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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나와 라면

유태경/한국문인협회 미주지회회원

끓는 물에 라면 하나를 뚝 잘라 넣고는 잠시 망설이다 하나를 더 꺼냈다. 두 개는 많을 것 같기에 반쪽을 뚝 잘라 수프와 함께 냄비에 넣는다. 남아있는 반쪽을 찬장에 넣으려고 집어 들었다가 라면에 내 눈이 꽂힌다.

다른 국수와는 달리 꼬불꼬불 꼬여있는 면발의 끝을 찾아 헤매다 꼬불꼬불한 이유를 알 것만 같다.

튀길 때 기름이 잘 스며들며 쉽게 흘러 빠질 것이다. 끓일 때 사이사이 공간이 있기에 뜨거운 물이 잘 스며들어 조리시간도 단축될 것이다. 유통 과정도 직선 면발보다 강도가 높아 잘 부서지지 않으며 좁은 면적에도 많이 담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방울이 송골송골 숨바꼭질하며 끓는 냄비를 들여다보니 라면과 같이 동고동락했던 옛날에 있었던 이야기나 하자고 재잘거리며 보채는 듯 정겹다. 라면발처럼 꼬부라졌던 나의 삶을 라면을 주식 삼아 끓여 먹으며 엉킨 실타래 풀어가듯 희망 찾아 살아오던 옛 모습들이 생각난다. 어려웠던 고비의 순간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라면 발 사이사이에 숨어 보이는 듯해서다.



자취하며 고학하던 시절 라면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값도 싸고 조리법도 간단한 라면이 얼마나 나에게 희망을 주었는지 나는 지금도 라면의 고마움을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봉지에 든 라면이 한 개 10원이었다. 나는 10원이 부담스러워 수소문하여 SY라면 공장을 찾아갔다. 수프가 없는 라면 부스러기 한 관(6근 넉 냥)에 80원씩을 주고 한 자루를 산다. 하지만 막상 라면을 끓이고 나면 '바늘 가는 데 실 간다'는 속담이 있듯이 김치가 생각났다. 먹을 때마다 라면의 관계를 비유한 듯싶어 천장에 달린 망상의 조기를 쳐다보듯 아쉬워했다. 나는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그리고는 김치 없이 부스러기 라면을 끓여 숟가락으로 퍼먹을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하며 학교에 다녔기에 지금 내가 존재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아내가 외출하고 없을 때 점심때가 되면 라면을 끓여 먹는다. 몸에 해롭다는 아내의 잔소리가 늘 따라다니길래 먹은 후 급히 설거지로 라면 먹은 증거를 없애고 만다. 이런 상황을 잘 아는 손자도 놀랍게 나처럼 몰래 먹는 라면을 좋아한다.

일요일인 오늘 아내가 외출했다. 점심때가 되었기에 손자에게 "라면이 어떨까"라고 문의한다. 손자는 화들짝 반기며 라면에 동의한다. 라면을 끓여 손자와 함께 마주 앉았다. 뜨거운 라면을 한 젓갈 집어 들고는 '후~'하고 분다. 손자도 호호 불어가며 한 젓가락 입에 넣고는 뜨거운지 머리를 흔들어댄다.

꼬불꼬불 늘어진 라면발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삐져나온다. 라면을 맛있게 먹고 있는 손자의 얼굴과 이마에서 흐르는 구슬땀을 본다. 손자의 입에서 빠져나오는 김은 안경을 가리며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허리가 굽으신 시골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순간 혀로 입안을 휘휘 저어가며 칼국수 먹었던 기억으로 나의 가슴은 먹먹해진다.

밀가루 반죽하여 빈 병이나 다듬이 방망이로 얇게 밀어 칼국수 써는 어머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똑똑 두들기는 칼과 도마의 합창도 정겹다. 멸치 몇 마리 집어넣고 팔팔 끓는 물에 썰어놓은 국수와 애호박 송송 넣으면 끝이다.

아차! 또 들켰다. 외출했던 아내가 들어오다 보고는 "건강에 좋지 않다는 라면을 왜 어린애한테까지 또 줘요?"라고 쏘아붙인다.

평생 즐겨 먹어온 라면발의 길이가 아무리 길어도 내가 헤쳐 가며 살아온 삶의 길에 어찌 비하랴! 하고 싶은 일하며 먹고 싶은 음식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삶이 건강이고 진정한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미 고운 석양빛이 오솔길에 들어서 황혼의 언덕도 넘어서는데 떨어지고 밟히는 것이 낙엽이거늘 새삼 건강을 위해 무엇을 가리고 더 바라겠는가! 이럴진대 아내의 잔소리는 웃으며 넘기고 만다.

아무리 김치 곁들여 먹어도 옛날 부스러기 라면 끓여 숟갈로 퍼먹던 맛은 아니지만 아내의 가족 건강을 위한 잔소리를 곁들여 먹으니 오늘따라 라면 맛이 더욱 꿀맛이다. 사람 사는 행복한 냄새인지 라면의 특유한 냄새가 집안에 진동한다.

소주 몇 잔에 풍년이 든 내 마음이 피어오르는 담배 연기에 실려 고향을 향하여 하늘로 날아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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