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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헤이마의 남자 친구

성민희 / 재미수필문학가협회 회원

친구네 집에서 도우미를 하는 헤이마가 바람이 났다. 스물 두 살 어린 나이에 월급을 모두 미얀마 가족에게로 보내며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기특한 아가씨다. 요즘들어 갓 피어난 복사꽃처럼 얼굴에 생기가 돌아 보기 좋다 했더니 아무도 몰래 사랑을 하고 있었다.

친구는 은근히 걱정이 되어 물었다. "어떤 사람이니?" 대답은 실망스러웠다. 아이가 셋이나 딸린 흑인 이혼남이란다. 같이 살긴 하지만 자식도 동생도 친척도 아닌 생판 남인지라 아무소리 못하고 끙하며 일어났다고 했다.

친구는 둘의 연애를 방해할 방법을 연구했다. 자유롭던 일요일 외출을 저녁 7시 이전 귀가로 규칙을 바꾸었다. 남의 사생활을 간섭할 수 없는 입장에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다. 조기귀가 명령을 내린 며칠 후 앞마당을 빙 두른 울타리 한쪽 기둥이 피카소의 'Embrace' 보다 더 난해한 그림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당연히 헤이마의 외출 제재에 불만을 품었을 흑인 남자친구가 용의자로 지목 되었다.

울타리 기둥은 점점 더 요란해졌다. 남편이 페인트를 사다 부지런히 지웠지만 무언의 협박은 날이 갈수록 노골적이 되었다. 해가 하늘 복판을 슬며시 비껴가는 시간이면 시커먼 시선이 어딘가에서 창을 통해 들여다 보고 있는 것 같아 커튼이 꼭꼭 닫혔는지 몇 번이고 확인을 한다고 했다.

불안에 떨고만 있을 게 아니라 뭔가 조처를 취해야 했다. 아예 헤이마를 내보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그건 더 큰 낭패를 부를지도 모를 일. 낙서로 보복을 하는 수준이라면 만나는 것 자체가 위험이라는 둥 경찰에 리포터를 해야한다는 둥 소식을 들은 친구들이 왁자지껄 머리를 짰다. "우선 낙서하는 현장부터 잡자." CCTV를 설치하기로 했다.

일요일 오후 헤이마가 외출한 틈을 타 재빨리 행동 개시를 했다. 기둥이 잘 내려다 보이는 지붕 한귀퉁이에다 카메라를 달았다. 혹시라도 불쑥 헤이마가 나타날까. 흑인 남자친구가 이 모습을 보지나 않을까. 조마조마하는 마음에 기술자들을 재촉했다. 마치 자신들이 도둑질하는 것 같은 느낌. 등줄기를 훑고가는 서늘한 바람에 친구는 입술이 덜덜 떨리더라 했다. 그날 저녁 헤이마의 초인종 소리에 서로 발로 차서 밀어내는 부부싸움이 이불 속에서 벌어졌다. 헤이마는 영문도 모른 채 밖에 한참 서 있어야 했다.

저녁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비디오 테이프를 돌렸다. 눈치라도 챈걸까. 며칠동안 낙서가 없었다. 범인을 기다리는 마음이 일주일을 넘기면서는 기다림이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어느 듯 두 부부는 제발 오늘은 낙서 좀 하거라 기도하는 마음이라고 했다. 매일 우리들의 아침 문안 인사도 "낙서 했다니?"가 되었다. 친구는 이제 헤이마랑 단 둘이 있는 낮시간도 무섭고 집을 비워두고 나가기는 더욱 불안하다며 하소연을 했다.

드디어 범인이 밝혀졌다는 연락이 왔다. 현장을 직접 와서 보라는 친구의 말에 우루루 몰려갔다. 흥분한 우리들과는 달리 긴 연말 연휴를 끝내고 일상에 복귀한 화면 속의 거리는 차분했다. 햇볕이 마당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메이플나무 가지에 걸린 시각. 책가방을 둘러멘 백인 여중생 둘이 재잘대며 지나간다. 그 꽁지 끝을 물고 멕시칸 남자 중학생 셋이 주춤주춤 울타리 기둥 옆에 섰다. 좌우를 둘러본 후 책가방 속에서 스프레이를 꺼내서는 기둥에다 신나게 쏘아댄다. 마치 테크노 댄스를 추는 것 같다. 킥킥거리는 폼이 여간 재미있는게 아니다.

어이가 없었다. 방금 칼에 잘려진 무우속처럼 머리 속이 싸 했다. 철없는 사춘기 아이들 장난에 다 큰 어른들이 경솔하게 남을 의심하는 죄를 지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커피와 과일을 차려 들어오는 가엾은 헤이마 얼굴을 바로 바라볼 수가 없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았던 그 남자친구 한테는 더욱 미안하다.

흑인이든 이혼남이든 그들도 고귀한 영혼과 육체와 인격과 도덕을 가진 인간인데 우리는 어이없는 편견에 사로잡혀 그 중학생들보다 더 철없는 그림을 우리의 마음 속에 그리고 있었다. 단순하게 뿌려진 울타리 기둥의 스프레이 낙서야 페인트로 지우면 되겠지만 우리들이 그려내고 있는 이 어지러운 그림은 지워도 지워도 계속 될 것만 같다. 살아가며 부딪치는 순간순간 또 어떤 편견에 사로잡혀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까 싶다.

조르바의 말이 생각난다. "내게는 저건 터키놈 저건 불가리놈 이건 그리스놈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요새 와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 저 사람은 나쁜 놈 이런 식입니다. 요새 내게 문제가 되는 건 이것 뿐입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이것도 상관하지 않을 겁니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는 사람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태연해야지 하고 생각해도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때가 되면 뻗어 땅밑에 널빤지처럼 꼿꼿하게 눕고 구더기 밥이 되니까… 불쌍한 것. 우리는 모두 한 형제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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