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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 가작] 혼인 시각차

이상청

복슬이는 거실 구석에 앉아 하얀 털과 대조되는 까만 눈을 깜빡이며 주인을 쳐다 보고 있다. 주인의 안색이 밝지 못해서이다. 여느 때와 같이 안색이 밝았을 때면 그의 품에 안겼을 터다.

거실은 남향 집이어서 해가 잘 들고 높은 곳이어서 태평양 바다가 내려다 보이기도 한다.
병석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의식주 중에서 마음의 안식을 주는 곳이 주거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음식은 초식을 위주로 하고 의복은 간소하게 하되 기거하는 곳은 아늑하고 고즈넉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 집은 그런 그의 의지가 담긴 곳이다. 주변에는 나무들이 많아 공기가 맑고 소음은 들리지 않는다. 들리는 건 새들의 노래 소리다.

이 집이 병석에게는 애환이 서린 곳이다. 원래는 건물이 낡고 거실은 협소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누추해 보였으나 자리가 좋고 주위 경관이 아름다워 사서 개조하리라 마음먹고 산 것이다. 집을 전체 개조하면서 거실을 크게 늘렸다. 재건축하면서 건축업자와 건축비 지불로 인해 분쟁이 발생했고 법정으로까지 비화됐었다.
거실은 복슬의 어미개가 오랫동안 가족과 함께 지내며 온갖 재롱을 부리면서 가족을 따르던 곳이기도 하다. 온식구의 귀여움을 받던 복슬의 어미가 복슬을 낳아주고 죽었을 땐 가족이 슬퍼했다. 세라가 울고, 세영이도, 애들 어머니 숙희도 눈을 붉혔다.

그런 반면 아들 결혼 땐 고국의 친천들과 병석의 친구들이 함께 어울려 술마시고 춤추며 기쁨을 만끽하기도 했다.

이 거실에 딸의 혼사문제로 딸과 부모가 의견이 맞서있는 거다.

"왜 싫다는 게야?"

"···"

"말해봐."

병석은 가슴이 답답하다. 남의 집 자식들은 연애를 해서 결혼을 한다던가 누가 소개를 해서 중매 결혼을 한다던가 결혼을 잘도 하는데 자기 딸은 그도 저도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울적하고 산란한 건 아내 숙희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연줄을 통해 중매를 부탁하고 해서, 사람을 만나게 해주면 만나보고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돌아서버리니 말이다.

"세라야, 너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나?"

말이 없는 딸에게 어머니 숙희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짚이는 데가 있어서다.

말이 없던 세라는 고개를 끄덕인다. 병석과 숙희의 시선이 세라 얼굴로 박힌다.

"누구야? 뭐하는 사람이고 나이는 몇살이야? 왜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어?"

숙희는 세라가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람의 신상에 대해서 물었고 병석은 귀를 기울인다.

"변호사야. 나이는 서른 세 살이고 혼혈 흑인이야."

세라가 부모에게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것은 혼혈 흑인이어서 말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낮은 목소리지만 결기가 스며있다.

혼혈 흑인! 병석은 '이럴 수가 있나'하는 암담한 심정이다.

아들 딸에게 평소 결혼은 한국 사람과 해야 한다고 했고 자녀들도 그렇게 하려니 믿고 있었던 것이다. 아들은 한국 여성과 결혼시켜 며누리로 삼았고 딸도 한국 사람과 결혼해 한국 사람을 사위로 볼 거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그 믿음이 산산조각이 난 거다.

어머니 숙희도 딸이 마음 속에 혼혈 흑인을 두고, 그렇게 여러 곳 좋은 혼처에 선을 보였건만 그 좋은 데를 물리쳐 버린 것이 야속한 것이다.

"엄마, 내가 지금까지 말하지 않았던 건 결심이 서지 않았었기 때문이었어. 아빠 엄마의 당부였고 바람이었기에 한국 사람을 결혼 대상으로 생각하고 학교 다닐 때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을 사귀었어. 야외에 함께 다니기도 하고 식사도 같이 했지. 많은 시간을 대화하면서 그 사람에게 회의가 들기 시작했어."

세라는 지난 일들을 더듬어 보는 듯 시선을 복슬이에게 던진다.

"회의가들기 시작한 건 무었 때문이었나?"

