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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의 맛과 멋] 오래된 맹서(盟誓)

지난 주말에 대학동문회 송년파티가 있었다. 나는 잘 놀게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잘 놀지 못하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그런 파티는 거의 참석하지 않는 편이다. 모처럼 참석한 동문회 파티는 늘 그렇듯이 평소 자주 만나지 못했던 동문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즐거움이 있다.

공식적인 행사 순서가 끝나고 이제 여흥으로 들어갈 즈음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무대 앞 왼쪽에 놓여 있는 키보드에 스포트라이트가 한 줄기 비추었다. 그리고 그 앞에 앉아있던 후배가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파티 며칠 전에 회장이 슬며시 귀띔해준 기억이 났다. 곧 새 삶을 시작하는 후배가 동문회에서 프러포즈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후배의 연주 실력도 그렇고, 내 귀에는 익숙하지 않은 사랑 노래도 그렇고,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았던 장면처럼 남자 주인공의 실력이 수준급이지는 않았다. 후배는 꿋꿋하게 끝까지 노래를 부르더니 연인의 테이블 앞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그가 준비한 사랑의 편지를 읽었다.

워낙 주위가 소란해서 다 기억하지는 못하는데, "이 세상에 오직 하나뿐인 나의 뜨거운 심장으로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란 구절은 귀에 와서 각인되었다. 오렌지 빛 드레스를 우아하게 입은 피앙세는 그와 포옹하며 그의 프러포즈에 응답했다. 동문들이 "뽀뽀해! 뽀뽀해!"를 연창하자 후배는 매우 어색하게 아내 될 사람의 볼에 순간적인 뽀뽀를 했다. 뽀뽀는 정말 멋없었다.

그런데 그 서툴고, 멋있지도 않고, 연출되지 않은 순박한 후배의 프러포즈 하는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사랑의 맹서(盟誓ㆍ맹세의 원말)를 하는 그의 진심이 우리들 가슴에도 울렸고, 동문들 앞에서 사랑의 서약을 한 후배의 순수도 감동스러웠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선배들도 그 후배가 부러운지 웃음을 가득 띠우고 박수로 환호했다. 후배의 뒤늦은 로맨스는 아련한 젊은 시절의 추억들을 끄집어내 주었고, 더 늦기 전에 그런 로맨틱한 사랑을 한 번 해보고 싶다는 엉뚱한 희망까지 품게 해주었다.

후배의 진심이 넘치는 프러포즈는 어느 화려하고 드라마틱한 프러포즈보다도 더 로맨틱하고 감동적이었다. 나는 온 마음을 다해 그들의 새 출발을 축복하고, 그들의 지금의 맹서가 영원하길 혼자서 마음 깊이 기도했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사랑의 맹서를 한 경험이 있다. 온갖 문학과 노래들 거개가 사랑을 테마로 할 만큼 맹서라면 사랑의 맹서가 으뜸이다. 하지만 맹서가 어디 사랑의 맹서뿐이랴. 신에 대한 믿음의 맹서, 국가에 대한 충성의 맹서, 부모에 대한 효도의 맹서, 친구 사이에 우정의 맹서 등등, 의식적이든 아니든 우리가 남발하고 있는 맹서는 그 종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요즘 같은 선거철엔 정치인들의 맹서가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시기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한국에선 연일 후보자들의 맹서 아닌 말, 말, 말들이 지면에 화려하다.

이처럼 많은 맹서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맹서는 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맹서가 아닌가 싶다. 니체는 완전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를 완성하는 자는 희망에 차있고 맹세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를 구가한다"는 표현을 했다.

완전한 삶을 위해선 스승과 벗이 반드시 필요하며 스승인 자연이나 민중, 위대한 인물들로부터 끊임없이 자극을 받고, 도움을 받고,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늘 최선을 다하겠다는 굳은 언약을 그들과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자극과 영감으로 지속적인 학습을 하면 세상을 변화시키는 완전한 삶에 이르게 되며 그런 사람들의 삶은 또 다른 자극이 되어 후대에게 희망이 되고, 그들을 본받으려는 자들의 굳은 언약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이들을 우리는 '초인'이라 부르며 경외하지만, 내가 나와의 그런 맹서들을 성실하게 지켜나갈 때 나 역시 남들을 비춰줄 참된 삶이 될 것이니 얼마나 멋진 맹서인가. 후배의 로맨틱한 사랑의 맹서는 우리가 소홀하던 우리의 오래된 맹서를 상기시켜 주었다.


이영주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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