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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신발

차명숙 에세이포레 수필등단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어렸을 때 설날에 부르던 노래이다. 정월 초하루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새 옷 입고 새 신발 신고 어른들께 세배하며 용돈도 얻었던 기쁜 날이었다. 12월 마지막 날 새 옷과 새 신발을 머리맡에 놓고 자며 몇 번씩 깨어 확인해 보고 흐뭇해하던 기쁨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추억이다.

신발은 우리 발을 보호해 주고 몸 전체의 모양새를 마무리해 준다. 왕족과 귀족들의 신에서부터 새색시가 신던 꽃신이 있는가 하면 민중이 신던 짚신과 고무신이 있고 비가 올 때 신는 나막신도 있다. 지금은 신발 모양도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어 계절과 행사에 따라서 신발을 바꾸어 신어야 할 정도로 신발 문화가 발달했다. 어디 그뿐이랴! 발 미용사도 있다.

50~60년 전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웠던 시절에는 우리 몸에서 발이 제일 등한시되던 부분이었던 것 같다. 옷을 먼저 챙기고 신발은 그 후에 일이었으니 말이다. 지금도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는 옷은 입고 살지만 신발을 신지 못해서 발에 생기는 상처로 온몸에 병균이 감염되어 생명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지구 다른 편에서는 열악한 기후와 식량과 물과 생필품 부족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가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6.25전쟁 후 서울에서 고등학교 유학 시절을 보냈다. 가정 형편이 풍부하여서라기 보다 어머니의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삼 남매가 서울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공부하던 때였다. 언니와 내가 다니던 학교는 미국 선교사가 세운 학교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개성을 존중받으며 교육을 받았다. '청소년 불가' 영화 관람도 슬쩍 눈 감아 주었으니 말이다. 교복이 있었지만 신발은 서울에 있는 많은 여학교 중 유일하게 구두 착용이 허용되었던 학교였다. 운동화의 불편한 점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듯싶다.

그 당시에는 서울에도 구둣방이 몇 안 되었고 아직 기술이 미약하여 신다 보면 늘어나고 또 무겁기도 하여 발이 불편하고 걷는 자태가 예쁘지 않았다. 우리 학교는 우리나라에서 만든 운동화와 구두 그리고 미국제 구두 중 한 가지 상표를 허용하였다. 하지만 미제(Made in U.S.A)이기 때문에 값이 비싸 비교적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이 신고 다녔다. 목 짧은 하얀 양말에 자줏빛 구두가 교복과 어울려 공주와 같이 예뻤다.

여름방학을 맞아 집에 내려갔다. 나는 용기를 내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그 신을 사 달라고 졸랐다. 언니와 나 두 켤레를 사려니 값이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가 궁리하셨는지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구둣방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구두를 맞춰 주셨다. 고이 모셔 놓았다가 개학 후 신나는 마음으로 새 구두를 신고 서울로 올라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다. 차츰차츰 가죽이 늘어나면서 무게까지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신발 중간에 끈이 있었기에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질질 끌어야 했을 것이라 싶었다.

나는 하교할 때는 시간도 많고 교통비도 절약할 겸 정동에서부터 을지로 4가에 있는 나의 하숙집까지 친구와 함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며 걸어 다녔다. 무겁고 큰 구두가 나의 걸음걸이를 칠떡거리게 했다. 혹시라도 남학생이 뒤따라오면서 웃고 있지나 않을지? 얼마나 조심스럽고 자존심이 상했는지 모른다. 구두 뒷굽이 벗겨지지 않도록 발목에 힘을 주고 걸었고 집에 도착하면 기진맥진하였다. 객지 생활에 용돈으로 운동화를 사기도 어려웠고 메이드 제품인 구두를 사려면 다음 방학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방학에 집에 내려가 어머니에게 돈을 받아 다음 학기에는 미제 신발을 샀다. 뛸 듯이 기뻤다. 가볍고 편해서 내 걸음걸이도 사뿐해졌다. 마치 공주가 된 기분이었다. 아마 그때부터 내 공주병이 싹트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나는 신발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신발에 막중한 비중을 두며 경제가 허락하는 한 발에 맞고 모양도 좋은 것을 고르다 보니 이탈리아제 구두를 애용하였다. 아마 30년은 그랬나 보다. 언젠가 남편은 내 구두 수를 세어 보며 '이멜다' 여사를 들먹이기도 했다.

지금은 나이 탓인지 아니면 경제적인 여건 때문인지 나의 마음도 바뀌었다. 신어서 편하면 내 것으로 알고 사 신는다. 교회 바자회에서 1불20센트 준 한국산 '에스콰이어' 신발을 즐겨 신고 다닌 지 오래되었으니 말이다.

신발에 대한 나의 콤플렉스도 치유되었나 보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이런저런 일로 상처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콤플렉스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환경에 현명하게 대처하고 치유도 받아 나도 불편하지 않고 남에게도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하리라. 어릴 때 뛰놀던 설날은 아직 한참이나 멀었는데 아침부터 집 앞 감나무 가지에 까치가 "깍깍" 거리며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오늘 손자가 놀러 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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