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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귀연일기] 시골생활의 소중한 경험 하나…물 오른 나뭇가지를 보는 것

딸 아이 나이가 스물 여섯이니 논리적으로만 셈한다면 할아버지 될 날이 멀지만은 않았다. 최근 2~3년 전부터 어린아이들이 부쩍 예뻐 보인다. 생물학적으로도 손을 볼 날이 가까워졌다는 뜻일 수 있겠다.

아직은 상당히 험한 일도 육체적으로는 감당해낼 만한 근육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내 스스로 요즘 들어 몸과 마음이 서서히 미묘하게 변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 쉽게 감상에 젖어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평생 보지 않았던 TV 연속극을 20~30분 넘게 지켜볼 수 있게도 됐다.

남성에서 중성 쪽으로 변해가고 있는 걸까. 십여 년 전만 해도 나이가 들면 감성이 무뎌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한편으로 둔해지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여려진다는 점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요 며칠 나무 몇 그루를 옮겨 심었다. 무너져 가는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던 매화나무 배나무 두릅나무 등을 좀 더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자리에 임시로 옮겨 놨다. 지난해 이때쯤에 100그루 넘게 나무를 옮겨 심었는데 그때는 일에 치어 미처 몰랐던 점을 이번에 나무를 옮겨 심으면서 알게 됐다.



나무에 물이 오르는 걸 '발견한' 것이다. 원래 성정이 무딘데다 어린 시절 시골을 떠나온 이후로는 도시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물 오르는 걸 가까이에서 지켜볼 기회 또한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엊그제 나무에 물이 오르는 모습을 본 건 난생 처음 경험인 셈이다.

갈색의 배나무 가지 끝 부분이 녹색으로 은근히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다지 황홀한 색감은 아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 사랑스럽고 생기 있는지 보는 순간 대번에 마음이 밝아졌다. 이제 막 기기 시작한 젖먹이 조카를 대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또 하나 살아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잎사귀를 떨군 갈색의 겨울 나무들은 죽지는 않았어도 최소한 생명이 정지해 있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가느다란 가지 끝에 살짝 물감이 번지듯 스며든 희미한 녹색은 마치 "저 살아 있어요"하고 소근거리는 말처럼 느껴졌다.

장년과 노년 사이의 50대는 어느 쪽에 붙기도 곤란한 연령대이다. 사실 정신적으로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어정쩡한 나이이다. 활력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전혀 힘을 못쓰는 연령대도 아니다. 어느 쪽에 끼기도 곤란해서인지 50대를 통틀어 지칭하는 용어 조차도 없다.

내 경우에만 그런지 몰라도 50대에 접어들면서 전에 없던 심리 변화를 겪고 있다. 뭔가 정서적으로 안정돼 가는 기분이 드는 한편 가끔씩 울컥울컥 하는 심사가 치밀어 오르기도 한다. 나이가 들면 모든 감각이 무뎌지는 줄만 알았는데 그 게 아니란 걸 50대에 들어서서야 느꼈다.

어쩌다 한번씩 자식들이 내뱉는 평범한 언사가 과거와 달리 핀잔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늙는다고 해서 감정이 무조건 둔해지는 것만은 아닌 게 확실하다. 어디다 내놓고 하소연하기도 곤란한 상황에 좀 더 자주 접하는 게 50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아무튼 복잡미묘한 내 심정에 물 오른 나뭇가지는 위안이자 희망 같은 존재였다. 그간 나는 '한창 물이 올라 있다'는 말을 종종 조금은 속되고 어딘지 삐딱한 뉘앙스로 받아들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 물 오른 나뭇가지를 보면서 생각을 크게 달리하게 됐다.

나뭇가지에 물 오르는 모습은 축복의 메시지요 희망의 빛 같은 거였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 봤는데 도통 질리지가 않았다. 그저 신기하고 신비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꼭 시골 생활을 해야 물 오른 나뭇가지를 구경할 수 있는 건 아닐 게다. 하지만 내겐 물 오른 나뭇가지를 지켜 본 게 지금까지 일년 반 남짓한 시골 생활에서 꼽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경험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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