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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평식 여행칼럼 '미국은 넓다'] 해리 트루먼 박물관 (Harry S Truman Museum)

그의 발자취를 따라 떠나보는 여행

해리 트루먼 박물관(H풍전 등화였던 6.25사변에 한국의 역사를 뒤 바꾸어 놓은 미국의 대통령 그의 이름이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다. 청렴과 강한 직업윤리로 표상되는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1950년 한국전 참전을 명령한 인물이다.

"좌절할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포기한적은 없다".

그가 한말 중에 유명한 것이다. 한국전 때문에 맥아더 장군과 서로 수많은 이견과 갈등을 겪었다. 인천의 자유공원에 가면 남들이 감히 상상할수 없는 상륙작전을 성공하여 그를 기념하는 멕아더의 동상이 서 있다. 만일에 당시 그만한 인물이 없었다면 오늘의 한국이 있었을까? 박물관에는 그와 서로 주고 받았던 편지들도 벽면에 붙어있다.

모든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그를 해임하며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는 말 한디로 한반도는 반 토막이 난 셈이다.



그의 고심도 이해는 간다.

젊은 생명들을 수 만명씩 죽여가며 계속 전쟁을 해야 하는지 고뇌에 찬 그의 사진 앞에 서보니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숙연해 지는 심정을 가눌 수가 없다.

부통령이 된지 82일 만에 당시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가 갑자기 죽자 시어머니한테 제대로 살림 배울 시간도 없이 대통령직을 승계받게 된다.

대통령이 되면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았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일본의 쇼와 일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으며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핵공격 명령을 내린 대통령이다.

그는 어렸을 때 책을 너무 많이 읽어 시력이 나빠졌으며 집안이 어려웠을 때에는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기도 하였다. 결혼후 남자 옷가게를 하였으나 3년도 가지 못해서 망하고 난 뒤 1922년부터 34년까지 판사로 1944년장지는 연방 상원의원 국방위원장까지 했다.

그가 태어난 사주팔자를 몰라 점괘는 말할 수 없지만 외모로 봐도 장사나 사업을 할 사람은 아니고 관공서 팔자로는 승승장구할 관상이다.

옷가게 망한 것이 오히려 전화 위복이 된 셈이다. 1947년 3월 12일 상하 양원 합동 회의에서 "미국의 목적은 한 사람이 독재정치를 하는 공산 제국주의에 대항해 자유 민주주의의 제도와 영토보존을 위해 투쟁하는 세계의 모든 국민을 원조하는 것"이라는 트루먼 독트린 선언하게 된다. 생전에 그는 외동 딸 하나 밖에 없었으며 그후에 외손자 4명을 봤다.

해리 트루먼의 라이브러리& 뮤지엄과 그의 생가는 캔사스시에서는 상징적이면서도 독보적인 명소로 알려져 있다. 두 곳 모두 델라웨어 애비뉴(Delaware Ave)에 위치해 있는데 뮤지움의 입장료는 8달러이며 생가의 입장료는 4달러다.뮤지엄에는 그가 타고 다녔던 승용차와 집기 그리고 그가 소장하고 있던 모든 것이 진열돼 있다. 트루먼 로드와 델라웨어 코너에 있는 생가는 면적이 9000 스퀘어피트나 별채나 2층은 보여 주지 않고 본채 아랫층만 레인저를 따라 관람이 가능하다. 그것도 보전 문제 때문에 카펫 위로만 통행이 가능하다.

길 건너편에는 그의 조카집에도 마치 그의 작은 집무실같이 책상과 전화기 2대가 있는데 모두 다이얼 방식이다.

▶안내 전화: 박물관 (816) 268-8200 생가 (816) 254-9929

▶ 여행 등산 전문가 김평식: (213) 736-9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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