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인터뷰] 시민참여센터 이사장 이에스더
모성애로 한인사회 감싸는 대표적 여성 리더
전격 통합으로 퀸즈한인회 출범에 산파 역할
세 자녀 기르면서 만학으로 정신상담 박사학위
70년대 중반 간호사로 미국에 이민와서 결혼하고 아이들 셋 기르면서 만학으로 정신과 상담학으로 박사학위를 마친 이에스더(60)는 커뮤니티에 비교적 늦게 참여한 몇 안되는 한인사회 여성 리더 중의 한사람이다.
2000년대 초 플러싱한인회 이사장에 추대돼 진정한 봉사자의 모습을 보였던 그는 플러싱한인회장·뉴욕한인회 부이사장을 지냈고 지역사회에도 깊숙히 참여해 12년째 커뮤니티 보드 7(플러싱)의 멤버로 활동하는가 하면 플러싱병원 자문위원으로 있다.
또한 현재 뉴욕한인사회에서 활동이 왕성한 단체 중의 하나인 시민참여센터 이사장을 맡고 있다.
만난 사람=조종무 편집고문
1975년에 시작된 그의 미국생활 초기에는 이미 기반을 잡은 선배.친척들이 있어서 정착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퀸즈 아스토리아에 있던 불버드 병원에 직장이 마련돼 생활에 큰 불편은 없었고 퀸즈장로교회에서 신앙을 키우는 한편 교회 한글학교 교사도 지내며 가정에 충실한 본분를 지키며 살았다.
그 당시 좋은 직장을 구하지 못한 한인들은 대부분 봉제업소나 캐셔로 근무하고 있었다. 가끔씩 동창회(서울 무학여고.전남대)에 나가 선후배들을 만나는 것도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하나의 방편이 됐다.
그러나 뭔가 허전한 부분을 메꾸기 위해 페이스대학에서 랭기지 코스를 정식으로 밟은 후 인터내셔널 테올로지칼 세미나리(ITS·신학교)에서 정신과 상담학을 공부한 끝에 2001년에 박사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실로 만학이었다. 그 사이 1987년 몇몇 의사들과 함께 세운 브로드웨이 의료원의 이사장이 돼 있었다. 그가 학부에서 배운 간호학과 박사과정을 밟은 정신상담학이 밑바탕이 됐다.
의료원 운영이 호조를 보이고 있을 때 후배의 권유로 플러싱한인회 참여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재정적인 도움이 된다면 마음이 편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공석이 된 이사장에 추대되면서 본격적인 참여가 시작됐다. 다행히도 당시는 경기가 괜찮았고 플러싱 지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가장 큰 행사인 설날 축제를 준비하면서 30명에 이르는 이사들이 애정을 갖고 행사에 도움을 줬다. 팀워크로 펀드 레이징을 열심히 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일을 하는 과정에서 명예욕에 젖은 사람들간에 갈등이 표면화되는가 싶더니 회장 선거를 앞두고는 감투싸움에 중상모략으로 이어져 갔다.
이건 진정한 모습의 봉사자들이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을 접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신앙생활과 의료원 일에 한동안 전념했다.
"몇년이 흐르면서 한인회를 맡은 인사가 물의를 빚어 동포사회의 많은 분들이 염려를 하는 가운데 후임 회장 후보자를 물색하고 있었어요. 그런 중에 여러분이 저를 찾아와 부탁을 하는데 고민이 많았습니다.
경선에서 떨어지면 망신이 될거고 한인사회 여건을 볼때 누군가 바로 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까 그래서 제가 과감하게 도전을 한거죠. 일종의 정의감 때문에 겁없이." 경선을 통해 플러싱한인회장이 된 그는 그곳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동포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이를 실행에 옮기려 노력했다.
젊은 전문인들을 영입해 박재진.최영수.피터전 등 변호사 그룹과 시의원에 출마했던 케빈 김·론 김(김태석·현 주하원의원)·선우용팔·윤성민(소셜워커협회 회장)·주영민(노던 골프)·최기영(태권도 사범) 등과 함께 호흡을 맞추던 때였다.
지역한인회에는 각종 민원들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이민문제와 상법에 관련된 문제 어떤 이들은 렌트를 못내 쫓겨나는 경우도 있었고 때로는 관계당국을 찾아가 싸워야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한국과 관련된 이슈로 독도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이 불거져 결의안을 채택할 때 워싱턴DC에 원정 간 적도 있었다. 이때 전문인들의 도움이 컸다.
"여성으로서 커뮤니티 활동을 하는데 다소간의 제약은 있었지만 관대하게 평가해 주는 면이 있었고 본인은 자식을 기르는 마음으로 한인사회에 참여하니까 모성애적인게 있어서 동포사회의 한분 한분이 소중하고 식구처럼 느껴져서 한가지라도 열심히 해드리자는 마음이 생기더라구요. 술 같은거 못하고 일만 쫓아다니는 편이었는데 그래도 많은 분들이 용기를 주시고 또 사랑으로 감싸 주셔서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임기 첫해를 보냈을 때 엘름허스트 지역을 중심으로 한 퀸즈중부한인회와의 통합문제가 등장했다.
같은 퀸즈 지역에 있으면서 활동 내용도 비슷하고 해야 될 일이 많은데 두 단체로 갈려 있는게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지적과 함께 연합해서 더 큰 일을 이루는게 낫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형성되던 때였다.
오래 전부터 역대 회장들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누군가가 칼자루를 쥐는 일만 남아 있던 시기였다.
때마침 퀸즈중부한인회는 젊은 신민수 회장이 맡고 있었다. 긍정적인 마인드가 통하면서 통합작업이 급물살을 탔고 이때 배후에서 큰 힘이 됐던 인사들은 중부지역의 전성진.서준교 플러싱의 홍종학 전임 회장이었다.
결국 플러싱한인회장 임기를 하루 남기고 양쪽 회장의 결단으로 통합이 이뤄졌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을 수 있었다.
그렇게 탄생한 퀸즈한인회는 회장 직선제를 폐지하고 지역내 각 단체장들이 이사회를 구성해 그 안에서 회장을 뽑는 간선제를 채택 현재 그 시험단계에 있다.
2007년 재외동포재단에서 실시한 제1회 세계한인의 날 기념 코리안 송 공모전에서 노래말에 당선돼 외교부장관 상을 탈만큼 감성적인 면도 보인다.
지난 4월 23일 열린 시민참여센터 연례 모금파티에서 그는 이사장으로써 많은 동포들이 현안인 한국인 전용 비자·위안부·동해표기 문제 등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당부했다.
내년으로 이민 40년을 맞는 그의 가족으로는 남편과 1녀2남이 있다. 딸 그레이스(고교 교사) 장남 피터(시 공무원) 차남 조셉(의사)이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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