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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륙횡단 수기공모 당선작] 110년전 시작된 할아버님의 꿈

미셸 박

얼마 전 시아버지의 장례를 치렀다. 많은 일가친척들이 미 전역에서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곳 LA까지 먼 길을 마다않고 와주셨다. 싸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오리건, 하와이에 이르기까지 이미 2,3,4 세가 다 함께 모인 뜻 깊은 자리였다. 우린 다 함께 고인의 명복을 빌며 97세의 짧지 않았던 삶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저마다 고인과 함께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20세기 초 저 멀리 조선 땅의 한 작은 항구에서 시작된 시간의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1904년 격동의 조선 땅을 떠나 Honolulu 하와이에 도착한 배는 각기 많은 사연을 지닌 사탕수수 이민자들을 쏟아 내었고 그 중엔 시아버지의 아버지 곧 나의 시할아버지도 계셨다. 도착하자마자 14일간의 긴 항해의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곧바로 고된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된 시할아버님은 그곳에서 고된 미국생활을 시작하시게 되었다. 그 어려웠던 때, 사정없이 내리쬐던 뜨거운 햇볕과 무시무시하던 독지네를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오직 빨리 미국 생활에 정착하여 머나먼 고국 땅에 두고 온 가족을 데려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2년 뒤 시 할아버님은 미 본토로 건너오시게 되었고 먼저 몬태나로 건너오신 사탕수수 농장시절의 친구를 찾아 샌프란시스코에서 몬태나로 향하는 기차를 타시게 된다.

운명과 같이 중간 기착지였던 아이다호주의 마운틴홈을 몬태나로 잘못 알아들으셨던 시할아버님은 아무 연고도 없던 그 곳에서 미 본토에서의 첫 생활을 시작하시게 된다. 무작정 찾아들어가 더듬거리는 영어로 일자리를 구했던 곳에서 특유의 근면함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몇 년 뒤엔 가족과 재회하면 같이 살 수 있는 작은 농장에 딸린 집을 마련하시게 되었다. 그 사이 고국에 있던 가족들은 조선을 합방한 일본정부가 출국여권을 내주지 않고 차일피일(此日彼日) 미루는 바람에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 간신히 몇 년이 더 흘러 드디어 미국 땅에 도착한 가족들은 샌프란시스코 앞에 있는 엔젤아일랜드에서 방역과 입국심사를 위해 며칠 유해야했고 그 사이 마중 나와 있던 시할아버님은 가족들을 바로 코앞에 두고 못 만나는 것이 아닌가하여 발을 동동 구르셨다고 한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재회한 가족들은 아이다호의 농장에서 열심히 일했고 얼마 뒤엔 다소 척박한 아이다호를 떠나 태평양 연안의 오리건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도 시할아버님은 그 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농장을 시작하셨고 또 그 사이 자녀들은 조선에서 태어난 둘을 포함한 아홉으로 늘어났다. 그 중에서 다섯째로 태어나신 분이 바로 나의 시아버지시다. 기미년 삼월 대한독립 만세의 함성이 있기 3년 전 1916년 오리건주의 한 작은 농장에서 태어나셨던 시아버지의 생애는 미주한인 역사와 또 미국역사와 함께 어우러진다. 시아버님이 갓 아홉 살이 되던 해 시할머님이 막내 동생을 낳다가 돌아가시고 그 동생마저 채 백일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엄마 없이 남겨진 아홉 남매는 똘똘 뭉쳐 어려운 시간을 이겨냈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시할아버님을 도와 미국 대불황의 시기를 헤쳐 나가게 된다.

학교에 다니며 농장 일을 도우며 엔지니어의 꿈을 키우셨던 시아버지는 2차 세계대전이 나자 미 육군에 입대하셨고 프랑스 전선에서 복무하셨으며 미 정부로부터 여러 훈장을 하사받으셨다. 같은 시기에 공군 파일럿으로 복무하신 바로 아랫동생인 잭슨 시삼촌은 독일군의 격추를 받고 이탈리아 상공에서 23세의 나이로 산화하셨다. 잭슨 시삼촌의 죽음은 온 가족에게 충격이었거니와 더욱이 시할아버님께는 커다란 슬픔으로 자리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학업에 복귀하신 시아버님은 오리건 주립대학교를 졸업하신 후 좀 더 나은 기회를 찾아 남가주로 내려오신 후에는 당시 미국이 야심차게 추진 중이던 우주개발 계획에 참여하실 수 있으셨고 McDonald Douglas가 개박하던 Gemini Capsule을 연구하셨다. 그 후에 항공 우주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자 어릴 적의 농장경험을 되살려 landscape과 농작물 재배로 가족들을 부양하셨다고 한다. 그 뒤 보잉사의 항공 우주 엔지니어로 복귀하셔서 재직하시다 은퇴하셨다.

장례식장의 스크린 위로 한 장 한 장 스쳐가는 사진들을 보며 참석한 모두는 미주 한인 이민 역사와 함께한 시아버님의 생애를 회상할 수 있었다.