숙희는 딸 세라가 야속하게만 느껴졌는데 저는 저대로 부모의 바람을 이뤄보려고 애
쓴 흔적을 보는 것 같았다.

"말과 행동에 진실성이 보이지 않아서야. 말을 가볍게 함부로 하고··· 한 번은 자원 봉사하는 자리에 나오기로 해놓고서 나오지도 않고, 다음에 만날 때는 엉뚱한 말로 둘러대고 그러더라고.

어느 날 저녁 그와 같이 식사하면서 이제는 그만 만나리라 생각하고 있는데 그런 낌새라도 알아 차린 듯 술을 시키더니 나보고 술을 권하는 거야. 사양했더니 그는 연거푸 자신이 자작하고서는 식당을 나설 때 술냄새를 풍기며 '세라, 저기 호텔에 가서 술 좀 깨었다 가.'라며 같이 가자는 거였어."

세라는 말을 끊고 숨을 고른다.

"그 자식 이름은 뭐야? 뭐하는 놈이야? 나쁜 자식!"

병석은 자신도 모르게 나쁜 자식이라고 말을 내 뱉었다.

"최 철호야. 컴퓨터 회사에 나간다고 했어."

"그러고는?"

병석이 귀추가 궁금한 듯 던진 말이다.

"집으로 가겠다며 돌아설 때 그의 억센 손이 내 손목을 꽉 잡고 끌었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지. 그의 힘센 완력에 나는 힘이 빠지며 한 발자욱씩 한 발자욱씩 끌려갔어.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럽??? 나는 '이 손놔, 이 더러운 놈, 이 손놔.'라며 악을 바락바락 썼어. 그때 한 사람이 철호의 손을 잡고 비틀며 '이 손 놓으시오. 왜 약한 여자를 괴롭히는 거요?'라고 했어. 그의 손은 검은 손이었지. 다음 순간 '당신 누구야? 왜 남의 일에 참견이야?'라며 철호의 주먹이 검은 사람의 얼굴에 일격을 가한 거야. 검은 사람은 얼굴을 살짝 피하며 뒷 팔꿈치로 철호의 등어리를 후려친거지. 철호는 '윽!'하며 앞으로 꼬꾸라져 쓰러지더니 일어나 슬금슬금 어디론가 사라졌어. 나는 그때서야 검은 사람을 보고 놀랐다구. 교회 청년회 모임에서 봤던 김진만이란 사람이었으니까.

김진만, 그의 어머니는 김혜숙이다. 그녀는 S대 영문학과를 나와 주한 미군 부대에 군속으로 근무했다. 그녀의 타이핑 실력은 수준급이어서 영내에서 사무적인 일을 보좌했다. 인사부관 캡틴 짐은 상부의 보고 서류를 혜숙에게 맡기면 깔끔하게 정리해서 올리는 것을 마음에 들어했고 그녀도 그의 인격에 마음이 끌렸다. 그는 말수가 적고 점잖았다. 혜숙은 그가 흑인이지만 인품으로 보아 고등교육을 받았으리라 믿었다. 그는 미남이었다. 캡틴 짐과 혜숙은 주말이면 고궁을 산책하기도 했고 북한산을 오르기도 했다. 캡틴 짐은 혜숙에게 청혼을 했고 그녀는 그 청혼을 수용했다. 둘은 서울 근교 한적한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혜숙이 캡틴 짐의 cjd혼을 수용한 것은 그의 인품이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그녀가 평소에 미국을 동경한 나머지 장차 미국생활을 할 것이라는 소망이 깔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는 중학과정을 거치고 고등학교 에서 이어지는 영어를 배우면서 읽기, 쓰기, 듣기, 말하기에서 듣기에 어려움을 느꼈다. 그녀는 듣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려고 외국영화 보기를 택했다. 숙녀 옷으로 바꿔입고 머리에는 스카프를 둘러쓰고 영화관을 들락거렸다.

혜숙은 아들을 낳았고 아들 이름을 김진만이라고 지었다. 한국식 이름으로 성도 자신의 성을 따고 이름도 자기가 지어 붙였다. 혜숙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은 남편의 도량이 넓고 혜숙을 사랑하는 마음에서다. 그녀가 아들 이름을 지어 부르기 전에 남편에게 의향을 물었을 때 그는 오케이였다.

