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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움직이는 부드러운 힘…First Lady

미국은 최초의 대통령을 탄생시킨 나라다. 그리고 다양한 영부인의 모델을 만들어낸 나라이기도 하다. 과거의 왕과 왕비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지도자로서 리더십의 표상이다. 비록 나라의 역사는 짧지만, 대통령제의 시작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국정을 내조하는 영부인들의 성과도 매우 컸기 때문에 아내가 없는 대통령은 여태껏 미국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역할이 점점 더 대중의 관심을 받으면서 비록 남편을 따라 백악관에 입성하긴 했지만 국가와 국민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고 있다.

대통령의 아내를 가리키는 '퍼스트 레이디'란 명칭은 미국의 제4대 대통령 부인인 돌리 메디슨 때부터 붙여졌다. 그가 사망한 후부터 존경하는 의미에서 '퍼스트 레이디'란 수식어가 생기게 된 것이다. 미국 역사의 퍼스트 레이디들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전통적 내조형과 외형적 활동형 그리고 스타일의 아이콘이 된 여인들이다. 시대를 풍미하며 세계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그들의 삶을 조명해 본다.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패셔니스트

가장 큰 화제를 몰고 다녔던 퍼스트 레이디를 꼽는다면 단연 '재클린 케네디'일 것이다. 31살이란 젊은 나이로 백악관에 들어왔고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안주인으로서 미국민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었다. 그녀는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대학 때부터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렸고 영부인이 되어서도 수많은 화제를 몰고 다니는 뉴스메이커였다.



재클린은 대통령 취임식에서 자신이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을 만큼 감각이 뛰어났다. 그녀가 만든 '재키 스타일'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새로운 패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케네디와 마릴린 먼로의 염문설로 갓 태어난 아이를 잃게 되고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저격 암살된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이 되면서 재클린의 슬픈 그림자는 전설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다. 국민들은 그가 언제까지나 미망인으로서 케네디의 영부인으로 남아주길 기대했다. 하지만 그는 떠났다. 그리스의 선박왕인 오나시스와의 재혼은 많은 미국인들을 실망시켰고 비난을 감수해야 했지만, 재클린은 이렇게 반문했다. "평생 동안 한 사람만을 가슴 속에 묻고 사는 것은 힘든 일이죠. 여러분은 왜 당신들이 하지 못한 일을 나에게 시키죠?"
재클린을 마치 전시용처럼 데리고 다니며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오나시스 때문에 그는 다시 우울증에 빠져 심한 사치와 낭비를 일삼았다. 오나시스는 이혼 소송 중에 갑자기 사망하게 되고 재클린은 엄청난 위자료를 챙겨 다시 미국으로 돌어온다. 출판업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그였지만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다. 재클린의 삶은 마치 영화와 같다. 그의 우수어린 모습과 우아한 패션 스타일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전설처럼 남아있다.

미셸 오바마는 '검은 재키'라고 불릴 만큼 역시 지성과 뛰어난 패션 감각을 지녔다. 세상은 그가 역대 퍼스트 레이디의 결정체라고 할 만큼 많은 장점을 지녔다고 말한다. 선거 유세가 치열하던 종전까지도 오바마나 롬니보다도 훨씬 높은 지지율을 보였을 정도다. 미셸은 초기 공식석상에서 40달러 정도의 드레스를 입고 나올 정도로 다른 미국 정치인과는 다른 뚜렷한 소신을 보였다.

그는 차별과 어려움을 끝없는 도전으로 넘어선 당당한 여인이었다. 그가 프린스턴에 지원했을 때 모두가 "넌 안돼!"라고 말했지만 그는 "왜 안 되는데?"라고 반문하며 과감하게 역경을 뚫고 나갔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일류 로펌에 들어갔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사회봉사에 뛰어든다. 시카고의 한 로펌에서 멘토와 멘티로 만난 미셸과 오바마는 유일한 흑인이기도 했는데 미셸은 오바마의 연설하는 모습에 큰 매력을 느껴 프로포즈를 받았다고 한다.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에 뛰어들기 전까지는 남편보다도 훨씬 높은 수입을 가졌지만, 선거가 시작되면서 과감히 사직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런 그의 젊고 활기찬 이미지가 큰 힘으로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명 디자이너들의 러브콜을 수없이 받는 미셸의 패션 비결은 '당당함'에 있다. 다소 대범한 스타일의 옷을 과감하게 소화하기 때문에 재키에 버금가는 패션 아이콘으로 부상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백악관 뒤뜰에 온갖 채소를 심어 어린이들과 나눠먹을 정도로 어린이 건강제도에도 큰 관심을 보이며, 가장적으로도 수퍼맘으로 불리는 살뜰한 백악관의 안주인이다.

