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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7] 대일전쟁⑥…재미한인들 40~50대에도 앞다퉈 참전

이초·조종익·최진하 등은 40넘은 나이도 불구하고
냅코작전에 투입됐지만…
일본, 예상외 빠른 항복으로 전선에서 싸울기회 못가져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확대되면서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확산되자 연합국 일원으로 참전하려고 노력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과 협력하기 위한 노력을 강화했다.

미국은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실체적으로는 임시정부 및 광복군과 협력하거나 또는 임시정부와 무관하게 재미한인 특수부대를 만들어 대일전쟁에 활용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과 아이플러 소령의 지난 9월 협의에 따라, 김구 주석이 보낸 데이빗 안이 장석윤을 만나기 위해 1942년 11월 28일 캘커타에 도착했다…(중략)…김구 주석은 아이플러 소령의 특수임무에 대해 이청천 광복군 총사령관과 은밀히 협의했다…(중략)…한국인들은 연합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광복군을 원조하지 않는 이유를 납득하지 못한다…(중략)…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연합국에 원하는 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공식적 인정…(중략)…둘째, 광복군을 전투력 있는 군대로 만들기 위한 내실 있는 원조…(중략)…셋째, 가장 믿을만하고 충성스러운 한국인 첩보요원들이…(중략)…미래의 작전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까지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할 것이다…(중략)…일본은 자신의 적들 가운데 한국이 가장 비협조적이며 치명적이라고 믿으며, 이 믿음은 타당하다."(미국 전략정보국(OSS) 문서, '장석윤 상사의 보고서', 1942년 12월 26일)

7쪽으로 된 이 정보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미국과 군사협력을 적극적으로 모색했음을 보여준다.



독수리작전은 임시정부와 미국의 협력이 구체화된 실제 사례로 세부적으로는 이범석 장군이 이끄는 광복군 2지대와 OSS의 연합작전이었다. OSS는 광복군 2지대와 별도로 조종문, 스탠리 최 등 한국계 미군들도 중국전선에 파견해 독수리작전을 보강했다.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에서 독립전쟁을 준비했던 김종림, 이초, 조종익, 최진하 등은 징집연령을 훨씬 넘긴 40대 중반에서 50대 후반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일전쟁을 위해 미군에 입대했는데, 이들 가운데 이초, 조종익, 최진하는 냅코작전 요원이 됐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미국의 예상보다 일찍 막을 내리자 미국은 즉시 냅코작전도 폐기, 이들은 일선에서 싸울 기회는 갖지 못했다.

"그 동안 여러분 모두 겉으로 보기에는 미친 짓이나 다름없는 임무를 위해 끝없이 일하면서 모든 임무를 비밀에 부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중략)…전쟁이 조금만 더 계속됐더라도 우리 요원들은 우리 조직과 훈련이 얼마나 완벽했는지 세계에 과시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임무의 세부사항은 공개되지 않을지 모르나…(중략)…작전의 각 단계에서 귀관이 보여준 자발적 열정과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애국심은…(하략)…."

이 편지는 OSS 칼 아이플러 대령이 OSS 한인요원 최창수에게 보낸 것으로 당시 OSS 요원으로 대일전쟁에 나섰던 한인들의 모습과 이들에 대한 미군 당국의 평가를 엿볼 수 있다.(OSS문서, 1945년 11월 9일)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에 관계했던 주요 인물 몇몇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타계했다. 군무총장 노백린은 국무총리, 참모총장 등으로 임정을 이끌다 1926년 서거, 국무총리 이동휘는 사회주의계열 지도자로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1935년 서거, 임시정부 비행장교 1호 박희성은 1937년 서거, 모두가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한인국민회, 흥사단, 신한민보 등을 태동시켜 비행학교/비행대가 태어나고 자랄 토양을 마련했던 안창호 역시 중일전쟁 초기인 1938년 서거했다.

한국 정부는 안창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962년), 노백린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962년), 윤병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1977년), 곽림대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3년), 이동휘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1995년), 최진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1995년), 최능익에게 건국훈장 애국장(1995년), 신광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1995), 김종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2005년), 박희성에게 건국포장(2011년)을 각각 추서했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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