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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엔 하얀 닭 국물…박정희 "고춧가루 더 넣으면 좋겠다"

1963년 첫 출시…라면 50년

면류를 즐겼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6년 가을 어느날 삼양라면 맛을 본 뒤 "한국 사람은 국물이 얼큰한 것을 좋아하니 고춧가루가 좀 더 들어가면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삼양식품 사사(社史)에 기록된 내용이다. 미식가로 알려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에도 독서를 하며 야식으로 라면을 종종 즐겼다. 메이저리거 박찬호 선수가 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에도 라면이 한몫한다. 박 선수는 "야구부는 운동 시작 전에 운동장 한편의 큰 솥에 라면을 끓여 먹었다. 그게 너무 부러워 친구 몇 명과 함께 야구부에 들어갔다"고 여러 인터뷰에서 밝혀 웃음을 자아낸 바 있다.

 배우 전무송씨는 라면을 "가난한 예술가에게 가장 은혜로운 음식"이라고 묘사한다. 60~70년대 남산 드라마센터에 갈 때면 매일같이 라면을 끓여 먹었다는 그는 "한 냄비 가득 끓여 몇 가닥씩 각자 그릇에 덜어 먹을 때의 정감을 어떻게 대신할 수 있나"라고 했다('맛있다, 내 인생'에서 인용).

 대통령이나 유명인이 아니라 해도 라면에 얽힌 기억 하나쯤 없는 한국인은 드물 듯하다. 올해는 그 라면이 63년 9월 15일 우리나라에 처음 출시된 지 50년이 되는 해다. 끓는 물만 있으면 쉽게 먹을 수 있다는 점과 저렴한 가격은 사람들을 라면 앞으로 이끌었다. 한국은 1인당 라면 소비량(지난해 연간 70개)이 가장 많은 국가다. 통계청에 따르면 라면의 주당 평균 섭취 빈도는 1.16회(2011년 기준)다. 소고기나 닭고기보다 주당 평균 섭취 빈도가 더 많다.

10~20대 줄며 라면시장 정체

 라면의 판매와 소비는 사회상을 반영한다. 80~90년대엔 종종 라면 사재기가 벌어졌다. 94년 3월 북한에서 '서울 불바다' 발언이 나왔을 때 서울시내 라면이 갑자기 동이 났다. 농심에 따르면 그해 3월엔 전달보다 30%나 많은 라면이 팔렸다. 같은 해 6월 북한이 국제원자력기구(IAEA) 탈퇴 때도 3일 만에 5400만 개의 라면이 팔렸다. 당시 서울 강남구 영동백화점에선 하루 30상자씩 팔리던 라면이 200상자씩 팔리기도 했다. 99년 12월엔 컴퓨터인식오류(Y2K)에 대한 우려로 인해 라면 사재기 현상이 벌어졌다.

 라면 사재기는 줄어드는 양상이다. 2011년 12월 19일 김정일 사망이 알려졌을 때 이마트의 라면 매출은 일주일 전에 비해 8.4% 늘었을 뿐이었다. 예전 사재기 현상이 나타날 땐 하루 매출이 100~200% 정도 늘어났던 점을 감안하면 특별한 동요가 없었던 셈이다.

 가파르게 증가하던 라면 소비도 2000년대 중반부터 주춤하고 있다. 이를 통해 고령화 사회로 가는 인구 구조와 식생활의 변화상을 살펴볼 수 있다. 김종준 농심 R&D 기획팀장은 "2000년대 중반부터 라면시장이 정체되고 있는 가장 큰 요인이 인구 구조 변화"라며 "소비 빈도가 가장 높은 계층은 10~20대인데 통계청에 따르면 15~24세 인구가 90년 880만 명에서 2010년 670만 명으로 30% 가까이 줄고 있다"고 말했다. 라면 외 햄버거·삼각김밥 등 다른 종류의 즉석식품이 늘어난 것도 라면 소비량 변화의 원인이다.

 경제상황과도 관련된다. 경기가 불황일 때 라면은 더 잘 팔렸다. 98년 농심의 라면 부문 매출은 97년보다 19.2%나 증가했다. 외환위기를 맞아 저렴한 가격의 라면 소비가 늘어난 것이다. 한 때 일부 상점에선 라면 물량이 딸려 '5개 이상 안 됨'이라는 팻말을 세워 놓기까지 했다. 증권시장의 흐름도 흥미롭다. 외환위기가 닥친 97년 12월에서 98년 6월까지 종합주가지수(월간 평균)는 21% 떨어졌지만, 농심 주가(월간 평균)는 2만8400원에서 5만9400원으로 배 이상 올랐다.