세라의 기억에 새로운 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흑인인데 말은 한국 사람처럼 잘한다는 거였다. 그날 모임에서 자기 소개 차례였을 때, 로 스쿨에 다닌다고 했고 나이는 세라 자신보다 두 살 위라고 기억했다. 그후 세라는 그 모임에 나가지 않았고 잊고 지냈다. 까맣게 잊었던 그가 그녀의 위급한 때에 나타나 위기를 모면케 해준거다.

그날 진만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세라는 철호에게 끌려가 겁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 일이 있은 후 세라와 진만은 자주 만난다. 그러다 세라가 물었다.

"진만씨는 한국 말을 한국 사람처럼 잘해요?"

처음 그를 봤을 때 그가 한국 말을 유창하게 할 때가 생각나서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한국에서 학교를 다녔으니까요. 집에서도 한국 말만 사용했지요. 아버지도 간단한 한국 말은 어머니에게 배우셨으니까요."

"한글을 읽고 쓰시기에도 불편함이 없으시겠어요."

"지금도 한국 신문을 읽고 한글로 글도 쓰고 한국 드라마도 보지요. 그럼에도 한글을 익히고 한국어를 배웠던 내 어린 시절은 쓰라린 기억으로 남아요.

학교에 가면 주위 또래 아이들은 나를 보고 '검둥이, 검둥이'하고 놀려대며 수군대고 따돌렸어요. 그것이 싫어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했지요. 그럴 때면 어머니는 '사람은 배워야 해'라며 학교에는 꼭 가야 한다고 달랬어요. 그때는 정말 학교 가기 싫었어요. 안 가려는 내게 어머니는 '안중근 의사는 백번 참으라는 백인을 말씀하셨다'며 참고 참아야 한다고 타일렀어요. 어쩌면 어머니는 앞날을 예견이라도 한 듯 수 없이 참고 진정하라고 제 이름을 진만이라고 지었는 지도 모르겠어요."

세라는 진만이 그의 어린 시절을 얘기할 때 눈물을 글썽이는 것을 보고 그가 멸시와 편견의 굴레에서 얼마나 마음 아파했을까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세라는 자신이 심리학을 전공하고 심리상담자로서 진만의 경우처럼 혼혈아의 열등의식의 환경에서 어머니가 자식에게 역경을 극복케하는 가정교육에 관심을 갖는다. 그것은 혼혈아의 열등의식과 헬렌 켈러의 삼중고의 열등의식을 비교하게 된다. 진만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참고 참아 극복하게 한 것은 헬렌 켈러가 그의 스승 설리반의 끈기와 열성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된 것에 비유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세라는 자신의 직업의식으로 가정 교육이 열등의식에 미칠 수 있는 관계를 심리 상담에 적용해 보려는 마음이 들기도 한 거다.

"아버님은 집에서 진만씨 이름을 뭐라고 불러요?"

"아버지는 한국에 관심이 많으셨어요. 세계 유일의 분단 국가이고 무력으로 대치하고 있으니까 웨스트 포인트를 나와 오래지 않아 한국 근무를 자원했나 봅니다. 한국에 근무하시면서 어머니와 결혼하신 것도 한국에 대한 관심의 소산이었는지도 모르죠. 아버지는 늘 어머니를 '숙'하고 부르셨고 저를 '진'이라고 부르셨죠. 어머니는 이름의 끝자를, 저는 이름의 첫자를 부르셨답니다.

펜타곤으로 돌아오셨어도 한반도와 미일중러의 역학구도에 대한 정세분석을 해 의회에 올리느라 잠을 설치기도 하셨지요.

제가 한국 학교에 다니게 된 것도 아버지의 이해심 때문이었지요.

세라씨는 가족이 몇 식구신가요?"

"부모님과 오빠 저 네 식구여요. 아, 복슬이도 우리 식구에 속할까. 오빠는 결혼해 따로 살고 있구요."

세라와 진만은 서로의 가족에 대해서 서슴없이 물어볼 정도로 가까워졌고 격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화창한 날 둘은 교외로 나갔다. 서로 들뜬 마음이었다. 한적한 길을 거닐며 세라의 하얀 손을 진만의 검은 손이 잡는다.

"세라씨, 우리 결혼합시다."

진만이 작정한 듯 꺼낸 말이다. 세라는 선뜻 대답이 없다. 뜸들이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진만씨, 내가 순결을 잃은 여자라면??? 그래도 결혼하겠습니까?"

