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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가작] 눈물점

정병규

오늘 낮에 퇴근하고 집에 와달라는 민정이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타주로 출장을 갔으며 집이 무서워 혼자 잘 수가 없다고 했다. 지난번에 그녀의 집을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집이 상당히 컸고 정원도 넓었다. 여자 혼자 자기에는 좀 무섭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친척도 아니고 남자인데 왜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지 의아심도 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평소에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기 때문에 믿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흔쾌히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고 맛있는 것들도 많았다.

“이 굴 좀 들어봐 선배. 싱싱하고 맛있어.”

굴은 정력에도 좋은 식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나는 바다 비린내가 싫고 특히 허물거리는 모양이 징그러워 평소에 먹지 않는 음식이다. 그녀가 입에 넣어 주기에 어쩔 수 없이 먹어주었다.

“마시다 남은 소주 같은 것 없니?”

비린내가 났었고 아무래도 술이 한잔 들어가야 개운하고 분위기도 좋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복분자 술을 꺼내왔다.

“이 술은 달콤하고 몸에도 좋대.”

이것도 요강을 깬다는 정력에 좋은 술이다. 오늘은 쓸데없이 좋은 것을 먹는 날이다. 집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아내를 안을 수도 없다. 아무튼, 술도 같이 나누어 마시며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거실은 넓고 아늑했으며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푸른 잔디와 크고 작은 정원수들이 밤 조명에 비쳐 한 폭의 풍경화도 같았다. 오늘 이 자리가 그렇게 편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와 둘이서만 밤을 보내려니 기분이 좀 묘해졌다. 민정이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해서 여자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게다가 오늘은 얇고 가슴이 훤하게 드러난 원피스를 입고 있어 눈길이 자주 갔었고 설거지하는 뒷모습이 불빛에 반사되어 몸매도 그대로 보여 지고 있었다. 야릇한 충동을 느껴 잠시 당황했지만 그저 하룻밤 후배 집을 돌봐주는 단순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잘 시간이 되어왔다. 집이 컸기 때문에 손님용 방도 따로 있었다.

“선배, 이 방에서 자. 그 안에 목욕탕도 있어 샤워도 하고”

민정이는 나와 둘이 있을 때는 아예 말을 놓는다.

“그래, 문단속 잘했지? 거실에 불은 켜두는 것이 좋아.”

내가 마치 이 집 주인이라도 되는 듯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공연한 오해를 할까봐 사무실에서 야근을 한다고 했으며 종종 있어왔던 일이라 믿어주었다. 나는 낯선 잠자리에 적응을 못 해 침대에서 뒤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민정이가 베개를 들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여기서 잘래.”

그녀는 나의 동의도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어린 딸이 밤에 깨어나 아빠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는 20년 넘게 차이가 나는 대학교 선후배 관계이고 나이로 따지면 딸과 아빠와 같은 사이이다.

“민정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녀는 대답도 없이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아직 젊은 나이 이지만 나는 몇 해 있으면 환갑을 맞는 나이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 사이지만 이런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있었어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손이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밀어내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부딪치는 그녀의 젊고 부드러운 몸이 나의 판단을 가로막고 있었다. 평소에 주장하던 도덕, 윤리 따위의 생각들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마치 맹인이 사랑을 나누듯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촉감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입술이 닿아졌고 두 몸 사이에는 한 치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느낌으로 그녀를 받아들였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LA한인타운에서 광고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미대동문회 총무 직을 맡고 있다. 친한 친구나 친척들이 별로 없는 이곳 생활에서는 학교 동문회 모임으로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젊었을 때는 자식들 키우느라 바빠서 동문회 나갈 생각을 안 했지만 아이들이 커서 대학을 가버린 뒤에는 동문회 일로 작은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동문회 주소가 내 사무실로 되어 있었기에 동문의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미대 동문회죠?”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동문회는 오십이 넘은 내 나이도 어린 편에 속한다. 대부분 환갑을 넘은 선배들이라 마치 노인회 모임 같아서 조금씩 싫증이 나고 있었다.