미트 롬니의 아내인 앤은 고등학교 때 옆 학교의 롬니를 만났다. 그녀도 모르몬교였고 미트 롬니가 스탠퍼드 대학 시절 해외 유학을 권유할 정도였다. 미트는 선교를 나가 있는 도중 앤을 빼앗길까봐 불안해 했다. 그녀는 조용한 내조자이고 전통적인 아내 역할에 충실해 오고 있다. 만일 퍼스트 레이디가 된다면 어떻게 변모할지 모르는 일이지만.

▶정계를 움직인 철의 여인들

미국 최초의 4선 대통령인 루즈벨트. 그의 아내 안나 엘리너 루즈벨트가 없었더라면 과연 그의 4선은 가능했을까? 그렇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안나가 미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다리가 불편한 남편을 위해 4000마일을 다니며 대공황 극복을 위한 뉴딜정책의 진척 상황을 점검하는 억척 퍼스트 레이디였다. 그리고 대통령의 정책도 잘못된 것이 있으면 신문칼럼을 통해 비판할 만큼 대담했다.

안나는 열 살에 고아가 되어 힘들고 가난한 생활을 오랫동안 해야 했다. 그는 돈을 가리켜 '땀과 눈물의 종이조각(engraved paper)'이라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약자의 설움을 절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흑인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백인'이란 호칭을 들을 만큼 인권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소외받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올바른 일에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았기에 그는 최초의 여성인권위원장이 될 수 있었다.

일생을 사회운동을 위해 바쳤던 안나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했다. "내 인생 이야기가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재주없는 한 인간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듯한 어려움을 만났을 때 극복하고야 말겠다는 의지 하나로 어려움과 싸워 결국 이겨냈기 때문이다."

현대판 안나는 단연코 힐러리 클린턴이다. 제42대 대통령인 빌 클린턴의 영부인이자 2008년 민주당의 유력한 대통령 선거후보였다. 비록 오바마에게 간발의 차로 밀려나긴 했지만 현직 국무장관으로서 세계를 누비며 외교·안보계의 철의 여인이 되었다. 남편의 부적절한 외도에 가슴 아파했지만, 사랑과 포용으로 감싸기도 했다.

힐러리는 여성차별적 사회적 인식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는 삶을 살았다. 초등학교 땐 연방항공우주국에 편지를 보내 우주인이 되겠다고 했는데, '여자는 뽑지 않는다'는 회신에 무척 화를 냈다고 한다. 대학을 졸업한 후엔 알래스카를 여행하며 연어공장에서 내장을 제거하는 일을 하며 경비를 충당했고,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해병대 지원이었다. 그러나 여자라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빌 클린턴을 남편으로 맞는 이유에 대해선 "그가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해 큰 화제가 되었다.

딸 첼시는 아빠 대신 엄마가 대통령이 됐더라면 훨씬 훌륭한 지도자가 됐을 거라는 말도 했다. 당차고 탁월한 그의 리더쉽은 그녀의 인간적인 매력이자 퍼스트 레이디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여성상이 되었다.

▶영부인의 초석을 다진 최초의 여인들

최초로 백악관에 입성한 안주인은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의 아내 '애비게일 애덤스'다. 워싱턴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존 애덤스는 성격이 까칠했고, 불안정한 국제 정세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늘 예민했는데 영부인인 에비게일의 내조가 매우 컸다고 한다. 애비게일은 전쟁을 피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 영국파와 프랑스파와의 중재 등 큰 현안 문제에 대해 충실하게 조언하고 국정에 많은 관여를 했다.

그는 미국여성의 권리를 주장한 최초의 여성이기도 한데, 그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남편인 애덤스 대통령과 편지로 부부싸움을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아들에게도 훌륭한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후에 존 퀸시 애덤스는 제6대 대통령이 됐다.

퍼스트 레이디란 이름으로 처음 불린 영부인인 제4대 대통령 제임스 메디슨의 아내인 돌리 메디슨은 남편보다 더 국민의 사랑을 받았을 만큼 넓은 아량과 미모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1812년 신생국인 미국이 영국과 전쟁할 당시 백악관이 불타기 직전 워싱턴의 초상화와 중요 물품을 챙겨 탈출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그때 지켜낸 워싱턴의 초상화는 미국 국립초상화박물관에 영구 보존되어 있다.

돌리는 어디를 가나 사람들에게 환영 받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언젠가 그는 사람을 거느리는 비결이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국민을 거느리는 힘의 비결? 나에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런 것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오직 모든 사람을 사랑할 뿐이지요."

백악관의 안주인들은 남편의 등 뒤에서 역사의 인물로 등장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들었는가, 아니면 그들은 이미 준비된 그릇이었는가. 잘 난 남편을 만나서인가, 내조를 잘해서 남편을 키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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