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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는 '경복궁이 살아있다'…고궁의 전통미 살아있는 '마당몰'

왕조의 역사는 길다. 국가의 형태를 갖추면서부터 왕이 존재했고 그가 사는 궁전이 있었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땅과 백성을 호령하던 왕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오직 궁전은 남았다. 중국의 자금성은 주인도 없이 홀로 위풍당당하고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마리 앙뜨와네트의 전설을 간직한 채 공허한 화려함으로 남아있다. 올림픽이 한창인 영국의 버킹검궁엔 아직도 안주인이 살아 그 작은 영토는 온갖 스캔들 속에 상징적인 의미로 남아있다.

그리고 서울의 경복궁. 조선왕조의 초석을 다지던 제1의 궁궐 경복궁엔 깃발 아래 줄지어 선 관광객이 그득하다. 다행이 '나의 문화유적 답사기'를 집필했던 유홍준 교수의 덕택으로 경복궁의 미학을 음미하고자하는 방문객들이 크게 늘었다.

TV 프로그램 '1박2일'의 경복궁 숨은 그림찾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저마다 사진기와 수첩을 들고 궁궐 답사기에 동참하고 있다. 무심히 지나쳤던 고궁의 작은 풍경 속에도 아름다운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는 재미는 또다른 새로움이다.

그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LA에도 있다. 물론 이 거대한 대륙엔 왕도 없었고 궁전도 없다. 그래서 그 옛날 호사를 누리던 화려한 유물은 구경할 길이 없지만 한인타운이 이어지는 윌셔 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모퉁이에 작은 돌짐승들이 마중나온 고풍스런 공간을 만날 수 있다. '마당몰'이다. 우리가 흔히 한국 영화를 보기 위해 들렸던 곳. 영화를 보고나면 소담한 김밥과 마당 떡볶이를 먹고는 훌쩍 가버리는 그 곳. 세심함을 가지고 눈을 돌려보면 서울의 정겨운 '경복궁'이 보인다.

이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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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한 자연 담장 안 '위엄·단아한 자태' 고요했다
='마당' 속 경복궁 숨은 그림=
* 해학의 명물, '해치'와 '천록'


몰에 들어서는 입구에는 야트막한 계단 양쪽으로 동물형상의 돌조각들이 늘어서 있다. 바로 경복궁의 근정전으로 들어서는 길에 있는 12지신상과 신비의 동물들이다. 맨 앞에 익살스럽게 엎드려있는 '해치'를 볼 수 있다. '해치'는 눈매가 부리부리하고 정수리엔 방울이 달려있고 몸은 비늘로 덮여 있는 매우 신령한 영물이다.

스스로 사람의 선악을 구분한다는 신비의 동물상이다. 그 뒤로 거북이, 말, 원숭이, 용 등의 돌짐승들이 줄지어 앉아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12지신상은 대체로 야생성이 살아있는 사실적인 조각들이 많지만, 한국의 조각들은 금방이라도 옆에서 장난칠 것 같은 익살스러움이 배어있어 해학의 미를 한껏 살려준다. 충성스럽게 문을 수호하는 이들 옆으로 높다랗게 뻗은 대나무 숲 아래에는 범상치 않은 동물이 누워있다. 머리에 뿔이 달린 매서운 눈초리의 '천록'이다.

경복궁의 입구인 광화문을 지나 흥인문으로 들어서면 백악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온 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그 위로 영천교가 있고 다리 아래 금천을 지키는 '천록' 4마리가 양쪽에 있다. 그 중 한 마리가 마당몰에 있는 '천록'이고, 혀를 '메롱'하는 모습이 장난끼가 가득하다. 경복궁에 가면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꼭 찾아내는 숨은 그림찾기의 지존이다. 위엄있는 궁궐을 지으면서도 이름모를 석공은 유머와 여유를 조각 속에 새겨넣었다. 그렇게 만든 후에 그도 너털웃음 지었으리라.