세라는 철호에게 겪었던 때를 생각하고 진만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듯 물었다.

"세라씨가 피할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 순결을 잃었다면 결혼을 할 것입니다."

진만은 머뭇거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세라는 진만의 사랑을 알게 됐고 이러한 사고의 소유자라면 평생의 반려자로 삼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부모님의 허락을 받기로 해요. 진만씨 부모님을 어떨지 모르지만, 저희 부모님은 반대하실 거예요. 그전부터 세라는 한국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거든요. 부모님의 승낙을 받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해요. 호소하면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진만씨 부모님은 동의하실까요?"

"아버지는 펜타곤으로 돌아오셔서 몇 년을 더 근무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시다 병을 얻어 입원하셨지요. 병원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에게는 아들을 잘 돌봐 다라고 말씀하셨고 제게는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지요. 어머니에게는 서울에서 살 때가 행복했다고 말씀하셨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외로워 하셨어요. 그러다 대학 동문들이 더러 사는 로스 앤젤레스로 왔지요. 어머니는 제게 한국 여성과 결혼하라고 하신답니다. 세라씨와 결혼한다면 좋아하실 거예요. 세라씨 부모님이 반대만 하신다면 어떡하나요?"

"결혼 승낙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전 아버지 어머니가 아집을 내려 놓을 때까지 아집과 투쟁할 거예요."

거실 한쪽에서 까만 눈을 반짜이던 복슬은 잠이 들었나 보다.

병석은 딸 세라가 철호라는 괴한같은 놈의 횡포에서 구해준 혼혈 흑인에 대한 얘기를 듣고 어떤 대책을 세워야 할까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세라야, 네가 나와 네 어머니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한국 사람과 결혼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엉뚱한 위기에 몰렸었구나. 그럴 때 한 혼혈 흑인의 도움으로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을 결혼 대상으로 연계해 결정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마음을 바꿔 한국 사람과 결혼하도록 해."

병석이 아들 딸의 결혼 대상을 동족인 한국 사람과 해야 한다는 인식은 오래 전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었다.

병석의 아버지는 경주에서 많은 농토를 소유해서 머슴을 둘이나 데리고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자식이 성인이 되어 결혼 적령기에 이르렀을 때 여러 지인들에게 아들의 혼처를 수소문해 선을 보이고 결혼을 시켰던 것이다. 그 혼처가 병석의 아내 숙희의 가문이었다. 숙희네 가정은 유교 가정이었고 병석의 아버지가 한학자였듯 숙희의 아버지도 한학자였다. 병석과 숙희의 첫 만남에서 둘은 눈이 맞고 마음이 통했다. 병석과 숙희 사이에 아들 세영과 딸 세라가 태어나고 자랄 무렵 삶의 터전을 옮길 때가 왔다. 병석 내외가 그의 아버지께 떠날 인살 드릴 때 아버지는 아들 며느리에게 아이들이 커서 결혼할 때는 한국 가정의 자녀와 결혼시킬 것을 당부했다. 아버지가 아들, 자부에게 손자 손녀의 동족 혼인을 당부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병석은 그것을 혈통이나 전통이라고 믿었다. 생전의 아버지가 들려주셨던 육성을 되새기며 딸 세라의 마음을 바꾸라고 한 병석의 말에 옆의 숙희도 거듣는다.

"그래, 아빠가 네 마음을 바꾸라고 한 건 네 앞날을 위해서야. 사람이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는 주위의 권고에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해. 아빠의 의견을 따르도록 해라. 네가 마음에 둔 사람과 결혼한다면 둘만 뚝 떨어져 살 수도 없잖아. 인척과 친지들의 시선도 곱지 않을 텐데 그런 점도 고려해야지."

