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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마당] 김치단지 깨지던 날

정찬열 / 오렌티 글사랑 회원

한가한 오후 오래된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고등학교 시절에 찍었던 사진을 발견했다. 광주에서 자취를 하던 친구와 함께 찍은 모습이다. 사진을 보다가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 하나가 떠올랐다.

대부분의 자취생들처럼 나도 한 달에 한 번쯤 시골집에 내려가 식량과 반찬거리를 가져왔다. 어머니는 쌀과 보리쌀을 반반씩 섞어버린 다음 포대에 담았다. 전에는 쌀과 보리쌀을 따로 담아서 가져갔는데 자취생들이 쌀을 팔아 주전부리를 바꾸어 먹는다는 소문을 어디선가 들었던 모양이었다.

김치는 옹기그릇에 담아주셨다. 두 달은 넉넉히 먹을 분량이었다. 아버지는 가는 새끼를 꼬아 단지를 동여매주셨다. 그리고 좀 통통한 새끼줄을 골라 식량자루를 메고 갈 멜빵을 만들어 주셨다.

어머니를 도와 밀려있던 농사일을 대충 마무리한 다음 점심을 먹고 나서 집을 나섰다. 식량을 짊어지고 김치단지와 된장그릇은 양손에 들었다. 전깃불도 구경할 수 없고 버스 한 대 들어오지 않던 깡촌이라 20리쯤 되는 길을 영암읍까지 걸어 나왔다. 오뉴월 따가운 햇볕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옷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광주행 완행버스를 탔다. 주말 오후라 자취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올망졸망 짐이 많았다. 운전사 옆자리 엔진 위의 네모난 공간에 김치단지와 식량포대를 올려놓았다. 그곳은 짐을 싣는 곳이었다. 엔진이 달궈지면 따끈따끈해져 추운 날이면 사람들이 앉고 싶어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버스는 출발부터 만원이었다. 그렇지만 길가에서 사람들이 손을 들 때마다 또 태웠다. 가다 서고 가다 서고 손님은 점점 많아져 갔고 내 짐 위로 다른 짐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었지만 차장은 사람을 계속 밀어 넣었다. 문을 닫지 못한 채 차장이 아슬아슬하게 창문에 매달려 가기도 했다. 사람에 짓눌려 숨쉬기가 거북했지만 운전사가 급정거를 하고 사람이 한 번 앞뒤로 쏠리고 나면 숨통이 좀 트이곤 했다.

자갈 깔린 신작로를 따라 버스가 지나가면 바퀴에 치인 자갈이 멀리 튕겨나가곤 했다. 움푹 패인 길을 차가 속력을 내고 지날 때면 버스가 천장 높게 뛰었다. 사람도 짐도 널뛰듯 함께 뛰었다. 그럴 때면 보자기에 싸서 선반에 올려놓은 암탉까지 꼬꼬댁 꼬꼬댁 소리를 질러댔다. "워~매 간 떨어지것네이 쪼깐 천천히 갑시다 잉." 누군가 소리를 질렀지만 운전사는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차 안은 땀 냄새로 가득했다. 에어콘도 없는 시절이라 이런저런 퀴퀴한 냄새도 함께 섞여 비위를 거슬렀다. 어떤 아주머니가 숨 막혀 죽겠다며 문 좀 열라고 해서 창문을 열었는데 버스가 서면 창문을 통해 먼지가 쏟아져 들어왔다. 먼지 때문에 열렸던 창문이 다시 닫혔다.

신작로의 행인들은 버스가 지나면서 만든 먼지를 뒤집어쓰고 먼지 구름이 지나갈 때까지 한참 동안 길가에 몸을 웅크리고 서 있었다. 하얀 두루마기를 입은 갓 쓴 할아버지가 먼지를 피해 저만치 논둑으로 달아나며 손을 휘젓는 모습이 뿌연 차창을 통해 희미하게 보였다.

출발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디선가 김치찌개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했다. 오뉴월 만원버스에 번져가는 김치냄새로 사람들은 코를 막으며 무어라 수근거렸다. 세 시간쯤 걸려 버스는 광주에 도착했다. 상점들이 등을 켜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짐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깨진 김치단지에서 흐른 김칫국물이 자취생들의 쌀자루를 차례로 적셔 범벅이 되어 있었다. 자동차 엔진에 달궈진 짐칸 위에서 모락모락 김이 났다. 맨 밑에 있는 깨진 김치단지가 얼핏 보였다. 운전사가 주인이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다. 여러 명의 남녀 학생들이 서로 얼굴을 쳐다 볼 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짐을 들추고 보니 아니나 다를까 내 김치단지였다.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그냥 놔두고 가버리고 싶은 생각이 불쑥 일었다. 순간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깨진 김치단지를 주섬주섬 주어 담았다. 김치 국물로 범벅이 된 쌀포대 주인들도 말없이 자기 것을 챙겼다.

짐이 많은 아이들은 지게꾼을 불러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집에서 나올 때와 마찬가지로 자취하는 집까지 꽤 먼 길을 식량자루를 짊어지고 걸어서 갔다. 김치냄새 때문에 시내버스를 타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다.

며칠 동안 왜간장에 마가린을 비벼먹거나 멀건 된장국을 끓여 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엌에 들어가 보니 누군가 꽤 많은 김치를 가져다 놓았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이따금 자취생 부엌을 점검(?)해 왔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뿐만 아니라 김치단지 깨진 얘기를 전해들은 친구들이 반찬을 가져와 주어서 그 달은 다른 때보다 더 풍성한 밥상을 차려 먹었다. 누렇게 빛바랜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 가난했지만 훈훈했던 가물가물한 세월 저 편의 추억을 사진 한 장이 조곤조곤 이야기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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