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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지위 인정 1년…팔레스타인을 가다

아버지 없는 가정 대부분…"먹고 살길 찾아 이스라엘 밀입국"

분리장벽 설치에 마을 두 동강
"이웃집 가려면 검문소 지나야"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촌 150개
올리브밭 몰수 식수 사용 제한


지난 6일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지구(웨스트 뱅크) 제닌 주 파쿠아 마을에서 만난 열여섯 살 소년 압둘아지즈 아부 알리의 눈매에는 장난기가 넘쳤다. 그가 앉아 있던 소파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총알 자국이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여느 고등학생과 다름없었다. 그는 이스라엘에 점령된 땅에 사는 팔레스타인 소년이었다. 자기 소개를 해 달라는 부탁에 "나의 인생은 1997년 제닌 난민촌에서 태어나며 시작됐습니다. 내가 처음 죽을 뻔한 것은 다섯 살 때입니다"라고 이야기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압둘아지즈가 살던 제닌 난민촌은 2002년 팔레스타인 2차 민중봉기(인티파다) 때 이스라엘군의 집중 소탕작전이 이뤄진 곳이다. 4월 한 달 동안 민간인 50여 명이 사망했을 정도다. 통행금지령 때문에 난민촌 주민들은 마음대로 피란을 갈 수도 없었다. 낮이든 밤이든 이스라엘군이 지정한 시간에 밖으로 나오는 주민들은 여지없이 총알 세례를 받았다.

그 해 4월 13일에도 통금으로 압둘아지즈의 가족 모두 밖에 나가지 못했다. 해질 무렵 집 안으로 화염 폭탄이 하나 날아들었다. 커튼에 붙은 불은 집 안 전체로 퍼졌다. "엄마, 나 차라리 나가서 총에 맞아 죽을래. 불에 타 죽기는 싫어!" 열 살이었던 압둘아지즈의 형이 소리쳤다. 어머니는 담요를 물에 적셔 아이들을 감쌌지만, 연기는 금방 목까지 찼다. 압둘아지즈의 형이 기도를 시작했다. 제발 비를 내려 달라고 빌었다. 4월은 팔레스타인의 건기, 사막에 비 한 방울 떨어질 리 없었다.



그때였다. 압둘아지즈 집 옆을 지나가던 이스라엘군 탱크가 수도관을 건드렸다. 갑자기 물줄기가 솟구쳤다. "알라께서 지켜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압둘아지즈는 지금도 살아남은 것이 믿기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죽음 목전까지 갔던 압둘아지즈의 경험은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한두 번쯤은 겪은 일이다. 팔레스타인은 이로부터 10년이 흐른 지난해 11월 29일 유엔 총회에서 처음으로 국가 지위를 인정받았다. 당시 팔레스타인 국민은 국제사회의 지지에 기뻐하며 독립국가 건국에 한발 다가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직접 살펴본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힘겹기만 했다. 서안지구를 둘러싼 분리장벽은 가족들의 생이별을 강요하고, 곳곳에 들어선 유대인 정착촌은 팔레스타인인들의 생명줄인 올리브 밭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돌 던졌다고 멧돼지 풀어 보복"

압둘아지즈가 사는 파쿠아 마을만 해도 2001년부터 이스라엘군이 세운 펜스와 정착촌으로 삼면이 둘러싸여 있었다. 파쿠아 주민은 3000명인데, 주민들이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는 우물 한 곳이 없었다. 이스라엘군이 식수원을 모두 장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압둘아지즈의 설명이었다. 그는 "몇 주 전에는 아이들이 펜스에 돌을 던졌다고 이스라엘군이 마을에 큰 개와 멧돼지를 여러 마리 풀어 아이가 다치기도 했다"며 "저 펜스를 보면 감옥에 갇혀 사는 기분"이라고 한숨을 쉬었다.

이는 유대인 정착촌이 들어선 곳 어디서든 쉽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기도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주택난 해결과 치안 유지 등을 위해 1967년 이후 서안지구에 정착촌 150곳을 건설했고, 2012년 현재 정착민 52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정착촌 건설 과정에서 자신들의 땅을 빼앗는다고 여기는 팔레스타인 주민들과 정착민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착촌 근처에서 자국민 보호를 위해 배치된 이스라엘군을 쉽게 볼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주변이 군 시설로 지정돼 접근이 금지되고, 이동의 자유를 제한당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다시금 반발한다. 이를 위협으로 간주하는 이스라엘군은 곧바로 제재에 나선다. 끊이지 않는 대립의 악순환이었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이 때문에 식수원과 농지를 이용할 수 없는 것이 가장 괴롭다고 했다. 정착민들이 우물 등 식수원 사용 시간을 1주일에 10시간 남짓으로 제한하고, 가장 큰 소득원인 올리브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이스라엘 정착촌을 국제법 위반으로 판단한 바 있다.

파쿠아 인근 시리스 마을에서는 아버지가 있는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분리장벽이 들어서며 마을 농지를 몰수당하자 많은 가장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이스라엘로 밀입국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시리스 마을에 사는 아야 크타엣(여·11)의 아빠도 10년째 이스라엘을 들락거리며 요리사로 일해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시리스 마을에서 분리장벽을 넘어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데는 차로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주민이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는 출입 허가증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2200셰켈(약 65만원)을 주면 위조된 허가증을 살 수도 있다. 아야네 집 한 달 생활비인 2500셰켈(약 75만원)에 버금가는 돈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무력 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지난해 11월에는 가자지구의 무장조직 하마스가 로켓포 공격을 계속하자 이스라엘이 공습을 감행, 팔레스타인인 160명과 이스라엘인 5명이 숨졌다.

팔레스타인의 임시 수도 라말라에 있는 나비 살레 마을은 제닌 주보다 상황이 심각했다. 이곳 주민들은 정착촌과 분리장벽으로 인한 피해에 항의하기 위해 2009년 12월부터 매주 금요일마다 시위를 벌이고 있다. 마을 곳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최루탄 껍데기를 갖고 노는 장면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2년 전에는 9세 어린이가 이스라엘군이 쏜 고무탄에 머리를 맞아 반신불수가 됐다. 알고 보니 쇠구슬에 고무를 코팅한 것이었다.

자신도 머리에 섬광탄을 맞아 다쳤다는 라원 타미미(여·19)는 "이스라엘군이 새벽에 집에 들이닥쳐 어린이들을 잡아가 잠을 재우지 않거나 굶기며 심문하곤 한다"며 벌써 미성년자 수십 명이 체포된 경험이 있다고 말했다. 또 "엄마에게 보내주겠다고 꼬드기면서 읽을 수도 없는 히브루어로 된 허위 자술서에 서명하게 하고, 이를 증거로 부모를 시위 주동자로 몰아 체포한다"고도 했다.

"가족 다함께 사진 찍는 게 소원""

이 아이들이 바라는 평화는 소박한 것이었다. 압둘아지즈에게 평화는 "길거리를 거닐며 이스라엘 군인을 마주치지 않고,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아야는 평화를 주제로 준다면 팔레스타인 국기를 게양한 학교를 그리겠다고 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지역에서는 팔레스타인 국기를 내거는 것 자체가 금지돼 있다. 라원에게 평화를 사진으로 표현해 보라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전체가 모인 가족사진을 찍고 싶어요. 체포되거나 시위 중에 다쳐 빠진 사람이 하나도 없이, 모두 모인 가족사진요."

라말라·제닌=유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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