숙희는 딸이 검은 피부의 남자와 결혼해, 혼혈 흑인이 사위가 된다면 지인들의 눈총을 받을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는 마음을 바꾸려 하지 않고 나보고만 그래. 그날 철호 놈에게 끌려 갔던 때의 수치와 굴욕감은 결혼을 앞둔 내게는 잊혀지지 않는 아픈 기억으로 남아 있지. 그 이후 엄마 아빠가 한국 사람을 결혼 상대로 다리를 놔준 사람들 하나하나에게 '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순결을 잃었다 해도 결혼하겠느냐'고 물었어. 내가 만난 그들 중 한 사람도 결혼하겠다는 사람은 없었어. 내가 그런 질문을 했을 때 그들은 나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치부했을지도 몰라. 나의 돌출 질문을 그들은 외면했지만, 김진만은 대답을 주었지. 결혼하겠다고??? 나쁜 사람의 행동에 따른 내 아픈 기억에서 우러난 것이지만 일생을 같이 할 배우자의 인품을 보는데는 적절한 질문이라 생각했거든. 김진만의 말을 듣기 전에는 최종 결심이 서지 않았지만 이제는 달라."

골똘히 생각해 딸의 마음을 바꿔보라고 말했던 병석과 숙희는 딸의 마음을 돌려놓기가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네가 그 사람과 결혼하겠다면 나나 엄마는 반대다. 네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이해한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도 그럴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은 잘못된 사고관이야."

병석은 딸의 결혼 때문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어떤 거리감을 느끼곤 한다.

딸이 이십대 초반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잘도 조잘거렸다. 언젠가는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여자는 나이가 끝에 발음이 시옷, 비읍으로 들릴 때 결혼해야 한대."

"그게 무슨 뜻이야."

병석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들어봐. 스물 셋에서 스물 여섯까지가 시옷이 붙는 나이고 스물 일곱에서 스물 아홉까지가 비읍이 붙는 나이 잖아. 그 나이 안에 결혼하기는 쉽고 그 나이를 넘기면 결혼하기가 쉽지 않대."

"너도 그 나이를 넘기기 전에 결혼하도록 해."

그런 대화를 나눴는 데 이제는 딸이 그 연령대를 넘기고 니은이 붙는 서른을 넘기고 있으니 아버지의 마음도 불편하고 딸의 기분도 뒤틀린 것이다.

병석은 딸이 서른을 넘기면서 변했다고 생각한다. 이십대 같았으면 부모가 마음을 바꾸라면 바꿨을 것으로 믿는 거다.

딸이 변했다고 여기는 것은 그전과 다른 이상한 행동이다. 타고 다니던 승용차가 교통사고로 대파하자 SUV에 승용차 높이의 타이어를 부착하고 다니질 않나 들고 다니던 핸드 백을 날치기 당했다고 커다란 가죽가방을 어깨에 걸치질 않나 자신의 몸을 자신이 방어한다며 태권도장을 들락거리지 않나 코까지 내려오는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걸 보고는 제동을 걸어도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제돈 벌어 제가 쓰는 걸 어쩌지 못한 거다.

병석은 그런 딸의 변화가 결혼 적령기를 넘겨 정신적으로 받는 불안감의 표출이 아닌가 생각했다.

"엄마 아빠가 김진만과 결혼하는 거 반대한다면 나도 한국 사람 선 보라는 거 안 볼거야.

아빠, 엄마. 김진만을 왜 그렇게 이상하게 봐. 김진만은 피부만 검지 사고관은 한국 사람과 같아. 건전한 사고관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 공부 더 해서 법학박사 학위 받아 법학교수가 되겠대. 김진만과의 결혼을 허락해줘. 아빠 엄마 걱정하지 않게 잘 살게."

세라도 배수진을 치는 것이다.

"건전한 사고관을 갖고 한국 말을 잘하고 한국 사람과 같다고 해도 한국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 외모를 보고 피부가 검으면 누가 그 사람을 한국 사람이라고 보겠나. 혈통이 다르지 않아. '피는 못 속인다'는 말이 있지. 가문과도 관계있는 말이란다. 유대인의 민족성이 우수하다는 것은 그들의 대대로 내려오는 혈통이기도 하단다. 좀 더 생각해봐."

병석도 세라만큼이나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벨이 울린다. 복슬이가 자지러게 짖으며 현관으로 달려간다. 복슬이만 뛰어 나갔지 아무도 나가는 사람은 없다.

들어 온 사람은 병석의 여동생 명자다. 병석이 힐끗 쳐다 볼뿐 말이 없다.

명자 그녀는 성격이 활달하고 개방적이다. 잘 웃고 잘 어울리는 친화력이 있어 친구가 많다. 세라가 선을 본 남자들도 그녀가 소개했다.

오빠 내외와 조카가 말없이 앉아있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음인지

"무슨 일이 있어요? 오빠,"

"???"

