네방네 개망신 당한 코 무쟈니 큰 사람, 맞지?”영촌리 이장 님이 말했다.
“하하! 그건 클린턴이고요.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클린 카트입니다.”
철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클린 카트는 미국 도심지에서 영세한 상인들이 시의 허락을 받고 검증된 식품이나 과일 등을 관련규정하에 판매하는 일종의 노점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도시인에게 직판할 것을 제안했다.
“그럴 수만 있으면 정말 좋지! 그런데 그게 어디 말처럼 그리 쉽나?”이번에는 철수의 사촌 형이 말했다.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철수가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오늘 서울에서 봤던 '빅이슈' 잡지를 예로 들며 재활의지가 있는 노숙자의 노동력과 갈수록 먹거리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도심지에 유기농 기법으로만 생산된 과일 등을 클린 카드에 접목하여 직판하면 분명, 승산이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철수야, 그게 정말 가능한 기가?”사촌 형이 물었다.
“네,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합니다!”철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날 저녁, 마을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마을 단위로 자신들이 일년 간 유기농 기법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과일이나 쌀 등의 물량을 적어 철수에게 제출했다.
“철수야, 니 진짜로 자신 있나?”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촌 형이 물었다.
“네, 자신 있습니다!”
“내는 평생 농사만 져서 다른 건 잘 모른다. 어째 거나, 니 덕에 우리 농촌이 좀 잘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
“힘내세요, 형님! 꼭 그렇게 될 테니까요!”
9.
농한기에 접어들자 농촌은 한가로워졌다. 하지만 철수는 오히려 더 바쁜 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유기농 기법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도심에 직판하는 제도를 클린 카트라는 영어이름 대신 '희망 수레' 라는 순수한 우리 말로 변경했다. 희망 수레 안에는 노숙자의 '재활희망', 농민의 '경제희망' 그리고 도시 사람들의 먹거리에 대한 '안전희망' 모두가 담겨 있다는 뜻이었다.
철수는 제일 먼저 도청에 찾아가 유기농 농산물에 대해 정부가 인증을 해줄 수 있는지 문의했고, 관련규칙에 따라 관리감독을 받으면 가능하다는 대답을 얻었다.
도청에서 집으로 돌아온 철수는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식사하셔야죠?” 부인이 물었다.
“나 바쁘니까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당신이 밥 좀 비벼다 줘."
“알았어요.”
“고마워!”
철수는 컴퓨터를 키자마자 공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문에는 재활의지가 있는 노숙자들에게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도시에서 희망 수레를 맡아 유기농 과일이나 농산물을 판매할 사원을 모집하려고 하니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공문작성을 끝낸 철수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시청과 노숙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쉼터 같은 각종 비영리 단체에도 이메일로 공문을 보냈다.
공문 발송을 끝낸 철수는 아들 재원이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아빠!” 재원이가 안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재원아, 너 홈페이지 만들 줄 알지?”
“네. 홈페이지 필요하세요?”
“아빠가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 농촌과 여러 사람들의 희망을 위해서 필요해”
“희망이요?”재원이는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철수는 곧 아들에게 '희망 수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우리사회가 특정지역만 또는 특정인만 잘 사는 불균형한 사회가 되면 안 된다며 '희망 수레'의 뜻과 목표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아들, 멋지게 홈페이지 만들어 줘야 해?”
“네, 아빠! 그렇게 좋은 일이라니 저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볼게요!”
“그래, 고맙다. 우리 아들 최고다!”철수는 재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1년 새 부쩍 커버린 키만큼이나 재원이의 생각도 성장한 것 같아 철수는 무척 흐뭇했다.
얼마 후 철수는 사람들과 협의 끝에 '희망 수레'에 대한 상표권 등록과 일종의 협동조합 같은 주식회사 설립도 추진했다. 아울러, 농산물 수확량과 각 마을에서 동원 가능한 노동력에 따른 차후 수익배분 등의 약관도 마련했다. 희망 수레에 참가의사를 밝힌 마을 대다수 주민들은 40대 이후의 고령이었지만 그들 얼굴에는 옛 농촌의 활기찬 모습이 부활되기를 기대하는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철수가 마을회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부인이 힘없이 그를 맞았다.
“이제 오세요.”
“아니, 당신 얼굴 표정이랑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철수가 말했다.
“아픈 게 아니고요……”그녀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럼, 왜 그러는데?”
