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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60] 창군(1)…"노정민, 해방 후 공군 창설 참여"

"월남한아버지가
'국군준비대' 에서활동하면서
공군 창설에 관여했으며
'국군준비대' 라고 쓴 완장에는
공군이라고 쓰인것도 봤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이 해방 후 국군 창군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 같은 증언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오늘날 공군, 육군항공부대, 해군항공부대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정신과 역사와 법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이곳 출신이 국군 창군에 직접 기여했음을 뜻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증언의 주인공은 노정민이다.



독립전쟁을 목적으로 파일럿이 되기 위해 1919년 미 해군 비행학교에서 비행훈련을 받으며 기고문 '비행세기'를 통해 "한국이 (우선은 독립을 쟁취하고 나아가 해방 후 부국강병을 위해) 국가 차원에서 비행대를 창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미 해군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 합류했던 노정민은 1921년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날개를 접은 후에도 대한인국민회 다뉴바지방회 서기로 봉사하는 등 캘리포니아를 무대로 활동했다.

이 무렵 노정민은 조선을 찾아 고향에서 장녀와 장남을 낳았으며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농장을 경영하는 등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의 재기를 기다리며 나름대로 활로를 모색했다.

노정민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에서 오렌지농장 경영을 마지막으로 약 10년에 걸친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29세가 되던 1927년 조선으로 돌아왔다.

미 해군조종사 출신으로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노정민이 조선에 돌아오자 일제는 그를 요시찰인물로 지목돼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함에 따라 다시 찾은 조국에서 그의 생활 또한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노정민의 장남 노석풍(미국 캘리포니아주 거주) 씨는 "일제는 항상 아버지를 감시했다.

정미소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었던 큰아버지가 일본 경찰로 있던 조선인을 매수해 아버지를 체포하려 한다는 정보를 미리 얻은 덕택에 아버지가 만주로 피신하기도 했다."면서 "우리들에게 '일본어나 일본역사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 일본은 곧 망한다.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조선으로 돌아온 노정민이 일제 치하의 한반도에서 독립운동에 직접 관여했는지 여부는 아직 확인할 수 없으나, 조선에서 그의 행적이 특히 비상한 관심을 끄는 부분은 해방 직후남한에서 있었던 건군과 관련된 활동이다.

노석풍 씨는 "아버지는 광복 직후인 1945년 9월 단신으로 월남해 반도호텔에 있던 미군정청에서 통역관으로 일했다. 국군 비행사들을 모아 공군을 조직했다. 여러 사람이 우리 집에 모여 아버지와 함께 공군 창설을 의논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노정민의 차남 노삼풍(미국 캘리포니아주 거주) 씨는 "월남한 아버지가 '국군준비대'에서 활동하면서 공군 창설에 관여했다. '국군준비대'라고 쓰인 완장을 찬 아버지를 본 기억이 있으며, 이 완장 여러 개가 우리 집에 있었다. 이 완장에 공군이라고 쓰인 것도 봤다. 이 완장을 찬 사람들 여럿이 우리 집에 오곤 했다."고 말했다.

노정민의 두 아들 모두로부터 나온 "아버지가 오늘날 한국 공군 창설에 직접 기여했다."는 증언은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

수 십 년 동안 미국에서 살아온 이들은 국군 건군 과정에서 육군항공대가 먼저 창설되고 이로부터 공군이 독립한 것을 모르고 있었고, 자신들이 말하는 '공군'이 실제로는 육군항공대를 의미할 가능성이 있음에 대해서도 명쾌한 기억이나 지식이 없었다.

그러나 모두 진실한 성품의 소유자인 두 아들의 증언은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출신이 오늘날 한국 공군이나 육군항공대 어느 하나 또는 양자 모두의 출범에 직접 기여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정민은 6.25전쟁 발발 직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체포돼 죽음의 문턱으로 내몰렸다가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했다.

"전쟁이 터졌을 때 우리 가족은 청파동 셋집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체포되자 셋집 주인이 '김두봉 재판'을 들먹이며 아버지에 대해 우호적으로 증언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했고 그날 밤 전가족이 도주했다."(노삼풍의 증언) 셋집 주인이 들먹여 노정민의 목숨을 구했다는 '김두봉 재판'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김두봉에 대해 미군정 하에서 벌어졌던 재판이다.

노정민의 아들들에 따르면, 노정민은 공군 창설 후에는 군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이후 토건업에 종사하다가 1968년 세상을 떠났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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