병석은 언짢은 얼굴에 함구무언이다.

"언니, 다퉜어요?"

"글쎄, 세라가 혼혈 흑인하고 결혼하겠다는 거지 뭐예요!"

숙희는 못 마땅한 볼멘 소리다.

"야, 우리 집안에 이변이 일어나겠네. 지금까지 선을 보고나면 파투가 난 것도 이유가 있었구나. 그것 때문에 이러고 있는 거예요?"

명자는 그것이 뭐 그렇게 심각하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오빠와 내가 반대한다니까 그러면 한국 사람 선을 보지 않겠다고 하잖아요. 부모와 한 번 해보자는 심사가 아니고 뭐겠어요."

숙희는 병석의 불편한 심기에 자기의 토라진 기분을 더해 말한다.

"세라가 결혼하겠다는데 찬성해줘요."

병석의 얼굴은 미간이 뒤집어진 팔자가 되고 세라의 입술은 초승달이된다.

"고모, 고모가 어쩌면 그런 말을 해요? 오빠나 내 성격을 몰라서 그래요?"

숙희의 목소리에는 고모에 대한 야속함이 짙게 배어있다.

"명자, 네 성격대로 말하는 거야. 말을 해도 전후 사정을 살펴보고 난 다음, 해야 할 말인가 하지 말아야 할 말인가 가려해야지."

병석도 좋지 않은 기분이 노출된 거다.

"오빠, 결혼은 세라가 하는 거잖아요. 저들이 서로 좋아하고 결혼하겠다는데 뭐땜에 반대해요. 잘 살든 못 살든 그들에게 맡기고 보내줘요. 전후 사정을 살펴봐도 그러잖아요. 결혼 전에는 부모가 반대냐 찬성 둘 중에 하나고 결혼 후에는 잘 사냐 못 사냐 그 차이 아니겠어요?"

명자도 거리낌이 없는 논리를 편다.

"그만 두자. 명자는 몰라서 하는 소리다. 내 입장이 되었다면 그런 말 못한다."
벨이 두 번째 울린다. 복슬이가 짖으며 뛰쳐 나간다.

"아버지 저희 왔어요. 고모님 오셨군요."

병석의 아들 세영이 내외다. 아들은 병석의 지인의 딸과 혼담이 있었고 혼담이 있은 지 얼마되지 않아 혼인이 성사됐다. 분가해서 살고 있고 한 주일에 한 번씩은 아버지 집에 들른다.

병석은 요즘 딸의 혼사로 마음이 편치 않으면서도 아들을 결혼시킬 때 한국 며느리를 본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고 위안으로 여기고 있다. 며느리도 숙희와 자기에게 잘 해 기쁜 마음이다.

세영 내외도 세라가 김진만과 혼인문제에 부모가 반대하는 것을 알고 있고 부모의 의견을 따르라고 세라에게 몇 번 권고한 적이 있지만 세라가 요지부동인 것을 알고 있다.

세영은 아버지 어머니가 입을 다물고 말이 없는 것을 보고 알아 차린 듯

"아버지 저희들도 세라 결혼 문제를 갖고 의견을 여러 차례 나눴는 데요. 승낙해주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뭐! 너희 마저도 아버지 어머니 맘을 몰라?"

숙희는 차마 아들 내외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는 듯 실망스런 표정이다.

"저희도 아버지 어머니 뜻을 존중하지요. 세라가 저렇게 버티기만 하니 하는 말입니다."

벨이 세 번째 울린다.

"예, 아. 김형, 알겠어요."

"누구예요?"

숙희가 병석에게 물었다.

"김 사장, 묵향에서 저녁을 같이 하자는데…. 명자 더 있다 가고 세영 너희도 놀다 가. 세라는 집에 있을 거지."

병석 내외는 차를 드라이브해 묵향으로 간다.

김 사장. 그는 병석의 동문 선배다. 한 달에 한두 번 만나 친목을 도모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숙희는 김사장 부인과 언니 동생처럼 지내는 사이고 병석이 비즈니스로 어려움이 있을 때는 도움을 받기도 하고 김 사장이 어려울 때가 있으면 병석이 기꺼이 돕기도 한다. 둘의 사이는 형제같은 끈끈한 친분 관계다.

