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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외 없는 인생

박유선·'수필문학' 등단

신은 인간에게 거의 흡사한 관문을 통과하며 늙어가게 하는 것 같다. 또래가 돋보기를 사용하면 그것도 유행인지 따라서 쓰고, 머리를 염색하면 그 역시 따르니 말이다. 해서 우린 길에서 처음 만난 동병상련의 동년배와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이리라.

나 또한 일련의 그러한 일을 피하지는 못하더라도 되도록 늦게 만나고 싶은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기엔 내게 주어진 몇 가지 조건이랄까 하는 것이 있다.

예전 어느날 외출했던 아버지가 다시 돌아 와 "서재에서 영어사전을 가져오라"기에 난 의아해서 "아니, 왜 다시 왔어요?" 했다. 아버지는 "걸어가면서 계속 영어 단어를 생각했는데 다녀오면 잊을까 싶어 확인하고 가려고" 한단다. 그러면서 그때 벌써 60이 넘으신 아버지는 사전의 깨알 같은 글씨를 돋보기도 안 쓰고 봤다. 그것도 내력인지 나 역시 아직껏 돋보기는커녕 오히려 안경마저도 벗어야 사전뿐 아니라 독서를 할 수 있다. 안과의사인 사촌오빠는 너는 다행히 "아직은 괜찮지만, 언젠가 안경을 벗고도 글씨가 안 보일 땐 돋보기를 써야 하는 거"라고 한다. 그럼, 그렇겠지.

또한 난 기억력에 있어선 자타가 인정하듯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사실은 살면서 기억하고 싶지않은 것까지 어쩌라고 시시콜콜 그렇게 잊히지 않는지. 그놈의 기억력 때문에 젊은 날 부부싸움을 한 두 번 한 게 아니다. 난 방금 본 것처럼 너무나도 선명한데, 그이는 금시초문이란다. 어쩜, 같은 자리에서 같이 듣고도 그이는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 골라서 기억하는 특전을 받았나 싶다. 그런데 이제 나이를 비껴가지 못해 나도 나이 벽에 부딪쳤나 싶은 일이 반갑잖게 슬슬 하나 둘 나타난다.



토요일 아침 한주에 1정 필요한 골다공증약을 약 같은 물 한 컵과 복용한다. 약을 먹고 40분간 누워도 무얼 먹어도 안 된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른 후 습관대로 커피 한잔을 마시고 비타민 칼슘을 먹었다. 그러고 가만히 생각하니 지금 내가 무얼 했나 싶다.

요즘 건강검진 결과 비타민D 수치가 너무 낮아 골다공증 근사치에 가 있다고 한다. 의사는 특이체질인 내게 위에 열거한 약과 비타민 D(5만 단위)를 치료목적으로 3개월 분을 처방했다. 그런데 그만 칼슘 흡수를 돕는다는 골다공증약을 먹고 그 끝에 칼슘을 분해한다는 카페인 듬뿍 든 커피를 마시고, 잘 하느라 칼슘을 또 먹었으니 이건 도대체 어찌 된 머리인지 어이가 없다.

나는 비타민D도 얻을겸 자연에서 사색하는게 더없이 즐거워 여름 내내 태양에 타거나 말거나 정원에 나가 산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는 이 도시 태양은 야속하게도 숨바꼭질만 한다.

그뿐인가 얼마 전 감기몸살에 걸려 물약을 먹고 사흘 밤낮을 그만 까라져 정신을 못 차렸다. 가물거리는 상황에도 내가 아무리 건강 때문에 면역이 약해졌기로서니 '왜 이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순간 '아차, 약 계량 숟갈을 잘못 사용했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역시나 착각해서 큰 숟갈을 작은 숟갈로 썼으니 그럴 밖에.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던가?

얼마 전 라디오 코리아에서 한 시간 토크 쇼를 했다. 6·25를 앞두고 한민족문예제전에서 통일부장관상을 수상한 작품 '통일을 꿈꾸는 실향민'외에 또 다른 작품 한 점을 더 낭독하며 대화를 나눴다. 진행자가 어느 토요일에 방송 될 거라고 일시를 알려줬다. 하는 거 없이 하루하루를 바쁘게 지내는 난 그래도 실수나 하지 않았는지 들어봐야지 했다.

그 토요일이 되었다. 한데 집안의 라디오는 잡음 때문에 방송을 들을 수가 없다. 그때 언젠가 차에서 잘 들리던 생각이 떠올랐다. 차 라디오를 켜니 깨끗하게 잘 들린다. 그런데 일러준 시간이 지나고 있는데도 다른 프로그램만 나온다. 그이에게 "오늘 토요일 맞지요?" 했다. 그이 역시 그렇다고 한다. 안에 들어왔다 다시 나가 켜보고, 또 한참 후에 켜보고 해도 역시나 감감 무소식이다. 나는 슬며시 뿔이 나서 혼자 소리로 구시렁거리며 '뭐, 이런 방송국이 다 있어. 참 나, 사람을 놀리나?' 했다.

때로 성격이 급한 나는 예전 같으면 당장 이 메일을 보냈겠지만 이젠 나이탓인지 느긋해져서 사정이 있겠지 하고 접었다. 자고 일어나 생각하니 '아이고, 내가 어떻게 토요일은 까맣게 잊고 지나가고 일요일을 토요일로 착각했단 말인가' 내 기억력이 한심스럽다. 언젠가 병원 기록실에서 어떤 미국할아버지가 내게 '오늘이 며칠이냐?' 고 묻는다. '어~어, 저 할아버지 왜 저러지?'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내가 나이를 비껴가지 못하고 그 짝이 났으니 이 또한 예외 없는 인생인가? 그래서 세상살이를 어제는 남의 일, 오늘은 내일이라 하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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