“저는 98학번, 미술전공이고 3년 전에 미국에 왔어요.”

딱 부러지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입학연도를 봐서는 나이가 30대 중반 정도인 것 같았다.

“반가워 후배, 사무실에 한번 들려. 다음달에 동문전시회도 있으니까 참가하면 좋겠네.”

나보다 한참이나 후배였기에 말을 놓았다.

“선배님은 몇 학번이세요?”

따지는 말투였지만 애교가 섞인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후배님, 너무 반가워서 그만 하하”

그녀의 이름은 민정이었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기고 끊었다.


동문회는 두 번의 공식적인 행사가 있다. 여름에는 전시회를 열고 년 말에는 송년파티를 갖는다. 물론 개인전을 하거나 경조사가 있을 때는 수시로 모임을 가지고는 있다.

오늘은 전시회 준비로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나는 민정이를 불러내었다. 그녀가 들어왔을 때 칙칙했던 사무실이 갑자기 밝아져 왔다. 첫눈에 민정이는 무척 예뻤으며 몸매도 날씬했다. 동문은 일시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인사를 시키고 내 옆자리에 앉혔다. 여자 동문들이 젊은 후배인 그녀를 보고 부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야, 우리도 저렇게 예쁠 때가 있었어.”

아무리 포토샵에서 주름을 없애고 손을 보아도 그림이 안 되는 여자 선배가 말을 했다.

“글쎄, 호박에 줄긋는다고 다 수박이 되남.”

“둘 다 오래되면 먹을 수도 없는데 뭘 따져 따지기는.”

“나는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데.”

남자 선배들의 짓궂은 농담들이 오갔다. 오랜만에 젊은 후배가 옆에 앉아있으니 나도 젊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전시회를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았다. 카탈로그 제작은 내가 맡았고 다른 일들은 서로 분담을 했다. 회의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을 때도 민정이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내가 친근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이고 나이 많은 선배 앞에서 할 얘기도 없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 작품 꼭 내도록 하고, 작품제작은 내 사무실에 와서 해. 언제든지 환영해.”

“그래도 돼? 선배.”

그녀가 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싫지가 않았고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 예쁜 여자는 무슨 짓을 하여도 용서가 잘된다. 만약에 못생긴 여자 후배였으면 내 성격에 분명히 꿀밤이 날아갔을 것이다.


민정이는 직장을 갖고 있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사무실에 나와 작품을 하면서 동문회 일도 도와주었고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아예 말을 놓은 상태이다.

“민정인 아버님한테 말을 놓는구나.”

“말을 놓아서 이상해 선배? 나는 아빠 같아 좋은데 호호.”

나는 아버지한테는 꼭 존댓말을 했었고 내 자식들은 한국말로 물어도 영어로 대답하니 이곳에서는 존댓말의 의미는 없다.

“아버님은 한국에 계시니?”

“응, 아빠가 이혼하고 딴 여자와 살고 있어.”

민정이는 굳이 말을 안 해도 되는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으며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고 계셨기에 어머니는 충분한 위자료를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미남이셨기에 항상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혼하고난 후에도 민정이는 아버지 집을 들락거리며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아버지의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민망스럽고 아버지가 미워져 발길이 뜸해졌었고 민정이 결혼식 날, 손을 잡고 들어가 준 것이 마지막 만남이라고 했다.

“민정이는 아빠를 닮아서 예쁘구나.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여기 아빠가 있잖아. 호호.”

나를 아빠로 생각해주니 고맙기도 했지만 남자로는 보아 주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녀는 그동안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 심심했었는데 내가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가끔 포옹을 해주었는데 딸의 느낌이 보다도 여자의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민정이는 자기 집으로 동문을 초대해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집도 훌륭했고 정원도 넓었다. 정원에서 고기도 굽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많은 음식을 차렸고 일하는 도우미 아줌마까지 있었다.