병석 내외가 묵향에 다다르니 김 사장 내외는 막 도착해 있었다.

김 사장이 미리 예약해 두었던 듯 별실로 안내됐고 곧 저녁이 시작되었다.

저녁 상은 술도 같이 나왔다. 병석이 술 좋아하는 것을 김 사장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김 사장은 유병석을 부를 때 유아우라고 부른 다. 우애감을 나타내기 위해거일 게다.

"유아우, 지난 번 따님 혼사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 더니 잘 풀렸나?"
김 사장이 병석에게 술을 권하며 건네는 말이다. 병석이 먼저 털어놓아야 할 말을 그가 먼저 물어 온 것이다.

"풀렸으면 좋겠소만 꼬이기만 한다오. 김 형이 전화 줄 때에도 그 얘기였지만 딸년은 끄떡도 하지 않소. 되레 동생과 아들, 며느리는 딸년 결혼을 허락해주라니 불난 데 부채질이지 뭐유."

병석은 계속 잔을 비우며 김 사장에게 권한다.

숙희와 김 사장 부인은 술 그만하라고 만류하고 김 사장과 병석은 괜찮다며 주거니 받거니 한다. 김 사장 부인과 숙희는 그들대로 소근댄다.

"유아우, 따님 결혼 허락해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는 거여. 오늘 내가 전화한 건 이 얘기할려고 나오라 한 거라구."

김 사장은 말이 술술 나오는 걸로 봐 술기가 오른 거 같고 병석도 술기운이 도는지 눈 주위가 붉어온다.

"아니 김형도 그런 말을! 우리 후배 박 사장 아들 결혼식 때 같이 가지 않았수? 그 박사장 딸이 결혼 일 년만에 파경을 맞고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 않았소? 난 그런 꼴 당하고 싶지 않단 말이요."

병석은 작고 하신 아버지의 당부가 간헐적으로 뇌리에 박히기도 하지만 후배 박 사장의 경우가 뜬금없이 마음 속으로 찾아들기도 하는 것이다.

"이 사람, 유아우. 그 한 사람 그렇다고 다 그러려니 하면 어쩌누. 따님 믿고 청을 들어줘. 그 나이면 보는 눈이 있을 거라구."

김 사장은 진심어린 어조였다. 자기가 처한 것처럼 걱정해주는 게 고맙지만 병석은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는 거다

"모르겠시다. 어찌해야 할지???."

"지난 번 아우님 넋두리 듣고 생각한 거여. 글로벌 시대에 살면서 이조 시대 관념에 잡혀있으면 쓰나. 따님보고 포기하라고 하지 말고 아우님이 발상전환을 하라구."

"알겠시다. 생각해 봐야겠수다."

"아우님은 사위 될 사람 한 번 만나 봤나?"

"아니, 김형도 딸년 결혼을 반대하면서 만나 보는 사람이 어디있소?"

"반대해도 만나 볼 수는 있지. 사람을 보고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병석 내외와 김 사장 내외는 각자 부인이 드라이브하며 귀가 길에 올랐다.

병석은 술 기운이 오르며 기분이 조금은 좋아졌다. 흉금을 터놓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건 정신 건강에도 좋을 거라는 믿음에서다.

숙희가 운전을 하며 병석에게 묻는다.

"숙희 결혼 문제는 가부를 결정해야죠?"

"당신은 어쩔 작정이오? 스탑! 왜 이러는 거요? 멈춰야지 막가. 이러다 사고나는 거요."

적색 신호등인 데 멈추질 않기에 병석이 소리지른 것이다. 숙희는 엉뚱한 생각을 하며 운전을 했던 거다.

"휴! 내가 왜 이러는 지 모르겠네. 세라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난 당신 결정에 따를 게요."

"가요. 신호 바뀌었어. 돌아 가신 아버지가 당부하신 걸 생각하면 반대해야 하는데. 명자도, 애들도 찬성쪽으로 의견을 내 놓는데다 김 사장까지 허용해 주라니 김 사장 의견을 따라야 할까봐. 아버지가 생전에 이런 현실을 보셨으면 세라 결혼에 동의하실거라 믿어."

병석의 마음의 변화는 김 사장의 권고가 결정적인 거였다.

병석의 지나온 삶의 고비마다 어려움이 있을 때는 그의 권고와 위로가 도움을 주었던 거다.

