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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 튀기는 록키…왕년 복서 서강일씨

"인생은 절박함, 스피드, 맷집 그 사이 어딘가"

순간이다. 그 순간을 놓치면 언제 다시 역전을 허용할 지 모른다. 한 순간의 방심도 허용해서는 안되며 경기내내 긴장해야 한다. 바로 사각의 링에서 펼쳐지는 복싱이 그렇다.

"시합 전부터 KO는 많이 생각하지 않아요. KO만 노리다 보면 오히려 허점이 먼저 드러나게 되거든요. 하지만 일단 기회가 오면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투구를 합니다. 비틀거리는 순간 소나기 펀치를 각오해야 되는 것처럼요."

복서 서강일(73)을 기억하는 복싱팬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김기수나 홍수완처럼 세계챔피언도 아니다. 더군다나 복싱에 대한 관심이 예전과 같이 않은 상황에서는 더 그렇다. 하지만 60년대 복싱팬들이라면 기억속에서 결코 지울 수 없는 선수가 바로 그다. 당시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복서였다.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름을 떨치던 그였다.

1967년 7월 LA올림픽 체육관 특설링에서 펼쳐진 맨도 라모스와의 경기. 당시 맨도 라모스는 17전17KO승으로 승승장구했다. 그는 세계타이틀전을 앞두고 분위기를 띄우고자 상대를 물색 중이었다. 그리고 무명의 한 아시안 복서가 선택됐다. 무명이었다고 하지만 당시 서씨의 전적은 58승6패로 노련미가 넘치는 베테랑이었다. "주변에서 왜 그런 강적과 붙느냐고 뜯어말렸죠. 그런데 그러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손에 땀을 쥐는 경기는 서씨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라모스의 승리로 싱거운 경기를 예상했던 관중은 환호하며 박진감 넘치는 경기를 펼친 두 선수에게 동전을 지폐에 둘둘말아 던졌다. "다 합쳐서 1400달러 정도 됐어요. 라모스랑 반반씩 나눴죠. 그걸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옷을 사입었던 거 같아요."라며 웃었다.

그의 실력은 어릴 적 고난과 세계타이틀 도전의 실패로 다져졌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운동과 싸움으로 쌓은 경험을 복싱으로 승화시킨 셈이다. "평생 싸움만 해봤자 남는 것도 없고 무언가 족적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죠." 막 복싱에 입문할 때 그런 생각이 그를 움직였다고 했다. 하지만 싸움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도 좌절을 겪었다. 1965년 필리핀에서 열린 세계타이틀매치에서다. "평생 가장 기뻤던 순간이 그 경기 직후였어요. 드디어 챔피언이 되는구나 하고…." 그러나 이런 기쁨도 잠시였다. 심판진은 서씨의 2:1 판정패를 선언했다. 당시 관중도 판정 결과에 야유를 던질 정도로 서씨의 일방적인 경기였지만 승리의 여신은 그에게 미소짓지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절망했던 때가 바로 그 때였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그로 하여금 더욱 심기일전하게 만들었고 후에 라모스와의 경기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복싱의 꽃은 KO다. 둘 중 하나가 쓰러지면 관중은 열광한다. 묵은 체증이 한 번에 뚫리는 느낌이다. 서씨는 70번 이상 경기를 가졌다. 그 많은 경기 중 과연 몇 번이나 다운 됐는지 물어봤다.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2번이요." 쓰러지지 않으려면 둘 중 하나다. 맷집이 아주 뛰어나던가 스피드가 좋아서 거의 맞지 않던가. 서씨는 후자 쪽이다. "처음 다운된 게 64년이었어요. 너무 방심했죠. 저는 페더급이었고 상대는 웰터급이었는데 몸무게가 8kg이상 차이가 났어요. 그런데도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그 때까지 승승장구한 나머지 실력을 너무 과신했다고했다. "실망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죠. 그 충격이 일 년동안 사라지지 않더군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던 그에게 그 날 첫 다운은 뇌리에 깊숙이 박힐 수 밖에 없었다. 아마도 이후 그의 선수생활에 반면교사가 됐을 것이다. 반면에 상대를 KO시켰을 때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KO시킨다는 것은 보통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쓰러지는 순간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죠."

갑자기 서씨의 뒷골목 활약상이 궁금해졌다. '야인시대' '무풍지대'에서 처럼 한 시대를 풍미한 주먹에 대한 환상이 있어서일 수도 있겠다. "한창때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점프로 4m는 날아갔어요"라고 운을 뗀 서씨는 "한강 다리밑에서 7명 이태원에서는 5명이랑 맞붙은 적이 있었어요"라고 했다. 싸움꾼끼리 맞붙는다면 일대일도 버거울 수 있을 텐데 5명 7명을 한꺼번에 어떻게 상대할까 궁금했다. "감이죠. 뒤나 옆에서 공격이 들어오면 앞에 있는 놈한테서 읽을 수 있어요. 일단 머리를 숙이고 앞으로 치받은 다음에 뒤에서 오는 공격에 대비해요." 하지만 이것도 동작이 빨라야 가능하다. 일반인이 이렇게 했다가는 자칫 낭패를 볼 수 있다. 몸동작이 재빠른 비결을 다시 물었다. "아마도 어릴 적 아버지와 함께 아침에 한 시간씩 모래사장을 뛰었던 게 큰 도움이 됐던거 같아요"라고 했다.

"의리 빼면 시체죠." 그에게 가장 중요한 철학이다. 어릴 적 고아원 친구들과도 서울에서 같이 지내던 형님 아우들과도 어려울 때 서로 힘과 위로가 돼 주며 난관을 이겨냈다고 한다. "지금도 계속 연락하고 있어요. 수환(홍수환)이와도 얼마 전 통화했고…." 45년 전 시합을 가졌던 라모스와도 계속 연을 이어갔다고 했다. 노년임에도 그다지 쓸쓸해 보이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황혼이다. 어릴 적 가난과의 싸움 사각의 링 위에서의 혈투 그리고 각종 사업을 전전하다 후배가 하던 치킨집을 이어받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언제가 가장 힘들었는지 물었다. "요즘이요. 벌어놓은 건 없고 아이들은 커가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는 노릇도 아니다.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된 그에게 이런 시기는 넘어야할 조금 높은 문턱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한 요즘 '절박함'을 경험하지 못한 젊은 세대가 본받아야할 대목이다.

"죽기 전에 근사한 체육관 하나 건립했으면 좋겠어요." 여전히 복싱이 제일 좋다고 했다. 얼굴에는 인생의 마지막 열정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김병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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