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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노은의 여행- 화려함의 극치, 돌마바흐체 궁전

의식용 홀에 4.5톤 샹들리에
 세계 최고 실크 카펫 깔아 황홀

1843년, 오스만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지만 건재함을 과시하기 위해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12년 뒤 완공된 건축물의 이름은 돌마바흐체 궁전. 돌마는 가득, 바흐체는 정원이란 뜻이다. 프랑스의 바르세이유 궁전을 본 따 지었다고 하는데, 내부는 오히려 바르세이유보다 화려하다. 화려함 때문인가? 입장권도 비싸다.
 마베인-이 휘마윤(Mabeyn-i Humayun)으로 불리는 셀람륵(Selamlik)은 30 터키 리라,
하렘(Harem)은 20 리라. 두 군데를 모두 관람하려면 40 터키 리라를 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외국 관람객 입장 가격이고 내국인은 절반만 내면 된다.
 마베인-이 휘마윤은 남성들의 구역이라는 뜻, 여성들은 들어갈 수 없다. 셀람륵에서 가장 볼 만한 곳은 무아예데(Muayede)라고 하는 의식용 홀이다. 750여개의 가스등이 빛나는 4.5톤 짜리 거대한 샹들리에가 천장에 매달려 있다. 샹들리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거액을 주고 구입했다고 한다.
 보기만 해도 입이 딱 벌어지는 황홀한 상들리에. 프랑스의 오페라 하우스 설계자가 설계했다고 하는 무아예데는 화려함의 극치라 말 할 수 있다. 바닥에는 크고 화려한 헤레케(Hereke) 카펫까지 깔려 있다. 헤레케 카펫은 작은 것도 숙련공 서너명이 5년 정도는열심히 일을 해야 완성할 수 있는 세계최고의 실크 카펫이다. 이곳에서 종교의식이 진행될 때에는 한 겨울에도 따뜻한 공기가 홀을 가득채웠다고 한다. 난방 시스템을 3일 전 부터 작동시켜 열기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홀로 가니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선물한 불곰 가죽이 바닥에 깔려 있다. 거대한 상아로 만든 촛대도 보이고 청동에 동물들의 모양을 세밀하게 조각한 꽃병까지 놓여 있다. 술탄이 정무를 보던 서재에는 많은 책과 함께 모양은 책이지만 안에는 술병과 술잔 등 다른 물건들을 넣을 수 있게 한 비밀책 묶음도 보인다.
 또 다른 방에는 순금으로 만든 찻잔과 수저, 금으로 유리를 감싼 도자기가 진열돼 있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에도 모든 것이 황홀한 것 투성이다. 손잡이 기둥은 정교하게 깍은 크리스탈로 세워져 있고 손잡이는 마호가니로 만들어 졌다. 목욕탕도 예외는 아니어서 천장, 바닥, 벽이 모두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이렇듯 셀람륵은 화려한 40여개의 크고 작은 홀과 285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부 전체가 이렇게 훌륭하니 술탄들이 신궁전을 선호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구궁전(톱카프)과 신궁전을 오가던 술탄들은 결국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셀람륵 투어를 마치고 하렘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렘-이 휘마윤(Harem-I Humayun)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곳은 술탄 가족의 거주 구역이다. 오직 술탄과 그의 가족들, 카리예와 그들을 감시하는 내시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다. 카리예(Cariye)는 하렘에서 일상적인 잡일을 하는 궁녀들을 말한다. 물론 카리예가 술탄의 눈에 들게 되면 지위는 상승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하렘에서 가장 중요한 방은 터키 건국의 아버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사용하던 방이다. 국기로 감싸져 있는 그의 침실은 터키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이스탄불에서는 가장 성스러운 장소다. 오스만 투르크의 말단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 아타튀르크는 갈리폴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스탄불을 침공하던 그리스군을 가차없이 격퇴시킨 터키 최고의 영웅겸 초대 대통령이다. 그는 대통령이 된 후에도 수많은 개혁을 구상하고 몸소 그 개혁을 힘차게 이끌어 나갔다. 남녀평등을 비롯해 여성 참정권은 1930년(지방선거)과 1934년(전국)에 모두 허용할 정도였다. 이것은 한국 1948년, 프랑스 1944년, 스페인 1931년과 비교해 이슬람 국가로는 매우 파격적인 개혁이었다. 또 남성들이 쓰던 화분형의 모자 페즈(Fez)와
여성들이 얼굴을 가리던 베일의 착용도 모두 금했다. 현재의 터키가 이슬람이면서도 관용적인 국가가 된 것은 모두 그의 개혁 덕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해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열심히 일하던 그는 1938년 11월 10일 오전 9시 5분 세상을 떠난다. 술을 많이 마시고 담배를 많이 피웠던 것이 사망의 원인이었다고 한다.
 ‘아타튀르크가 없었다면 터키는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그를 추모하는 터키인들.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그의 동상과 이름은 터키의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다. 돌마바흐체의 있는 모든 시계는 그가 사망한 시간인 9시 5분에 모두 맞춰져 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을 끝으로 터키 여행기를 마칩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음에는 유럽의 보석, 스위스 여행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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