오리건주의 작은 농장의 개구쟁이 소년이었던 시아버님이 늠름한 미 육군 병사로 프랑스 전선에서 찍은 사진들과 제미니 캡슐 앞에서 나비넥타이를 매고 찍으신 사진 앞에선 다 함께 미소를 지었다.

둘째 시누이가 회고하던 1960년대 말의 Big Bear로의 고사리채취여행과 또 온 가족이 시아버님이 태어나신 오리건주의 농장으로의 가족여행은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을 좋은 추억거리다. 아직도 오리건의 해리 시삼촌 가족들은 시할아버님이 시작하시고 일구신 터전을 떠나지 않고 지키며 지역에서 유서있는 Nursery로 가계를 잇고 있다.

장미꽃이 만발한 로즈 힐 언덕 위에서 미 육군의 나팔과 거수경례를 받으며 시아버님의 관위에 덮여있던 성조기는 고이 접혀서 남은 가족들에게 전달되었다. 그 순간 나에겐 문득 시댁에 걸려있는 빛 바랜 태극기가 겹쳐졌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두르고 입고, 쓰기도 하던 태극기가 우리 시댁에서는 귀한 가보이다. 거실 한 가운데 벽 정면에 걸려있는 유리상자 속의 빛 바랜 태극기는 언제 어떻게 그 곳에 걸리게 되었는지 모르나 늘 가족과 함께 집안 생활의 중심에 있었다.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거실 한 가운데 걸려있는 태극기는 시아버님의 한인 2세로써의 긍지요 자부심이 아니었나 싶다.

얼마 전 한인 타운에서 특별 제작한 태극기를 나눠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남편이 몇 시간동안 줄을 서서까지 태극기를 받아오고 또 그 태극기를 보며 자랑스럽고 뿌듯하게 생각하는 것을 보며 시할아버님의 고국 사랑이 다음 세대로 그대로 전달된 것 같다.

3년 전 2010년엔 미 전국 각지에서 후손들이 모여 Park’s 미국 이민 100주년 기념 가족 reunion이 있었다. 콜롬비아 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배기에 수양관을 통채로 빌려 100명이 넘는 자손들이 모여 시할아버님의 발자취와 삶을 기념했다.

90세를 넘기신 2대부터 갓 태어난 5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 할아버님의 직계가족들은 3박 4일 동안 같이 먹고 마시며 서로의 정을 나누었다. 각 세대별로 티셔츠를 맞춰 입고 매일 매일 함께 모여 각 자손별로 서로를 소개하며 지나온 세월들을 나누고 또 장기자랑과 슬라이드 쇼를 통해 가족들의 우애를 나누었다. 100년 전에 이 미국 땅에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첫 발을 내딛으신 시 할아버님의 자손을 다 합쳐 거의 300명을 아우르는 방대한 가족으로 성장해 있었다. 그 중엔 우리 남편처럼 한인과 결혼한 자손도 있었고, 인종과 나라를 어우러져 다들 미국 각계각층으로 뻗어나가서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다. 오래 전 돌아가신 루비, 완다, 로즈 시고모님들의 자손들이 고인이 된 본인의 부모님들을 회상할 때 모두들 눈물을 글썽이며 한 번도 뵙지 못한 분들이지만 꼭 우리의 삶속에 살아서 그 순간 함께 하심을 느꼈다. 즐겁고 의미있고 뜻 깊었던 며칠간의 꿈같은 시간을 뒤로한 채 모두들 각자의 처소로 흩어졌지만 아직도 그 때의 따끈따끈한 정들이 느껴진다. 오리건주의 해리 시삼촌의 백인 자부와는 같이 아침에 운동을 하며 알게 되어 언젠가는 같이 하프 마라톤에 나가자고 약속하기도 했다.

시아버님은 얼마 전 돌아가신 해리 시삼촌의 부고를 들으시고 슬퍼하셨다고 한다. 본인은 97세, 동생은 95세로 긴 장수의 복을 누리셨던 두 분……. 그 소식을 들은 지 며칠 뒤 시아버님 또한 세상을 떠나셨다. 그렇게 사이좋게 형제분은 나란히 세상을 뜨셨다.

잇따른 부고에 놀란 가족 친지들은 슬픈 와중에도 함께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다 같이 모여서 또 한 번 1세, 2세들의 추억을 회고했다.

이제는 인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엄청나게 팽창해서 미전역에 시할아버님 자손이 거의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다. 본고인 오리건, 하와이는 말할 것도 없고 동부, 중서부, 서부까지 아우르는 가족이 되었다. 지금도 후손들은 시할 아버님이 꿈을 가지시고 첫 발을 내디디셨던 이 미국 땅에 살고 있다. 한인 이민 1세대의 후손으로써 도 미국사회에 정착한 성공한 미국인으로써 각자 자기 맡은바 위치에서 훌륭히 생활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과연 시할 아버님이 꿈꾸었던, 소망하던 미국은 어떤 곳이 있을까. 그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도착한 미국은 하와이는 어떤 곳이었을까. 그 2세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떤 삶의 여정을 거쳤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며 자라나는 나의 두 딸에게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선택한 이 땅의 곳곳을 보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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