"나도 당신따라 마음을 정하고 나니 편해요. 잘 생각했어요. 아까 김 사장이 사위될 사람을 만나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어떡할 건가요?"

"세라 결혼을 승낙한다면 마나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떡하믄 좋아? 당신 생각은?"
병석은 집에 가면 세라에게 승낙을 해주면서 만나보겠다는 의향을 비치려는 것이다.
"만나보죠. 어차피 만나게 될 거면 바로 만나죠."
숙희도 동의하고 나서는 거다.

병석과 숙희가 집에 돌아오니 세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다녀 오셨어요."

세라가 책을 덮으며 일어선다.

"고모하고 오빠, 언니는 언제 갔냐?"

"엄마, 아빠 나가시고 바로 갔어."

세라는 어려서부터 엄마, 아빠에게 친구한테 말하는 것처럼 말해왔다. 그 습관이 결혼을 앞둔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어찌보면 아빠와 엄마가 딸을 친구처럼 대해왔기 때문일 게다. 병석도 그런 딸을 좋아하는 것이다.

병석은 딸의 결혼문제로 해서 의견이 엇갈리고 대립은 됐지만 아버지와 딸 사이에 나누는 대화에는 변함이 없는 딸의 그런 말을 탓하지 않는다.

병석은 소파에 앉으며 부드럽고 정감깃든 목소리로

"세라야, 나와 엄마는 네 결혼을 승낙하기로 했다."

"뭐! 정말? 엄마, 아빠 고마워. 고마워!"

세라는 기뻐하고 또 기뻐한다.

"세라야, 그 사람 김진만이라고 했나. 한 번 만나 볼까?"

"아빠, 술마셨지? 기분 무지 좋은 가봐. 아빠가 술마시고 기분 억수로 좋을 땐 내게 언제나 선물 사주셨는 데 오늘은 기분이 무지무지 좋은 가봐. 내게 최고의 선물주셨어. 결혼 허락이라는 선물을! 엄마, 미안해. 엄마 아빠가 바라는 한국 사람하고 결혼 못하고 한국 사람이 꺼리는 흑인하고 결혼하게 되는 거. 용서해줘. 그래. 지금 내 가서 김진만하고 올게."

"괜찮아. 너나, 나나, 아빠나 보는 '혼인 시각차'였어. 그 동안 마음 고생이 있었겠구나. 털어버려. 어서 갔다 와."

세라가 나가니 구석에 앉아 있던 복슬이가 소파에 앉아있는 병석의 무릎 위에 얼른 뛰어오른다. 여느 때와 같은 주인의 안색이 밝아진, 기분을 알아 차린 것이다.

수상소감
"한발 한발 내딛으며 걷겠습니다"

제 사촌형 한 분은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유년기에 저의 또래들이 겨울밤 그분의 온돌 방에 모여 들려주는 그 형의 이야기에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청소년기에 이르러서는 소설 읽기에 빠져들었습니다. 듣는 이야기에서 보는 이야기로 바뀐 겁니다.
소설 읽기에는 단편 소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단편 소설은 장편 소설에 비해 플롯이 압축돼 재미가 더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어가 다르고 풍습이 다른 팍팍한 생활 여정에서도 소설 읽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유년기의 이야기 듣기와 청소년기의 소설 읽기가 문학에 관심을 갖게했고 단편 소설을 쓰게 된 것 같습니다.
저는 한 지인에게서 자녀 혼사 때문에 고민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녀의 결혼 적령기를 넘긴 부모에게는 남다른 걱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혼인 대상에 대한 부모와 자녀가 보는 눈은 다르고 다르게 보는 차이에서 소통은 어려워지고 갈등이 초래되는것 같습니다. 그런 혼인의 과정을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작중 인물에 진만의 가정을 설정한 것은 국내에서 반미 시각을 갖는 분들에게 한국을 사랑하는 미국 군인도 있다는 한 면을 보여주려는 것이었습니다.
해마다 모국의 아름다운 민족의 얼이 담긴 우리 문학을 향상 발전시키고자 '중앙 신인문학상'을 주최해주시는 중앙일보와 심사해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숙여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저는 이제 어미소에서 세상에 막 태어난 송아지와 같습니다. 한 발 한 발 뚜벅뚜벅 발을 내 딛는 마음으로 문학의 길을 걷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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