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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9] 법통성② 임정 비행학교 / 비행대 관계자 100% 해외한인

대한인국민회·신한민보·흥사단
이들 3개 기관과 청년혈성단은
임시정부 비행학교 / 비행대가
태어나고 자라는 토양이 됐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창설과 발전에 직접 기여한 것으로 확인된 50명에 대한 분석 도표(전회 게재)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보여준다.

우선, 이들 가운데 4명이 미군 출신이고 1명이 영국군 출신이다. 도표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조종사가 돼 독립전쟁에 가려고 했던 애국청년들의 역할모형(role model)이 됐던 이응호 역시 미군이었다.

이들은 군사적 경험을 쌓아 독립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미군이나 영국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거나 또는 임시정부가 비행학교/비행대를 창설하기 전에 미군 비행학교에 들어가 비행을 배운 인물들이다.



이들 가운데 박낙선, 최자남는 미 육군비행학교, 노정민은 미 해군비행학교, 이도선은 미 육군, 정리용은 영국군 출신이다.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외국 군복도 마다하지 않았던 애국청년들의 헌신과 희생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이다.

또, 이들 가운데 안창호, 김종림, 신광희 등 최소 90%가 대한인국민회 소속이었다.

대한인국민회는 일제강점기에 안창호가 주도한 애국단체로, 자체 조직과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활용해 독립운동을 이끌면서, 최소 90%라는 비율이 상징하듯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탄생 및 발전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인단체였다.

대한인국민회는 조선정부가 없어진 후 미국에서 한국인의 보호와 관련해 사실상 일정 부분에서는 정부 역할을 하기도 했다.

청년혈성단이 출범하면서 "대한인국민회의 지도 아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해 충성한다."고 표명했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비행학교/비행대가 창설될 때 윤병구 중앙총회장이 비행학교/비행대를 임시정부가 아니라 대한인국민회 사업으로 하자고 노백린 군무총장에게 제안했던 것도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다섯째, 이들 가운데 최소 38%가 흥사단원이었다.

흥사단은 191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의 주도로 김종림(함경도), 조병옥(충청도) 등 8도 대표를 포함한 25명의 창립위원에 의해 탄생한 애국계몽 및 독립운동 단체다.

임시정부 수립 후 상해에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조직했다. 서울에는 수양동맹회, 평양에는 동우구락부를 결성해 국내에서 합법적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두 국내 단체는 수양동우회로 통합된 후 동우회로 개칭했다가 '동우회사건'(1937)으로 안창호를 비롯한 200여 명의 회원이 검거, 투옥된 가운데 강제 해산됐다. 1948년 본부를 국내로 이전했으며 현재까지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임시정부 각료 안창호, 비행가양성사 총재 김종림, 비행학교 감독 곽림대, 임시정부 비행장교 1호 이용근, 대한인비행가구락부 초대회장 한장호 등 최소 19명이 흥사단원이었다. 이와 관련, '새'와 '비행기'를 합친 모습을 심볼로 사용하던 흥사단이 비행학교/비행대의 버팀목이었다는 사실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대한인국민회, 신한민보, 흥사단이 모두 안창호의 비전 위에서 만들어지고 발전했으며, 이들 3개 기관은 청년혈성단과 더불어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태어나고 자라는 토양이 됐다. 민족의 지도자였던 도산 안창호의 리더십이 독립전쟁과 관련해서도 다시 한 번 돋보이는 대목이다.

여섯째, 이들은 100%가 해외동포였으며, 러시아와 중국을 무대로 활동했던 이동휘 국무총리를 제외한 나머지 98%가 재미동포였다.

이 장면은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제의 조선침탈이 가져온 한민족의 대이동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할 뿐 아니라, 이렇게 한반도를 벗어나 아시아나 아메리카로 망명을 떠났던 한국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해 어떠한 희생과 헌신을 바쳤는지도 알게 한다.

오늘날에도 한반도 안팎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사는 한국인들이 상호 존중을 깊이 해야 하고 이를 위해 먼저 정확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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