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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작은 꽃바구니

노향순

믿음이나 의리를 저버리는 행위를 배신이라고 한다. 보일 듯 말 듯 그림자 없이 처리했다고 마음을 놓고 있을 때 이미 상대방은 결별의 의지를 실체 뒤에 세워두고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싶다. 배신은 순간적이 아니다. 생활 중 의식적으로 하는 습관적인 결과일 것이다. 예부터 양반은 급해도 맨발로 손님을 맞이하지 않으며 배고파도 남의 것 넘보지 않는다고 했다. 정신일도하사불성(精神一到何事不成)이란 말처럼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삶의 변화를 부단한 노력으로 지켜내는 사람이 참인생이라고 내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우연한 기회에 한 여인을 알게 되었다. 생활적인 것에서부터 종교에 관한 것까지 많은 대화가 오갔다. 그녀의 가슴은 여름 가마솥같이 뜨거운가 하면 대화는 항상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녀의 생활고는 나를 항상 우울하게 만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녀의 판매망에 오솔길 정도는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에게는 필수품은 아니었지만 그녀에게 물품을 샀고 친구까지 동원해서 사 주었다. 그래서일까. 하루는 진지한 음성으로 내게 "언니. 이 일 같이해서 선교하고 잡비 벌어 써. 다단계는 아니야"라고 했다.

돈이 있으면 편리하며 없으면 불편하다. 나는 형편대로 내 그릇에 맞춰 음식 담듯 살아간다. 누구의 빛나는 보석을 봐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니면 그 번쩍거림에 동조하는 여자는 되지 못한다.

그렇게 대면한 시간은 갔고 그녀와 같이 잘 아는 분의 사진 전시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그날 전시회에서 잘 아는 분은 아름다운 장미 한 바구니를 내게 선물했다. 장미꽃은 잘 짜인 갈색 바구니에 얌전하게 매듭지어진 리본 안으로 향기를 불어내어 내게 평온한 기쁨을 주었다. 바구니의 꽃은 적어도 스무 송이는 넘게 보였다. 후텁지근한 날씨였지만 차 안은 꽃향기와 웃음 넘치는 이야기로 그녀 집까지의 거리가 짧게 느껴졌다. 나는 차에서 내리는 그녀에게 꽃바구니를 손에 들려주면서 말했다.



"이 꽃은 너도 알다시피 받은 선물이지만 너에게 선물하고 싶어. 그런데 장미가 마르면 꽃바구니는 돌려줘. 선물한 분의 마음을 생각해서야. 선물은 어떤 의미로든지 소중하게 다뤄야 하잖아."

2주 후 그녀를 찾아가서 꽃바구니 가져갈까 물었다. 다음에 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여러 날 지났다. 무슨 일이 있어 그녀의 집에서 담소하는데 그녀가 차고에서 꽃바구니를 가지고 왔다. 가지고 온 건 연미색에 아주 작은 꽃바구니였다. 어처구니없어하는 내 표정을 읽어내고 "아이~ 언니도. 꽃이 열두 송이도 안 되었어요. 이 바구니 맞아요"라고 한다.

계획된 거짓말을 고칠 수 있는 건 자신의 양심뿐이다. 정직성을 상실한 그녀의 말은 나의 가슴에 바위를 얹어 놓은 듯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날 따라 구름조차 나무에 내려앉아 소나기를 몰고 올 것처럼 음산한 회색 기운이 잡풀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이내 가는 비가 도시 주변으로 흐르며 바람 따라 차창에 헤아릴 수 없는 구슬들을 뽑아내며 날아가고 있었다. 빗소리와 바람에 묻혀 집으로 돌아온 후 그녀와의 전화 소통은 멈추어졌다.

나의 딸 결혼식에 초청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이미 그 날짜를 잘 알고 있는 터였다. 오지 않았다. 가까운 사이에서 깊은 사이로 발전했는데 이 작은 꽃바구니 하나가 내게 큰 심리적 타격을 주고 말았다. 인간적인 애정이 동시에 상실할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여러 날 이 일로 심상했다. 하지만 하루라도 더 살아온 내가 전화해서 그간의 일들을 풀려 했다. 그러나 기우였다. 그녀가 내게 꽃바구니 건은 실수였고 그 꽃바구니를 아는 분 병문안에 사용했다고 하면 쉽게 끝날 일이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수화기 타고 귀를 할퀴듯 들리는 말이 "언니 뭣 때문에 그러시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 안 돼요. 딸 결혼식에 부르지도 않고 말까지 아주 냉정하고요"라고 한다.

어처구니가 없어 입이 열리지 않았다. 천 조각이 갈라지듯 날카로운 소음에 골이 흔들거리는 진동이 수화기 잡은 손을 떨리게 했다. 그래도 입술을 물며 참고 전화소릴 들으려 하니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 갔다. 이게 배신이 아니고 무언가. 새롭게 평화로운 교통과 연결을 소망했던 게 공상이었음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오늘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복을 하나님께 허락해 달라고 기도한다. 생활의 어려움을 가식 없이 대화로 풀 수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도록 말이다. 비 온 뒤 무지개가 서듯 오색찬란한 가슴으로 정을 나누고 싶다. 나이를 초월한 친구며 형제 같은 사람이 많다면 어지러운 세상일지라도 서로가 외로워질 때 서로가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진실한 대화를 나눌 사람이 내 이웃으로 친구로 만나진다면 훨훨 날아가는 새처럼 즐거움으로 넘쳐나겠지 싶다.

그녀는 두 자녀와 함께 한국에 돌아가서 생활환경과 두 자녀는 낯선 언어에 잘 적응하고 있는지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할까 궁금해진다.

그녀가 돌아오면 지난 일 묻어두고 멋진 장미 꽃바구니를 선물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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