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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5] 대일전쟁④…조종사 조종철은 중일전쟁 터지자 중국전선으로

재미한인 조종사 조종철은 1937년 중일전쟁이 벌어지자 일본과 싸우기 위해 중국전선으로 갔는데 이 정황이 당시 신문에 기록돼 있다.(국민보, 1938년 2월 16일)

"북미 국민회의 배경으로 한인비행사 1인을 원동에 파송하였는데, 그 비행사는 조종철씨인데, 원동에 도착한 후에 신한민보사에 보낸 편지가 여좌하니, 이하는 신한민보에 기록된 것을 등재한다.(필자 주: '여좌하니'는 '왼쪽과 같으니'란 뜻으로, 당시 신문이 세로쓰기를 하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기 때문에 많이 등장하는 표현이다.)

청년 조종철군은 당년 25세요, 원적은 황해도 평산 사람이다. 일찍이 시카고에 와서 비행기공정학교 라디오전문과를 졸업하여 전쟁의 이기를 쓸 줄 아는 기술을 가진 이로, 중왜대전을 당하여 한국광복의 목적을 가지고 중국항전에 참가를 지원하여 작년 겨울에 시카고로부터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중국으로 보내주기를 청원함으로써, 샌프란시스코 중국총영사와 교섭하여 소개를 얻어주고, 아울러 선비를 공급하여, 11월 14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마닐라를 경유하여 홍콩으로 가게 하였다.

그가 떠난 후 중로에서 적의 침해가 있을 것을 피하기 위하여 그 일을 비밀에 부쳐두었고, 또 그를 위하여 염려함을 마지아니하였더니, 그가 12월 24일 홍콩에서 중앙상무부로 보낸 비행우체(필자 주: 항공우편) 특신을 받아본 즉, 그는 무사히 홍콩에 도착하였고 그리로부터 항일전으로 나간다고 하였는데, 그 편지 중 가히 기록할 이야기가 많고 또 그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을 아는 오늘에 다시 더 비밀을 지킬 필요가 없음으로써 그 편지를 절략하여 이에 기재하고 아울러 중국신문에도 게재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과 대한인국민회 지도자들이 모여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비행학교를 창설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 무렵인 1920년 2월 21일 대한인국민회 윌로우스 지방회가 선출한 임원 명단에 학무원 조종철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신한민보, 1920년 3월 12일, 윌로우스 지방회 보고)

이 둘이 동일인물인지 동명이인인지 아직 불확실하나, 만약 동일인물이라면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가 조종사로서 대일전쟁에 참전한 인물을 배출했음을 의미한다. 국민보 1938년 2월 16일자에는 조종철이 당시 25세라고 돼 있기 때문에 1920년에는 7세 소년이었다는 얘기가 되는데, 그 나이에 국민회 임원이 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동명이인이겠으나, 만약 국민보가 35세인 조종철의 나이를 25세라고 잘못 썼다면 동인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동일인물이든 아니든, 조종철의 경우는 항공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임시정부 비행대/비행학교가 탄생하는 토양을 일궜던 대한인국민회가 대일전쟁 기회가 주어지자 중국 정부와 협력하는 가운데 경비까지 대면서 한국인 조종사를 대일전쟁에 파견한 실제 사례이기도 하다.

국민보 기사에 등장하는 '중왜대전'은 중일전쟁을 의미한다. 이 전쟁은 1937년 7월 일본군이 일으킨 소위 '노구교사건'으로 시작된 중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이다. 일본은 이해 12월 그 연장선에서 국민정부의 수도 남경을 점령하면서 남경대학살을 자행했다. 중일전쟁은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으로 확산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됐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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