 해방과 6·25전쟁을 거치며 미국에서 밀가루를 지원받던 가난 속에서 라면은 탄생했다. 58년 일본에서 처음 만들어진 인스턴트 라면을 우리나라에 들여온 사람이 삼양식품 전중윤 명예회장이다. 전 회장은 남대문시장에서 미군이 먹고 남은 쓰레기 같은 고기 뼈다귀나 닭다리를 끓인 꿀꿀이죽을 수백 명씩 기다려 먹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 라면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61년 삼양식품을 세웠지만 설비기계를 구입할 달러를 구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전 회장은 중앙정보부에 있는 고향 후배를 통해 김종필(JP)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찾아갔다. 일본에서 사 온 라면을 하나 챙겨 온 그는 JP에게 우선 라면을 끓여 시식하게 한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민 배부터 채워 줘야 할 것 아니오." 그날 이후 전 회장은 JP의 알선으로 5만 달러를 구할 수 있었다. 제조기술 도입도 문제였다. 일본이 라면 생산기술을 알려 주길 꺼렸기 때문이다. 전 회장은 일본 라면회사인 묘조(明星)식품을 찾았다. 처음엔 거절당했지만 거듭 설득에 나서자 "한국이 피 흘리며 6·25전쟁을 하는 동안 일본은 돈을 벌었다"며 도와주겠다는 답을 들을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거쳐 탄생한 라면을 많은 사람이 처음부터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그런 손바닥만 한 천으로 무슨 옷을 만들어 입어'라며 외면당했다. 라면의 면(麵)을 섬유나 실의 면(綿)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63년의 첫 라면은 닭육수로 맛을 낸 하얀 국물 라면이었다. 일본 기술 그대로 했기 때문이다. 매콤한 맛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맞춘 소고기 육수는 70년에 등장했다. 72년엔 국내에도 컵라면('삼양컵라면')이 출시됐다. 일본에서 컵라면이 나온 지 1년 만이다.

 63년 라면 한 개 값은 10원이었다. 당시 시내버스 요금과 남대문시장에서 팔던 꿀꿀이죽이 5원이었고, 커피 한 잔이 35원이었다. 라면은 비싼 편은 아니었지만 한 끼가 힘들던 60년대 사람들에게 만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통계를 봐도 지금보다 라면이 더 귀했다. 통계청에 따르면 63년 도시근로자가구(2인 이상) 월평균 소득은 5990원이었다. 라면 하나 값(10원)이 월소득의 0.16%을 차지했던 셈이다. 2008년 도시근로자가구(2인 이상) 월평균 소득은 389만4709원이다. 같은 해 삼양라면 가격은 700원이었다. 라면 하나는 월소득의 0.017%다.

소고기 육수 70년 등장

 라면의 위상은 시대마다 다르다. 60년대엔 단지 쌀밥을 대신하는 '대용식'이 아니었다. 면발과 국물에 녹아 있는 기름기로 지방을 보충할 수 있는 '보양식'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귀했던 라면을 명절 때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라면보다 가격이 더 저렴한 국수를 섞어 라면과 함께 끓여 먹곤 했다.

 경제 발전으로 라면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80년대 이후 라면은 가난하던 시절의 애환을 상징하는 식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80년대는 짜장·비빔라면이나 해물육수가 가미된 다양한 라면이 개발된 라면업계의 팽창기이기도 하다. 삼양식품과 농심뿐 아니라 팔도·오뚜기 등이 라면사업에 뛰어들었다.

 90년대 말 라면은 또 한 번 변화를 겪었다. 싸고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하는 '대용식'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먹을 수 있는 '기호식'으로 변모했다. 다양한 조리법이 '발명'됐다. 군대에선 조리기구 없이 라면을 부셔서 봉지째로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뽀글이 라면'이 자리 잡는가 하면 2000년대엔 짜파게티와 너구리를 같이 조리하는 '짜파구리'가 인기를 끌었다. 라면전문점들도 등장했다. 이들은 기존 라면을 변형시킨 독특한 레시피로 소비자에게 인기를 끌었다. 기존 요리에 라면이 재료로 쓰이는 경우도 흔해졌다. 부대찌개·김치찌개 등에 라면 사리를 넣어 먹는 건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되고 있다.

 라면을 먹을 수 있는 장소의 한계도 사라지고 있다. 대한항공에선 97년부터 라면 기내식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 최고급 호텔들도 룸서비스로 최상급 해물 등을 첨가한 라면을 제공한다. 돼지고기를 금기시하는 이슬람권 국가나 채식을 하는 절도 예외가 아니다. 2011년 신라면은 이슬람 방식으로 조리했다는 '할랄(Halal) 인증'을 받았다. 채식주의자·스님 등이 먹을 수 있도록 육류 재료를 뺀 채식라면도 개발됐다. 2008년 4월 한국의 첫 우주인 이소연씨는 국제우주정거장에서 특별 가공한 우주라면을 먹었다.

 하지만 라면이 언제나 환영받은 건 아니다. 89년 11월 검찰은 삼양식품 등 5개 식품회사가 '공업용 우지'(소고기 기름)를 사용했다며 회사 대표와 실무자 등 10명을 구속했다. 이른바 '우지파동'이다. 97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지만 이 사건은 사람들 기억 속에 적잖은 파장을 남겼다.

이상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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