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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 아래서]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한성윤 목사·나성남포교회

학교에서 돌아오려면 신작로를 지나 골목길을 돌아가야 했기에 어린아이 발걸음으로는 제법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습니다. 기울어가는 햇살이 그림자를 땅에 늘어지게 누일 때면 자기 몸집보다 더 커보이는 책가방을 양 어깨에 메고 소년은 집으로 돌아갑니다. 무엇이 좋은지 길바닥에 눈을 붙인 채 네모난 시멘트 블록에 발을 맞추어 깡총 대며 노래를 흥얼댑니다. 달그락 달그락 가방 속 도시락에 서 있던 젓가락도 같이 흥에 겨워합니다.

동네 어귀에 자리 잡은 뽑기 할머니도 오늘은 소년의 발걸음을 멈추지 못합니다. 숨이 가슴에 닿도록 집으로 달려온 소년은 파란 대문을 단숨에 열며 달려들어 옵니다.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소년의 손에는 선생님께서 주신 시험지가 들려있습니다. 다다미를 놀리던 어머니가 슬쩍 하늘을 곁눈질로 봅니다. 처마 끝 그림자가 나팔꽃을 가리는 걸 보니 이제 아이가 올 시간입니다.

일어나 낮에 사다 쪄놓은 감자를 내어 설탕을 살짝 뿌립니다. 급히 먹다 목이 멜까 밥공기에 물 한잔을 부어 내올 때쯤이면 골목길을 돌아 잰걸음으로 뛰어오는 발걸음소리가 콩닥거립니다. 어머니의 얼굴에 웃음이 퍼집니다. 오늘 시험을 잘 본 게로군. 대문을 열어젖히는 아이의 눈은 벌써 웃고 있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크게 부릅니다.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항상 대문을 발로 차며 들어가고 큰 소리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 시험지가 구겨져 가방 속에 숨어 오는 날이 더 많이 있습니다.

한 참을 개미 집을 찾아다니고 담벼락에 앉아 잡힐 듯 말 듯한 나비를 따라 저수지 길까지 돌아오는 날도 있습니다. 놀아달라는 저수지 도랑에 발목이 잡혀 신발 하나 선뜻 선물로 주고 오는 날도 있습니다. 친구와 다투다 옷 단추가 떨어져 무슨 말로 변명을 할까 하고 조그만 이마에 내천자를 그리며 들어오는 날도 있습니다. 그렇게 사고를 치고 어둑해져 노을을 등에 업고 들어올 때면 벼룩도 낯짝이 있고 멸치도 창자가 있다고 문 여는 소리도 내지 않고 대문에 발부터 집어넣습니다.

어김없이 어머니는 문간에 앉아 계십니다. 그 자리를 무척 좋아하시나 봅니다. 화난 눈빛 뒤에 숨은 걱정으로 물든 마음을 모르는 아이는 닥쳐올 화만 피해 보려고 눈빛으로 땅바닥을 긁으며 딴청을 합니다. 성적표는 보여주기 싫고 단추 떨어진 옷을 보여주기는 창피하고 잃어버린 신발 때문에 혼날 것이 뻔하니 피할 궁리만 하는 중입니다. 그래도 해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골목길을 돌아오는 아이의 신발 끄는 소리를 어머니는 듣습니다. 풀이 죽은 발걸음 소리에 어머니는 마음을 다잡습니다. 눈에 힘을 주고 혼을 낼 준비를 합니다.

문에 들어온 발을 보며 화다닥 놀랍니다. 신발은 어데 두고 왔는지 흙 발만 보였기 때문입니다. 혼을 내기도 전에 마음이 벌써 내려앉습니다. 그래서 더 눈에 힘을 줍니다. 힐끗 마루 끝에 숨겨둔 설탕을 듬뿍 묻힌 감자를 봅니다. 어머니의 눈가에는 주름이 잡히는데 숨어 들어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세월은 지름길로 다닌다더니 소년은 이젠 거울에서 아버지를 뵙고는 합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만큼 살지 못했습니다. 달려온 인생에 상처도 많이 받고 상처를 또 주었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에서 살아보겠다고 사람을 돌아보지 못하고 산 날들이 새털 같습니다. 하루가 쌓이고 이어져 오늘이 되었지만, 대문을 열고 내는 큰 소리도, 숨어 들어가는 소리도 모두 받아주실 어머니는 이제도 그립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말이 너무하고 싶습니다. "어머니 학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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