나는 술 한 잔을 들고 정원의 작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민정이는 예쁜 외모에다 돈 잘 버는 남편도 있고 아이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도 전부 다는 주시지 않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돈을 주시지 않는 것처럼.

“선배, 왜 여기 혼자 있어?”

민정이가 옆에 와 앉으며 말했다. 초록색의 잔디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남편은 토요일인데도 일하러 갔나 봐?”

“아니 골프 치러 나갔어.”

우리처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밖에 나가 운동을 하는 것보다 집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민정인 왜 아기가 없어. 결혼 한지 4년이 지났다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공연한 것을 물어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민정이가 나에게 되물었다.

“선배는 애들이 어떻게 돼?”

“원 스트라이크 원볼, 둘 다 대학생이야 지금.”

“어머, 학비가 엄청나게 든다던데. 그 작은 사무실에서 학비가 나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고 있어.”

“어머나, 선배를 닮아 머리가 좋은 가봐. 축하해.”

그녀는 나의 팔을 툭 치며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돈도 못 벌고 다른 재주도 없어 자랑할 거라고는 공부 잘하는 두 자식밖에 없다.

동문전시회가 끝났으니 이제 연말파티 이외에는 공식적인 일은 없었다.



어느 날, 민정이가 식당을 예약해놓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웬일이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방이 단독으로 되어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오늘 우리 딸 생일이야.”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분명 아이가 없다고 했었는데.

“하늘나라에 있어.”

민정이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2년 전에 기다리던 아기를 낳았는데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다운 증후군’이라는 희귀한 질병을 갖고 태어났어. 현대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했고 아기는 집에도 와보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가버렸어.”

너무도 가슴이 아파 따라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고 했다. 만약 지금 그 아기가 있었으면 동문회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고 보람되었던 일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었다.

지금은 컸다고 아빠 말을 잘 안 듣지만, 어릴 때 아빠를 기다리고 찾으며 품에 안기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남들은 주렁주렁 쉽게도 낳아 기르는데 왜 민정이한테 그런 일이 생겼는지 하느님이 야속했다.



아기의 질병에는 부모의 유전적인 것이 원인이 있다고 했다. 의사는 확률적으로 몇 천분의 일이기 때문에 다음번의 아기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아직은 두려워 아기를 갖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남편하고 같이 해야지.”

“남편도 오늘을 기억하고 있어. 그렇지만, 서로 말을 꺼내지 못해.”

남편의 가족 중에 비슷한 사례가 있어 자기 탓으로 여기고 있는데 아기 이야기는 꺼낼 수가 없다고 했다. 유전자의 좋고 나쁜 것을 미리 가려낼 수도 없는 일이고 본인의 잘못도 아니기 때문에 남편이 무척 안쓰럽다고 했다.

“의사 말대로 아기를 가져. 민정이 닮은 예쁘고 건강한 아기가 나올 거야.”

“그러기를 바라고는 있는데 아직은 무서워.”

“내가 도와줄게. 민정아 힘내.”

“도와줘 제발. 호호.”

내가 말실수 한 것 같았는데 그녀는 웃음을 띠며 농담으로 받아주었다. 이렇게 말을 쏟아내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하다고 했다. 이런 개인적인 일까지 상세하게 말해주니 고맙기도 했지만 내가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에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살짝 안아주었는데 그녀는 한동안 팔을 풀지 않았다.



LA에도 연말이 다가왔다. 한국처럼 춥고 눈도 오지 않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면 조금씩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동문회도 연말파티 행사준비로 모임을 가졌다. 연말이라 바빠서 그런지 모임이 끝난 후 회식도 없이 모두 가버렸다. 민정이는 할 말이 있다며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선배, 나는 파티에 참석 못해. 남편하고 여행 스케줄이 있어.”

섭섭한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문회보다 가족여행이 우선이다. 나는 달리 갈 곳도 없어 매년 참석하고 있었다.

“괜찮아 참석 안 해도. 우리 둘이라도 밥 먹을래?”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남편하고는 어떻게 만났어?”

