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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돈의 '사건으로 본 이민생활 24시'] <23> 타협의 조화를 모르는 한국인

명분만 내세워 반쪽짜리 된 합의서

뉴욕주에는 경미한 분쟁사건 등을 법원의 소송절차를 거치지 않고 중재인의 입회 하에 분쟁 당사자 간의 양보를 얻어내고 합의를 시켜서 사건을 해결하게 하는 중재제도가 있다. 맨해튼에 있는 중재재판소에서 있었던 일이다.

40대 한인 여성이 사건 당사자로 나왔다. 이 사람은 한국의 모 대학 음악 조교수로 있다가 이곳 컬럼비아 대학원에 유학 와 있는 피아니스트였다. 사건이란 대학 기숙사에서 같은 방을 쓰는 흑인 학생과 생긴 언쟁이 확대된 사건이었다. 꽤 심한 다툼 후, 양쪽 모두 서로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학교 당국과 경찰에 서로 상대방을 고발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한국인 학생이 부엌에서 음식을 조리하고 있었는데 룸메이트인 흑인 학생이 그 음식 냄새를 견딜 수 없다고 창문을 열고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우는 데서 시작됐다. 한국 학생의 주장은 아무런 양념도 하지 않은 생 감자를 삶은 것인데 무슨 이상한 한국음식을 하는 걸로 지레짐작하고서는 견딜 수 없는 냄새가 난다고 소동을 피우며 인종차별적인 모함을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한국인 학생의 불만은 이 흑인 학생이 거의 매일같이 밤 12시가 넘도록 전화에 매달려 있어 공부에 방해가 될 뿐만 아니라 수면을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몇 번에 걸친 말다툼 끝에 서로가 학교 당국에 불만을 토로해 결국 각자 다른 방으로 갈라지도록 조치됐던 터였다. 그런데도 가끔 엘리베이터 속에서 마주치면 인사는커녕 각자 싫은 소리로 중얼거린 모양인데 흑인 학생이야 영어로 지껄이는 것이니까 이 쪽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한국인 학생은 영어에다 한국말로 중얼거리니까 흑인 학생이 알아들을 수는 없고 그 인상으로 보아 무언가 나쁜 소리를 하는 것으로 짐작, 괴롭히고 성가시게 한다고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학교 당국이나 경찰로서도 이 정도 일을 가지고 입건할 수도 없어 이 사건을 중재소로 보낸 것이다.

양쪽의 불만을 들은 중재인은 합의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앞으로 두 사람은 서로 만나지 않고 대화도 하지 않기로 하며, 둘째 엘리베이터 등 기타 공공장소에서 만나게 돼 부득이 말을 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반드시 영어로만 할 것 등 간단한 것이었다. 첫째 조건은 서로가 원하는 것이어서 즉각 받아들였다. 그런데 둘째 조건에서도 흑인 학생은 당연히 오케이 했으나 한국인 학생은 이를 거절했다.

자신은 그 전에도 한국말로 흑인 학생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도 한국말로 괴롭혔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며, 자신은 언제나 흑인 학생에게는 영어로만 대화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앞으로 영어로만 말하겠다는 합의서에 서명하면 과거에는 한국말로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명분상 서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중재인은 합의서에는 과거에 한국어를 했다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만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본인 마음이지 아무 곳에도 그것을 인정하는 부분은 없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한국인 학생은 전혀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서명을 받는 데는 실패했고 첫째 조건만 써 있는 합의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중재는 끝나고 말았다. 


퀸즈형사법원 한국어통역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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