“오늘 당신이 공문을 보냈던 시청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정말? 뭐래? 도와주겠데?”철수는 어린 아이처럼 들 뜬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희망 수레'의 취지는 좋으나 기존 노점상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현 법제도 하에서는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쉼터 같은 비영리 단체에서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며 벌써부터 참가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렇군……”아내의 설명을 들은 철수의 어깨가 힘없이 주저 앉았다.
“이제 어떡해요? 사람들 실망이 클 텐데……”아내가 말했다.
생각했던 일이 틀어지자 철수의 희망이 절망의 그림자로 바뀌었다. 철수는 답답한 마음을 정리하려 마당으로 나왔다. 쌀쌀해진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별이 가득한 밤 하늘에 농촌의 부활을 꿈꾸는 마을 사람들의 희망찬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후~~' 철수는 긴 한숨을 내 쉬었다.
10.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여자 아나운서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기대했던 시청에서 도와주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절망하던 차에 제 아내가 갑자기 아파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파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먹거리에 대한 안전은 주부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니 차라리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를 통해 희망 수레를 시작해 보자는 거에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아내의 아이디어가 주효했습니다!”
철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쉼터를 비롯한 비영리 단체에서 노동력을 확보한 그들은 과일을 주력상품으로 한 안전한 유기농 농산물 재배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철수와 아내는 홈페이지를 통해 서울 및 대도시 인근 아파트 부녀회에 희망 수레에 대한 취지와 유기농 농산물에 대한 홍보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부관계자가 매월 농촌에 나와 유기농 재배를 관리하는 모습을 캠코더에 담아 정기적으로 홈페이지에 올려 도시 사람들이 이를 확인할 수 있게 했고 아울러, 도시 사람들이 언제든 농촌을 방문해서 자신들이 먹게 될 농산물에 대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고 한다. 가격은 비록, 일반 농산물에 비해 비쌌지만 각종 외국산 불안전 먹거리가 판치는 세상에 믿고 먹을 수 있는 신토불이 유기농 농산물은 주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첫 해 50개 밖에 되지 않던 '희망 수레'는 현재 전국에 100개가 넘고 이와 관련된 일자리도 5백 개 이상 창출되었다고 했다.
철수의 설명이 끝나자 남자 아나운서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 아나운서도 그리고 객석의 방청객들도 따라 일어나 박수를 쳤다. 철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회자에게 그리고 방청객들에게 차례로 머리 숙여 인사했다. 스튜디오 조명에 비친 그의 눈에는 그간 흘린 고생과 노력 때문인지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그 동안 저희 '상쾌한 아침' 시간에 여러 초대손님들을 모셔봤지만 저는 오늘처럼 가슴 뿌듯하고 감동적이었던 시간은 없었습니다!”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김철수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아쉽게도 벌써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라고 여자 아나운서가 말하자 방청석에서도 ‘아~’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 김철수씨. 끝으로 시청자 여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남자 사회자가 말하자 철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농촌과 도시 모두 균형 있게 발전하며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건강한 농촌과 자연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꼭 깨달았으면 합니다. 아직도 우리 농촌이 부흥하려면 멀었습니다. 하지만, 전 꼭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우리가 함께 노력과 관심이란 물을 주면 그 희망은 반드시 아름다운 현실로 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철수의 말이 끝나자 '상쾌한 아침'의 끝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고, 사회자와 방청객들은 다시 한번 더 철수를 향해 진심이 듬뿍 담긴 박수를 보냈다.
-끝-
▶수상소감
신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미국 이민생활. 하지만, 그 동경은 어느새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해 있었다. 낯선 타향살이는 분명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위기로 다가온다. 나 또한 그랬다. 매일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과 다른 나라에서 느끼는 이질감.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다.
하루의 일상을 정리하는 일기로 시작한 나의 글쓰기 작업은 벌써 3년째가 지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따분한 저녁 시간을 빈둥거리는 것보다 나의 지난날과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하자는 목적으로 시작한 일기는 어느새 무료한 이민생활에 유익한 벗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응모한 미주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수상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기쁨이자 감동이었다. 부족한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에게 감사하고 이런 좋은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시는 미주중앙일보사에도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자만하지 않고 더 열심히 쓰고 노력해 훗날 '미주중앙신인문학상'을 빛낼 수 있는 기성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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