그녀는 밥을 먹으면서 또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학교 다닐 때 남자 친구들은 많았지만 나이도 같았고 하는 짓들이 어려보였어. 그들과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았고 소꿉장난처럼 어렵게 살며 살림을 이루어 나가는 것도 싫었어.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기반이 잡힌 남자를 원했어. 아빠처럼 사업을 하는.”

그래서 아버지가 거래회사의 젊고 유능한 사장을 소개해주셨고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라고 했다. 착하고 성실했으며 아버지만큼 잘생기지 않아서 여자문제는 없겠다 싶어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회사가 잘되어 미국에 지사를 설립했고 지금은 오히려 본사가 되어 3년 전에 미국에 같이 왔다고 했다.

“뭐 하는 회사인데?”

“나는 전혀 몰라. 돈 찍어내는 회사는 아닌데 돈은 많아. 선배 돈 필요해? 내가 좀 줄까?”

“굶어 죽어도 후배 돈은 안 받아.”

우리는 뼈대 있는 선비집안이므로 절대로 욕심을 부리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 된다. 학교 선생님으로 은퇴하신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다. 그래서 대대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지만. 민정은 내 말에 움칠하며

“선배, 연말인데 우리 노래방 가자.”

연말파티에 못 온다는데 둘이서 조촐한 망년회를 갖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래방도 연말 분위기답게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나는 미국 온 지 오래되어 요즈음의 한국 노래는 모른다. 내가 아는 옛날 노래는 민정이가 모를 것이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우리 춤추자 선배.”

뜻밖에도 민정이는 블루스 곡을 틀었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 스텝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눈동냥으로 추는 것인데 그녀는 아주 잘 추고 있었다.

“언제 배웠어 잘 추네.”

“아빠가 가르쳐 주었지.”

그런데 춤보다 느껴지는 무엇이 있었다. 안겨진 그녀의 몸이 남자의 본능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정상일지는 모르지만 민정이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를 아빠처럼 믿고 따르는데 여차하면 입이라도 맞출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냉정을 찾으려 해도 젊은 여자의 향기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몸의 간격을 띄우면서 추었다. 이윽고 음악이 끝났고 나는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켰다.

민정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다른 블루스 곡을 찾고 있었다.

“민정아, 힘들어 좀 쉬자.”

“그래, 안마해줄까?”

나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민정이가 정말 나를 남자로 안보고 아빠로 착각하는 것일까? 다시 몸이 짜릿해짐이 느껴졌다. 딸의 성의를 무시하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남자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정아. 그만 됐어, 우리 노래 부르자.”

나는 80년대 유행했던 ‘광화문 연가’를 눌렀다.

“어머, 우리 아빠 18번이야 선배, 나도 알아. 같이 불러.”

민정이는 흥겹게 탬버린 장단을 맞추면서 같이 불러 주었고 나는 남자가 아닌 아빠의 위치를 지키면서 조촐한 망년회를 보냈다.



새해를 맞았다. 세월은 쉬지도 않고 어김없이 찾아온다. 또 한 살 먹어가고 있다. 가는 세월 아까워하면서도 오늘 하루를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낼 거리가 없다. 디자인일 이외에는 다른 재주도 없고 경제적인 여유도 없어 멀리 여행갈 생각도 못한다. 그저 안 아프고 사고 없이 지내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뿐이다. 연휴가 끝나고 또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덧 삼월이 되었다. 나무 가지에는 겨우내 매달려 있던 갈색의 늙은 잎 사이로 파란 새잎들이 머리를 내밀었고 눈길도 안 주었던 길거리의 작은 풀에서도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도 봄이 오면 새 피부가 나오고 검은 머리카락이 다시 생겼으면 좋으련만. 마음에는 나이가 들지 않는 것 같은데 외모에는 변화가 확연하게 나타났다. 그동안 동문회 모임도 없었기에 민정이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낮, 민정이한테 전화가 걸려 와서 그녀의 집으로 갔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가 먼저 원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내 잘못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혼자 허전하고 무서워 단순히 아빠 옆에서 자고 싶었는데 오히려 내가 감정에 못 이겨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까? 공연히 굴과 복분자까지 원망스러웠다.

