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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 마당] 삼세번과 단판

이현숙

남편과 또 실랑이를 했다. 진열장 안에 곱게 진열된 운동화가 화근이었다. 지나던 길에 눈길을 확 잡아끄는 운동화를 발견하고는 그 앞에 멈춰서 요리조리 눈길을 재고 있었다. 신고 있는 것이 낡기도 했지만 체중이 늘어 발가락들 끼리 자리다툼을 하는 바람에 새로 장만하려던 참이었다.

남편은 마음에 들면 사란다. 침을 꿀꺽 삼키며 약간의 여운을 늘어트린 어투로 괜찮다고 했다. OK. 그는 돌아선다. 이게 아닌데. 세 번은 물어봐줘야지. 섭섭한 마음에 찬바람을 일으키며 내 걸음이 그를 앞질러 가자 자신은 결백하다는 의미로 어깨를 으쓱 올린다.

물건을 구입하거나 외식을 할 때 대답의 시기를 놓쳐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첫 번째는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라 나의 기쁨과 망설임이 악수를 나눈다. 그는 가능한 여유롭게 대답을 기다린다. 부정이 아니라 미련이 담긴 나의 'No'라는 대답 안에는 탐색전이 한참이고 당연히 'Yes'를 기다린 그는 잠시 의아해한다.

재차 물을 때 나오는 두 번째의 'N~~O'는 생각해 볼 3초의 여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 짧은 시간에 아내로서 나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은행 잔고를 따져본다. 꼭 필요한 것인지 충동구매가 아닌지 옷장이며 집안을 머릿속으로 뒤져본다. 남편은 짜증이 슬쩍 밀려와 입 꼬리가 단단해지고 부리부리한 눈이 좀 더 커진다.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린다. 한번만 더 물어봐줘. 그는 짧지만 지루한 줄다리기를 마치기 위해 인내심의 바닥을 치고 오르는 떨림을 머금은 채 세 번째로 묻는다. 살 거야 말거야? 그의 짙은 눈썹들이 잔뜩 힘이 들어간 채 꿈틀거린다. 이쯤에서 얼른 받아 삼키며 Yes가 등 떠밀린 척 나온다. 얼마나 기다린 세 번째 강요(?) 아닌 청탁인가.

아내가 거절하더라도 세 번씩은 의무적으로 물어 보아야 한다고 남편을 교육시킨다. 4여년의 노력에도 효과가 별로 없다. 여전히 그는 딱 한번 물어보고 망설이면 미련 없이 돌아선다. 잔정이 없다고 불평을 하면 아내를 사랑하는 깊이가 얕은 것이 아니라 비효율적이기에 그렇다고 우긴다. 왜 세 번씩이냐고. 마음에 들면 단번에 사라. 나중에 후회하면 때는 늦는다나. 감정소모라 불필요하단다.

남편은 단판이다. 그러나 애정표현에서는 무한대다. 하루에도 셀 수 없이 사랑한다고 전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 전 남편과 살며 20년 동안 들은 말을 매일 다 채워버리는 참으로 풍요로운 횟수이다. 반면 그이는 한번 결정을 내리면 끝이다. 서구식 전통을 물려받은 외국인이라 그런가 보다. 한번 'Yes No' 결정을 하면 번복을 안 한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 후회하거나 미련을 두지 않기에 스트레스도 받지 않는다. 그 방식은 변덕을 허용하지 않고 매사에 일관성을 준다. 곧추 서 있는 1이라는 숫자가 남편의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싶다.

그가 단판이라면 나는 삼세번이다. 3이란 숫자를 좋아하기 때문일까. 동그라미를 반으로 잘라 살짝 돌려 세운 3의 모양이 정겹다. 막혀 답답해 보이거나 꺾이고 각이 지지 않아서 좋다. 공격을 받아도 둥그런 벽에 스르르 미끄러져 상처받지 않게 만들 모양새가 마음에 든다. 둥글게 살고 싶어서 일까.

세상사 3으로 이루어진 것이 적지 않다. 고전에서 만나는 맹자 엄마도 아들을 위해 세 번 이사를 갔다. 심청이는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간 효녀다. 은혜 갚은 까치도 머리로 종을 세 번 쳐 보은을 했고 삼고초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살고 중매를 잘 하면 술이 석 잔이요 가위 바위 보는 삼세판이다. 권투도 3분이 한 라운드고 야구도 스트라이크 셋이면 아웃이고 노래도 세 박자 뽕짝이 신난다. 만세도 세 번 부르짖는다. 종교적으로도 삼위일체와 삼존불이다. 운명의 신도 인간에게 세 번의 기회를 준다고 하지 않는가.

삼세번은 상황판단이 빠르지 못하고 임기웅변에 약한 내 성격에 딱 맞춤이다. 첫 번째는 실수를 할 수 있지만 반복해서 하다보면 익숙해져 두 번 세 번을 거치면서 요령이 생긴다. 잘못을 해도 바로 잡을 수 있다는 기회가 나를 기다려 준다. 세 번 중에 한번은 되겠지 하는 요행이 그 속에 숨어있다. 그렇다고 한 없이 늘어지는 건 아니다. 세 번까지 가면 나도 미련을 털어버리고 깨끗하게 결과에 승복한다.

삼세번은 꼭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다. 권하는 입장에서 보면 삼세번을 기다려 주는 끈기와 관용을 보여줄 수 있다. 요청하는 쪽에 기회를 부여하는 배려심을 키우기도 한다. 받는 이는 체면도 차리고 사양과 겸손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다. 이유가 이렇게 상호적이니 안 좋아할 수 있는가.

삼세번이라는 말이 비로소 그이를 만나면서 효력을 발휘하는 기분이다. 지극히 이성적이라 한번을 고수하는 그와 지나치게 감성적어서 삼세번 노래 부르는 나.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아무튼 나도 남편과 나와의 숫자 싸움을 세 번은 글로 써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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