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44] 1920년대 비행대 설립 직후…일본의 반응
빠르게 체계 잡아가자 일본 군부는 신경 곤두세워
노백린 장군을 중심으로한 독립운동 동향에 대해 조사
일본은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 '국외정보: 최근 구미에 있어서 불령선인의 행동'(문서번호: 고경 제29493호 비수 12219호, 수신: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 ▶1921년 2월 19일자 정보보고서 '구미재류 주의선인명부 송부의 건'(문서번호: 고경 제5429호, 발송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수신자: 외무차관) ▶1921년 3월 25일자 정보보고서(문서번호: 비 제33호, 고경 제9189호,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내각총리대신) 등을 통해 임시정부 비행학교에 대한 정보를 취합했다.
1920년 9월 20일자 정보보고서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과 임시정부 학무총장(현 교과부장관) 김규식의 활동에 대한 정보로부터 시작되는 20쪽 분량으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조선인비행기학교'라는 제목으로 3쪽에 걸쳐 임시정부 비행학교/비행대 문제를 다루고, 이어서 노백린 장군을 중심으로 한 캘리포니아 북부 재미동포사회의 군사적 독립운동 동향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이 정보보고서의 비행학교/비행대 관련 요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윌로우스에 있는 조선인비행기학교는 지난 7월 7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했다. 당일 교장 노백린, 총재 김종림은 '장래 일본에 대한 독립전쟁은 비행기에 의존하는 것 외의 수단은 없다'고 극언을 했다. 제1회 졸업생은 우병옥·오림하·이용식·이초 등 4명이며, 현재 연습생은 25명이고, 무선전신 장치가 있는 완전한 비행기가 5대 있다."는 것이다.
1921년 2월 19일자 정보보고서는 비행학교 관계자들을 포함해 서구를 무대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해 각 인물을 중심으로 간단명료하게 정리한 문건이고, 1921년 3월 25일자 정보보고서에서는 이 비행학교를 '호국독립군 비행기학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본의 정보보고서는 비행학교/비행대의 전체적 윤곽과 관계 인물에서 운영방식에 이르기까지 정보가 취합돼 있어 일본 당국이 큰 틀에서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는 됐으나, 개교식 날짜, 노백린 직함, 졸업생 이름 등 여러 면에서 사실과 조금씩 차이가 있어 정보의 정확성 자체는 다소 떨어졌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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