아침에 그녀의 얼굴을 똑 바로 볼 수가 없어 간다는 말도 못하고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 일은 우리 둘만이 아는 사실이고 무덤까지 갖고 가야할 비밀이다. 그러나 그 황홀했던 기억은 영원히 잊지는 못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내가 먼저 전화하기가 쑥스럽고 민망했다.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분명하지만 남편이 출장 갔다는 연락이 다시 한 번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도 있었다.

전시회 관계로 동문회 모임이 있었다. 나는 민정이 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몸이 아파 못 나온다고 둘러대었다. 공연히 걱정도 되었고 궁금했지만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믿었다. 동문 전시회가 열리는 날, 민정이 동네에 사는 여자 후배에게 넌지시 그녀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선배님, 몰랐어요? 민정이 아기를 가졌어요.”

“정말이야.”

이 기쁜 소식을 나한테 알리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나와의 일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 앞으로 동문회는 못 나올걸요. 아기 낳고 기르려면.”

축하의 전화를 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비밀스런 일도 서너 달이 지났으니 마음도 가라앉았을 터이다. 나이 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민정아, 축하해. 아기를 가졌다면서.”

“응 선배, 미안해 연락을 못 해서.”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다행이었다.

“몸조심하고 예쁘고 건강한 아기 낳기를 바래.”

“고마워 선배. 한번 만나고 싶은데 배 나온 모습 보이기 싫어.”

아기를 가지면 얼굴도 붓고 몸매도 망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기 낳으면 꼭 연락해."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 공연한 걱정을 했었고 기쁜 소식도 들어서 한결 그녀에 대한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편으로는 그날 일이 생각나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나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또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새로운 동문도 들어왔었고 병환으로 돌아가신 동문도 있었다. 오늘 동문회 연말 파티 날이다. 많은 동문이 부부 동반해서 왔었고 나는 총무라서 행사준비에 바빴다. 뷔페 음식을 들면서 파티는 시작되었고 블루스 춤곡이 나오자 부부들이 우르르 나와 춤을 추었다. 나는 아내가 같이 나오는 것을 싫어해서 늘 혼자 참석하고 있다.

“선배님, 저랑 같이 춰요.”

민정이와 같은 동네에 사는 후배가 나의 팔을 잡았다. 이 후배도 혼자 왔기에 스스럼없이 따라나갔다. 작년에 민정이와 노래방에서 춤을 추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을 잡고 몸을 맞대며 춤을 추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자석이 서로 당기는 쪽이 있고 밀어 내는 쪽이 있듯이 남녀관계도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즐거운 마음으로 춤을 추고 내려왔다.

“참, 선배님, 민정이가 어제 아기를 낳았대요.”

“정말이야, 보이야 걸이야?”

“보이래요.”

“순산했데?”

“산모, 아기 모두 건강하대요.”

이런 경사스런 일이, 마치 내 딸이 아기를 낳은 듯 기뻤다. 그녀의 예쁜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도 내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다. 그녀의 아버지도 되었다가 연인이 되었다 하니 말이다. 나는 혼자 축하의 잔을 들었다.


일 년이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오늘은 민정이 아이 첫 돌이다. 호텔 연회실에서 돌잔치가 열린다. 작년 그날 이후로 민정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아기 낳아 잘 키우고 있다는 전화는 한번 받았지만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서로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거울 보는 것이 싫어진다. 그동안 흰 머리카락이 더 생겼고 주름살도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마치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이 민망스럽다. 나는 형제 중에서 아버지와 제일 닮았고 더군다나 오른쪽 눈 밑에 똑같은 눈물점을 가지고 있다.

