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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1004야~8282 삐삐쳐…'그땐 그랬지' 90년대 추억속 그 물품들

워크맨 지고 CD플레이어 출시
새파란 화면 지지직 'PC통신'
댄스음악 인기타고 DDR 붐


집 치우다 보면 구석구석에서 튀어나오는 추억의 물품들이 있다. 90년대 소품들은 특히 더 많다. '간직할만한' 것들이었기에 그렇다. 90년대는 10대들에게 구매력이 생기고 청소년 취향의 노래와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오며 처음으로 팬덤이 형성되고 케이블 TV의 런칭으로 문화 콘텐츠의 선택권이 다양해지며 한국 대중문화계의 황금기를 맞았던 시대다. 곧 당시의 문화적 취향은 곧 그 무렵 젊은이들의 정체성과 연결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갔던 시기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새로운 통신장비와 기술을 통해 당시 젊은이들의 소통 방식이 변화되며 관계 맺기의 새로운 지형도도 탄생했던 때가 바로 90년대다. 그 시절을 대표하는 소품을 모아봤다.

▶ 삐삐

'전화해'란 말 대신 '삐삐쳐' 혹은 '호출해' 라는 말이 더 흔히 쓰이던 시절이 있었다. 단순히 전화번호를 남기는 호출에서 음성사서함 서비스가 시작되며 삐삐는 젊은이들의 사랑과 낭만을 전달하는 최고의 도구가 돼 줬다. 음성사서함을 들으려는 중고등학생들로 각 학교 쉬는 시간이면 공중전화 앞에 길게 늘어선 학생들의 진풍경도 볼 수 있었다. 음성사서함 비밀번호를 공유하는 것은 연인사이의 필수적인 '구속'과 '신뢰'의 절차가 되기도 했다. 예쁜 인사말 남기기 700 서비스를 통해 음악 선물 남기기 등도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8282(빨리빨리) 1004(천사) 1010245(열렬히 사모) 등의 숫자 암호도 한창 유행이었다. 삐삐와 세트로 전화를 걸 수 만 있는 시티폰 하나만 있다면 부러울게 없는 시절이었다. 이후 PCS의 등장과 함께 삐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 짬뽕 테이프

일명 '길보드 차트'라는 게 있었다. 번화가에 가면 한 골목 건너 리어카에 테이프를 잔뜩 싣고 빵빵하게 음악을 틀어대는 총각들이 쉽사리 눈에 띄었다. 그들의 테이프는 한마디로 '짬뽕 당시 유행하던 곡들을 편집해 한 테이프에 담은 상품이었다. 그들은 절대 한 테이프에 유행곡을 몽땅 담아주는 착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다. 테이프 2~3개에 유행곡을 섞어 담아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고민하다 결국 다 사게 만드는 사악한 상술이 판을 쳤다. 레코드샵에서 파는 정품이 5000원 선이었다면 짬뽕 테이프는 2000원 선. 불티나게 팔려나가는게 당연했다. 이렇게 판매된 짬뽕 테이프가 다시 더블데크와 더빙기술을 이용해 친구들 사이에서 계속 확산된 것은 물론이다. 일찌감치 비즈니스 마인드가 있던 청소년들은 직접 짬뽕 테이프를 만들어 판매하기도 했다.

▶CD 플레이어

90년대 중후반으로 넘어갈수록 '마이마이'와 '아하프리'는 이미 구식이자 고물이 됐다. CD의 시대가 도래했다. CD 플레이어 하나 있으면 그야말로 그시절 부르주아나 다름없었다. 당시 CD플레이어는 거의 국산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소니나 파나소닉 필립스 같은 외제가 대부분이었고 가격대는 15~20만원을 호가했다. CD 한장도 1만원~1만5000원을 오갔으니 워크맨과 테이프 시절보다 학생들 주머니 사정이 안 좋아진건 당연한일. 하지만 CD는 테이프보다 훨씬 좋은 음질을 자랑했고 자유롭게 트랙을 넘길 수도 있었다. 굳이 테이프 구멍에 볼펜을 넣고 돌려대며 감을 필요도 없었고 여러번 반복해 듣는다고 늘어날 걱정을 할 필요도 없었다. CD플레이어도 점점 진화했다. 초기 제품은 조그만 움직여도 CD가 튀어 가만히 두고 듣는 수 밖에 없었지만 기술 진화와 함께 흔들려도 끄덕없는 CD플레이어가 출시돼 큰 인기몰이를 했다.

▶ PC통신

새파란 화면 지직대는 소리와 함께 모뎀으로 연결되던 01431 번호 대화명 대화방 그리고 번개. 90년대 중반 텔넷 하이텔을 시작으로 천리안 나우누리까지 이어진 PC통신의 열풍은 인터넷 열풍보다 앞서 청소년들의 소통을 담당하고 감성을 지배했다. 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채팅을 통해 영화 '접속'과 같은 로맨스가 번져나갔다. '해피엔드' '여인2' 같은 대화명은 물론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재미난 ID 도 여럿 등장했다. 통신 가입자들은 취미나 좋아하는 스타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동호회를 형성해 나갔다. 얼굴도 모르지만 통신으로 만나 사랑에 빠진 누군가가 접속하길 기다리며 수시로 그의 아이디를 쳐보고 번개신청을 고대하던 시절 전화비 많이 나온다고 어머니께 잔소리를 듣거나 밤새도록 통화 중이라 중요한 전화를 놓쳤다는 아버지의 꾸짖음을 듣는 것은 모두의 일상이었을 것이다.

▶DDR

이것은 게임이자 운동이자 춤이자 개인기였다. 일본에서 시작된 댄스 오락 DDR은 흘러나오는 음악과 화살표에 맞춰 정확히 발을 움직이면 점수가 올라가는 게임으로 당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DDR 잘하는 사람이 오락실에 떴다하면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다. DDR 대회 DDR로 하는 다이어트 등도 생겨났을 정도다. DDR의 인기는 댄스음악이 주류가 된 90년대 사회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진 덕이다. TV는 댄스 가수들에게 점령당하고 백댄서를 꿈꾸는 학생들이 늘어났고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과 신천 길거리에는 거리 공연을 하는 청소년들로 넘쳐났다. 모두가 바닥을 질질 끄는 힙합바지에 XXL사이즈 티셔츠 차림이었다. DDR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진 차림으로 DDR위에 올라서는 것은 게임에 대한 모욕이나 마찬가지였다. DDR과 비슷한 펌프와 비트매니아 게임도 이무렵 나와 관심을 끌었다.

이경민 기자 rachel@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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