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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곽노은과 함께 떠나는 낭만의 유럽여행 이탈리아

“나는 대리석에서 천사를 발견하고, 그 천사를 자유롭게 할 때까지 조각을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인 미켈란젤로가 한 말이다.
미켈란젤로가 5.17미터(17피트)의 거대한 다비드상을 완성한 것은 29세 때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26세가 되던 1501년부터 1504년까지 3년에 걸쳐 다비드를 조각했다.

현재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르네상스 미술뿐만 아니라 고금을 통틀어서도 최고의 조각품이라는 평을 받는 걸작 중의 걸작이다.

나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을 두 번 방문했는데, 다비드상 앞에 섰을 때의 감동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다비드상이 소장되어 있는 아카데미아 미술관은 보티첼리의 작품과 미켈란젤로의 친구였던 프란체스코 그라나치의 작품, 그리고, 교황 율리우스2세의 묘비를 장식하기 위해 제작된 미켈란젤로의 감옥(Prigioni) 시리즈 등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그러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뿐이다.

미켈란젤로의 대표작은 다비드상 외에도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와 거대한 돔, 시스티나 예배당의 최후의 심판과 천지창조가 있다.
이것은 그가 조각가인지, 화가인지, 건축가인지 그의 전공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혼동케 하는 것인데, 그는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배웠기에 이렇게 감동을 주는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었던 것일까?

미켈란젤로가 활동했던 시기의 르네상스 예술이 빛을 발하게 된 것은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439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가 열리게 된다. 성공한 은행가이자 정치가였던 코시모 데 메디치의 후원으로 열리게 된 이 역사적인 회의는 동방의 비잔틴 교회와 서방의 가톨릭 교회가 오랜 결별 끝에 만나게 된 것이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8세기부터 갈등이 일어나 11세기에는 서로 분열됐으며, 제4차 십자군 전쟁 때는 서방교회가 동방교회의 수도 격인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도 했다.
사용하는 언어도 동방교회는 그리스어를, 서방 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동방교회에서는 사제가 결혼할 수 있었지만 서방교회는 사제 독신주의를 고집하고 있었다.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철학을 알고 싶었던 코지모는 자비를 들여 700명의 동방교회 대표단을 피렌체로 초청했다.
피렌체를 방문한 동방교회 사람들의 손에는 그리스어로 된 플라톤의 모든 책들이 들려 있었다. 이 책들은 코시모에게 선물로 바쳐졌으며 플라톤 전집은 모두 라틴어로 번역하게 된다. 플라톤 전집을 번역한 사람은 당시 피렌체 최고의 석학이었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silio Ficino)였다.
이렇게 하여 서방에서는 처음으로 플라톤 사상의 전모를 원전을 통해 이해하게 된 것이다.

1444년에 피렌체에는 역사상 최초의 공공도서관인 산 마르코의 메데치 도서관이 지어 졌고, 1462년에는 유럽의 정신적 깊이를 크게 뒤집어 놓은 플라톤 아카데미가 설립됐다.
두 개의 사상체계의 결합이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게 하는 지적인 원동력이 된 것은 매우 당연한 결과였다.

1475년 3월 6일, 이탈리아 카프레세(Caprese)에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라는 아기가 태어난다. 카프레세는 피렌체에서 남동쪽으로 74마일(119 km) 정도 떨어져 있는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이다. 아버지는 카프레세 지역의 공증인이었고, 어머니는 병약하여 유모가 미켈란젤로를 데려다 키웠다.
그곳 사람들의 주요 직업은 석공이었는데, 유모 남편도 돌을 자르는 것이 직업이었다. 미켈란젤로는 자연스럽게 돌을 가지고 놀며 자랐으며 망치와 끌로 돌을 다루는 법까지 배우게 된다. 그가 6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재혼하여 미켈란젤로를 피렌체로 불러들인 것은 그의 나이 10살 때였다. 미켈란젤로는 그때부터 라틴어 문법학교에서 정규교육을 받게 된다. 그러나 돌을 쪼개며 예술가의 꿈을 키워 온 그는 성당 또는 공공기관을 다니며 조각품을 감상하고 스케치하는 일을 더 즐겼다.

공증인이 되기 원했던 아버지를 설득, 미켈란젤로가 기를란다요 공방에서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13살 때. 이듬해에는 메디치가의 조각가 베르톨도에게로 옮겨 도나텔로의 작품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마사초의 벽화 앞에서 토레지아니라는 친구와 논쟁하다 코뼈가 부러진다. 오늘날 그의 그림이나 조각에서 주저앉은 코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일 때문이다.
얼마 뒤 그는 피렌체 최고의 부자이자 권력가인 로렌초 데 메디치를 만나게 된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코지모 데 메디치의 손자로 르네상스의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어느 날, 미켈란젤로는 메디치가의 조각공원에서 열심히 조각을 하고 있었다.
“너 조각은 잘하는데, 할아버지 이빨 치고는 너무 가지런히 다듬은 것 같아.”
노인 모습의 조각을 관찰하던 로렌초가 어린 석공 미켈란젤로에게 슬쩍 던진 말이다. 미켈란젤로는 자극을 받고 밤새도록 다시 작업했으며, 밤새 변한 조각을 발견한 로렌초는 그의 아버지를 불러 이렇게 권고한다. “내가 자네 아들을 양자로 입양하겠네!”

15살에 메디치 가문에 체류하게 된 그는 인문 학자들과도 접촉, 고전문학이나 신구약 성서를 탐독함과 동시에 조각을 위한 인체 해부에도 전념한다.
당시 교회는 인간의 시체를 해부하며 연구하는 것을 금지했지만, 그는 나무 십자가와 교환하는 조건으로 어렵게 허락을 받아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로렌초의 사랑을 받으며 메디치 가에서 교양을 쌓고 실력을 키워 나간다. 조각학교 시절(16세)에 제작한 작품으로는 센타우로의 전투와 계단의 성모가 있다. 이 두 작품은 현재 피렌체의 카사 부오나로티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1492년, 미켈란젤로를 아들 같이 아끼며 르네상스를 후원했던 로렌초가 사망한다. 이후 베네치아와 볼로냐를 거쳐 로마에 초대된 그는 25세 되던 해에 피에타를 조각했다.

1501년, 다시 피렌체로 돌아온 그에게는 다비드상을 조각해 달라는 시의회의 주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의회 뒷마당에 방치돼 있던 거대한 대리석을 살펴본 그는 이 어려운 주문을 수락한다.
돌덩어리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왼손에는 물매, 오른손에는 물맷돌을 움켜진 용감한 다윗의 모습이 떠올랐을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왁스로 모형을 만들고, 3년 동안에 걸친 돌과의 전쟁에 몰입한다. 그것은 불멸의 조각품을 탄생시키려 했던 위대한 예술가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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