그 점 자체는 유전인자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체질을 물러 받아서 그렇다고 했다. 가족 중에 누나도 점이 있었는데 결혼할 때 빼버렸다. 눈물점은 관상학적으로 재물이나 이성관계로 눈물 흘릴 일이 많아 좋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별 사고 없이 장수하고 계시지만 물려 줄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지금이라도 점을 빼면 돈이 들어올까라는 헛된 생각을 해보며 웃고 말았다. 다행히 내 아들은 아내의 체질을 더 닮았는지 눈 밑에 점이 없다.

미용실에 들러 안 하던 염색을 하고 머리도 단정히 손질했다. 내가 봐도 몇 년은 젊게 보였다. 시간이 되어 동문과 함께 호텔로 갔다. 홀 안쪽에 돌상이 차려져 있었고 남편같이 보이는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예쁘게 한복을 입은 민정이가 나를 보고 반가운 손짓을 보냈다.

“반가워 민정아.”

너무 오랜만이라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포옹을 했다.

“선배님, 우리 남편이에요.”

민정이는 말을 높이며 남편을 소개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빠 같은 선배님이라 그랬는데 무척 젊게 보이시네요.”

남편 인상은 서글서글했고 웃음이 가득했다. 아이는 자기 생일날인지도 모른 채 아빠 품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한번 안아보고 싶다. 민정아.”

“조금 있다 깨면 안아주세요.”

사람들이 있어선지 민정이는 계속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왠지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동문회 표지판이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잠시 후, 맛있는 음식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며 양주도 원하는 대로 마실 수가 있었다.

민정이 부부가 아이의 돌잔치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날의 황홀했던 기억이 잠시 머리를 스쳐갔다. 이제는 그날의 일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민정이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기도해주는 것이 선배 된 도리일 것이다. 앞으로 만날 일도 드물 것이고 동문회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것이다.


돌잡이 순서가 시작되었다. 큰 쟁반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모두 아이의 손짓에 눈이 쏠렸다. 아이는 서슴지 않고 크레온을 잡았다. 우리 테이블에서 제일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엄마가 미대 나왔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돈을 잡아 주기를 바랐다.

“사내는 돈을 잡아야 나중에 잘살지, 크레온 잡으면 별 볼일 없어요. 여기 증인들이 있잖아요. 안 그래요?”

술김에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선배님들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냥 재미있다고 치는 박수지, 그게 무슨 뜻이 있다고 그래, 벌써 취했니? 총무."

그중 제일 못사는 선배가 나를 째려보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그 증인이라 서요. 하하”

내 말에 서로 본인들은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넘어갔다.

돌잔치가 끝나가고 있었다. 민정이는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환한 표정이었다. 동문도 일어나면서 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한번 안아 보고 싶어서 민정이 부부가 있는 쪽으로 갔다. 민정이는 나를 보더니 아이를 안겨주었고 아이는 낯도 안 가리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 무척 예쁘게 생겼고 마치 친손자를 안은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예뻐, 작품이야. 민정아.”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잡고 아이의 볼에다 입을 맞추었다. 눈 밑에 무엇이 묻은 것 같아 손으로 닦아 주었는데 점이었다. 순간 내 몸은 얼어붙었고 하마터면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것은 분명히 눈물점이었다.

▶수상소감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오면서 목이 말랐습니다. 태어나 처음 어머니한테 말을 배우며 세상을 알게 해준 모국어로 입상된 기쁨이 단비가 되어 적셔주었습니다. 저는 미술을 전공했고 지금도 광고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과 글은 표현방법이 다를 뿐,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같았습니다. 소설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어 글 쓰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첫 소설이고 미흡한 점이 많은데도 뽑아주신 심사위원과 중앙일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참신한 작품 많았지만 '반소설-반수기적' 한계 못벗어

2014년 신인문학상은 기존의 작품 수준을 뛰어 넘은 새로운 작풍, 새로운 비전과 패기, 독특한 목소리, 신선한 열기로 만남의 문을 연다. 올해 응모작 중에는 축적된 작가적 에너지가 가속으로 배양된 의욕적이고 참신한 작품들이 많아 선자의 마음을 후끈 달게 했지만 아직도 반소설-반수기적 한계에 머문 작품들이 허다하다. 제대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끌어 오거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라는 1인칭 하나가 온통 무대를 헤집고 소설의 고삐를 잡고 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50 여편의 응모작 중에서 다음 작품들을 일차적으로 가려내 선상에 올린다.

