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리들리·다뉴바의 이민 유산들] 실물 재현한 미니 독립문·애국지사 10인 기념비

리들리와 다뉴바엔 언제부터 한인들이 살았을까. 지금은 한인들이 거의 살지 않지만 2차 대전 말기엔 400~500명의 한인 농업이민자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은 하와이 노동 계약이 끝난 이민자들 중에서 샌프란시스코를 통해 본토에 입국한 2011명의 한인 이민자들 또는 후손들이다. 이들은 리들리와 다뉴바를 중심으로 중가주와 리버사이드 등으로 퍼져 초기 농업이민의 효시를 이룬다.

당시 캘리포니아 한인의 3분의 1이 리들리와 다뉴바에 살 정도로 중심지였다. 현재 두 곳의 공동묘지엔 231명의 한인 선조들이 잠들어 있다. 1920년 퍼레이드를 펼칠 당시 이들은 시간당 20~30센트 임금을 받고 과일·채소 농장에서 땀을 흘렸다.

그때 월 생활비가 10~15달러에 달했으니 이들의 고난이 짐작된다. 그런 와중에도 김호·김형순이 세운 '김 브라더스'라는 청과회사가 '털없는 복숭아'로 백만장자가 돼 거액의 독립운동자금을 댔다. 김호는 현재 LA에 '찰스 H. 김 초등학교'로 기념되고 있다.

그동안 프레즈노 주립대 차만재 교수가 중심이 된 중가주한인역사연구회가 유적지 보존 작업을 주도했다. 한국 보훈처도 예산지원에 나서 많은 기념물이 세워지는 데 힘을 보탰다.

리들리에는 독립문을 실제 4분의 1크기로 재현해 미니 독립문이 섰으며 안창호·이승만 등 애국지사 10명의 기념비가 옆에 세워져 있다.

퍼레이드의 산실이 된 다뉴바한인장로교회 자리에 세워진 기념비, 1938년 세운 리들리 한인장로교회, 김호·김형순의 자택 및 1921년 건립된 청과 사무실, 이승만·안창호가 묵었던 버지스 호텔, 231명의 한인 선조들이 영면하는 공동묘지 등이 그 시절 애국 이민선조들의 자취로 남아 있다.

▶참고 www.cckhs.org

리들리·다뉴바=이원영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