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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레만 호수의 고요한 마을 브베

곽노은과 함께 떠나는 낭만의 유럽여행

스위스와 프랑스가 맞닿은 곳에 레만 호(Lac Leman)라는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 지역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60%는 스위스령, 40%는 프랑스령이다. 중앙 유럽에서는 발라톤 호(Lake Balaton)에 이어 두 번째로 큰 호수다.
일 년 내내 맑은 날씨, 알프스 산과 새파란 호숫물은 레만 호만의 특징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서 여생을 마친 유명한 예술인들이 예전부터 수없이 많았다.
그중에는 오드리 햅번, 프레디 머큐리, 구스타브 쿠르베, 발튀스, 제임스 메이슨, 데이빗 니븐 등이 있는데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은 ‘브베’라는 마을에서 마지막 24년을 산 후 이곳에 잠들었다.

브베에서 먼저 발견한 것은 사실주의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 니콜라스 고골의 기념비였다. 우크라이나 출신의 고골은 ‘결혼’, ‘마차’, ‘죽은 혼’, ‘작가의 고백’, ‘외투’ 등 대표 작품을 남겼다. 이 기념비는 고골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2009년 우크라이나 정부가 기증한 것이다. 그 옆에는 루마니아 최고의 낭만주의 시인 미하이 에미네스쿠(Mihai Eminesch)의 흉부상도 있다.

에미네스쿠는 ‘호수’라는 시에서 사랑하는 여인이 갈대숲에서 나타나 자신의 품에 안기기를 갈망하지만 기다리는 그녀는 오지 않고 홀로 호숫가를 걷는다고 썼다. 이 흉부상은 루마니아와 스위스의 우호 증진을 위해 루마니아 대사관이 기증한 것이다.
또 다시 레만 호숫가를 걷다 보니 거대한 포크가 잔잔한 물 위에 꽂혀 있었다. 8미터 높이의 포크는 네슬레에서 운영하는 음식박물관(Alimentarium)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1995년, 스위스의 조각가 장 피에르 저그(Jean-Pierre Zaugg)가 만든 작품이다.



브베에는 세계적인 식품회사, 네슬레(Nestle)의 본사가 자리 잡고 있다. 코펜하겐의 인어공주, 브뤼셀의 오줌 누는 소년처럼 거대한 포크는 브베의 상징물이 됐다.
백조 한 마리가 포크를 외면한 채 이쪽으로 헤엄쳐 오고 있었다.
찰리 채플린은 1889년 4월 16일 영국 런던 이스트 레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뮤직홀의 가수 겸 배우였으며 어머니 또한 연극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였다. 어머니는 우아하고 매력적이었으며 갈색 머릿결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이었는데 채플린의 외할머니가 집시의 피가 흐르는 것은 집안의 절대 비밀이었다고 한다.

부모는 채플린이 태어나자마자 헤어져 그는 이복형 시드니와 함께 어머니 손에 키워진다. 아버지가 양육비를 보내 주지 않게 되자 식구들은 거의 매일 굶다시피 하루하루를 지낸다. 그러다 목을 다친 어머니 대신 생애 첫 무대에 서게 된 채플린. 5살 때였다.

채플린은 그 때부터 어머니에게 연기를 배우며 형과 함께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각종 무대에서 연기를 단련하던 그는 11살 되던 해 카노 극단과 함께 미국 순회공연을 한다. 두 번째 미국 순회공연은 2년 후인 1913년 10월부터 시작했다.
다음해 키스톤 영화사와 계약한 그는 중절모에 짤막한 양복바지, 큰 구두, 지팡이를 휘두르며 펭귄 걸음을 걷는 익살맞은 캐릭터를 선보인다. 웃음과 눈물을 함께 보여준 이 캐릭터는 관객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는다.

채플린은 훌륭한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으며 당시에는 최고의 연기자였다. ‘황금광 시대(The Gold Rush·1925)’에서 긴 빵에 포크를 찍어 자유자재로 춤추던 그의 연기는 아무도 뛰어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었다. 또 ‘시티 라이트’에서 주인공 소녀가 자신을 구해준 은인이 거지였음을 알게 된 가운데 장미를 입에 물고 있던 채플린의 표정 연기는 눈물겨울 정도로 감동이었다. 그것 뿐인가, 모던타임스에서는 ‘Je cherche apres Titine’이란 샹숑을 부르는데 아랍 사람이 우스꽝스럽게 노래하는 듯한 그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엄청난 웃음을 선사한다. 이 영화에서 채플린이 들었던 지팡이는 얼마 전 경매에서 42만 달러에 낙찰됐다고 한다.

채플린은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아름다운 멜로디의 ‘Limelight Theme’도 바로 그가 작곡한 14개의 작품 중 하나다. 채플린은 평생 37개의 영화를 제작했으며, 75개의 영화 각본을 썼고, 74개 영화를 감독하고, 89개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미국생활의 종지부를 찍는 일이 발생한다. 경제공황과 맥카시즘이 전 미국을 휩쓸자 채플린이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채플린은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었으며, 인생의 마지막 반려자인 우나 오닐을 만났다.

우나는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로 채플린과는 36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려서 부터 아버지와는 헤어져 살았던 우나는 채플린에게서 따뜻한 아버지의 부성을 발견하고 사랑이 싹트게 된다.
1952년 채플린 일가는 ‘라임라이트’의 유럽 시사회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항을 떠났다. 그리고 이틀 후 미국 이민국에서는 채플린 일가의 미국 추방을 전보로 통보한다. 세상에서는 성공했지만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었던 채플린에게 미국 추방은 오히려 축복이었다.
브베에서 생활하게 된 채플린은 매일매일이 행복이었다고 그의 자서전에서 고백한다. 브베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채플린이 마지막 여생을 보내기에는 최적의 마을이었던 것이다.

채플린은 1977년, 우나는 1991년 사망한 후 브베 교외 코르시 묘지(Cimetiere de Corsier)에 함께 묻혔다.

글, 사진: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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