최연홍의 ‘빙하’, 박이향의 ‘사막의 연가’, 정병규의 ‘눈물점’, 민유자의 ‘거벽’, 이기주의 ‘샌 포인트의 겨울 나그네’, 최지만의 ‘산으로 간 기러기’, 임지나의 ‘텀불위드’, 정혜연의 ‘들어줄게요’를 가려냈다.

하지만 이들 작품 중에는 눈에 번쩍 뜨일 만한 당선작이 보이지 않아 가작 섭렵에 나선다

정혜연의 ‘들어줄게요’ 는 일상의 타성과 권태, 타공간 속에 벽을 쌓고 가는 인간적 이슈를 이동적 피소설체로 써내려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 한다. 300여매의 중편소설로 취지에 맞지않았고 박이향의 ‘사막의 연가’ 역시 단편이 아닌 300매 분량의 묵직한 중편으로 상황 설명에만 그친 감이 있어 도중 하차시켰다. 최연홍의 ‘빙하’는 한편의 서사시적 세련미와 유장한 문체가 돋보이나 굴곡과 반전이 없이 무수한 이야기의 전개로 단편이 갖는 소설적 집약과 사건의 플롯이 미흡했다.

임지나의 ‘텀불 위트’는 낙선시키기에 아까운 작품이었다. 구타했다는 아들의 고발로 구치소에 들어간 아버지와 페인트공으로 전락하는 뼈저린 삶의 리얼한 참경등이소설보다는 논픽션에 어울릴 듯 한 작품이다.

암벽을 타는 두 알피니스트의 기구한 이야기를 담은 민유자의 '거벽'은 암벽에서 추락한 악몽과 병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트, 춤, 스쿠어다이빙, 여인과의 로맨스 등으로 치달리다 종내는 다시 암벽에 도전하는 인간 승리의 거벽 같은 의지가 감동을 불러 일으키나 이 역시 논픽션에 가까운 작품이다.

정병규의 ‘눈물점’은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를 연상케 하는 따뜻하고 애련한 델리켓한 작품이다. 선배와의 하룻밤 정사로 임신하고 득남. 첫돌 잔치에 초대된 노선배. 유전자로 해서 아이의 생산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던 남편. 소설적 허구와 동인, 갈등, 위기 등 서스펜스의 부족 등이 걸리지만 그런 대로 설정이 무난하고 진행이 순조로운 점을 높이 사서 가작에 천거한다.

최지만의 ‘산으로 간 기러기’ 는 새마을 운동의 성공사례 같은 스토리로 기러기 가족으로 미국과 한국 사이를 오가며 사는 부부가 남편이 암이 걸렸다는 거짓 전화로 아내를 귀국케 한 후 부부가 화합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농, 귀촌, 귀소 본능의 부활, 신토불이의 무공해 농작물을 도시의 아파트 촌에 직매하는 농촌 지도자의 애환을 수더분한 필체로 재미있고 무리없이 꾸려간 수법이 돋보여 가작에 선정한다.

이기주의 ‘샌 포인트의 겨울 나그네’ 는 단편소설로의 골격이 잡힌 구조이나 ‘에덴의 동쪽’ 같은 10대 소년들의 이유없는 반항, 마약과 섹스. 전위미술에 빠진 소년들과 가정을 이색적으로 표출한 미국소설 같은 인상. 문제아인 한국소년의 부모간의 의사 소통, 갈등, 위기의 조성없이 밋밋한 걸과 서술에만 머물러 가작 문턱에서 내려놓고 이 작가의 후일을 주목한다.

<심사위원 홍승주 (소설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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