* 화마도 놀란다는 '드므' 안의 물

영천교를 지나면 왕이 대신들을 거느리고 호령하던 '근정전'이 나타나지만, 마당몰에는 빵집과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좀 쌩둥맞긴 하지만 그래도 눈을 크게 뜨고 그 안을 살펴보면 야외 테이블 옆으로 커다랗고 둥글고 검은 것이 보인다.

마치 큰 향로같이 생긴 것도 같은데, 바로 근정전 계단 아래에 있는 '드므'이다. 가마솥처럼 생긴 '드므'는 방화수를 담아 두는 통이다. 이 곳에 물을 가득 담아 놓으면 '화마'(불귀신)가 물에 비친 자기 모습에 놀라 달아난다는 주술적인 소박한 바람이 담겨있다.

경복궁은 항상 역사 속에서 화마에 노출되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경복궁을 마주한 관악산이 불에 활활 타는 모습이라는 것. 그래서 경복궁의 구석구석엔 물을 상징하는 그림, 글, 형상, 부적 등이 넘쳐났다고 한다. 경회루의 연못에도 2마리의 청룡을 넣어두었는데, 1997년에 한 마리를 발굴했다. 용은 원래 '물의 신'으로 어민들이 풍어를 위해 용왕님께 제사도 지내고, 또 불을 막아주는 신령스런 동물로도 여겨졌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복궁은 몇 차례에 걸친 화재로 전각을 비롯해 궁녀들의 가제도구도 다 타버리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 안뜰에 빛나는 멋스러움

몰 안을 들어서면 둥근 모양의 '마당'이 펼쳐지고 가운데 끝에 예쁜 항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항아리 안에는 소담스런 꽃들이 가득 피어있고 가운데에는 작은 소나무 한 그루가 푸르르다. 궁중의 후원 담장 너머로 전국 팔도의 항아리들이 저마다의 모양을 뽐내며 정갈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랏님의 수랏상을 준비하는 귀중한 장독대. 그 곳을 '장고지'라 불렀다.

'마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건축물은 궁궐의 축조방식을 닮아있다. 주로 경복궁의 담장이나 굴뚝에서 볼 수 있는 건축양식과 흡사하다. 미색 회분 사이로 켜켜이 얹은 짙은 비둘기색의 가늘고 긴 벽돌들이 고풍스럽고 격조있는 모습을 갖추었다. 웅장한 기둥 위엔 까만 기와를 얹어 고급스런 전통의 미가 스며있다.

그 안에 숨은 그림이 또 하나 있다. 곧게 뻗은 기둥 안에 주황색 틀 속에 고즈넉히 빛나는 조형 그림들이 있다. 그것은 대나무의 형상을 표현하기도 하고 꽃이 만발한 사이로 나비가 날아들기도 한다. 조각 칼로 새겨놓은 그 그림들은 중전마마가 산책을 하던 '아미동산'에 있다.

이 곳은 경회루의 연못을 판 흙을 쌓아 만든 작은 동산인데, 온갖 나무, 꽃과 더불어 보물 811호로 지정된 굴뚝이 있다. 굴뚝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이 석조물에 바로 대나무, 매화, 십장생, 사군자 등의 전통적 문양들을 솜씨있게 새겨넣었다. 굴뚝이라는 생활 속 도구도 예술로 품어안은 여유로움이 멋스럽기 그지없다.

돌아나오는 길에 눈에 환하게 들어서는 커다란 벽화 한 점. 서민의 풍속화를 즐겨 그리던 조선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도'와 마주하게 된다. 늘 책 속에서만 보던 옛 그림이 맛깔스런 색채로 벽을 하나가득 채우니, 화백의 솔직한 호기가 호탕함으로 뚝뚝 묻어난다.

그리고 문으로 다시 향하면 돌짐승들 사이로 합천 청량사에 있는 '사천왕상'과 김유신 묘를 지키는 12지신상을 만나게 된다. '양'의 형상을 비롯한 여러 동물들이 건물의 허리를 감싸듯 배치돼 있다. 비교적 원형 유물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방학을 맞은 아이들에게도 좋은 '한국의 유물' 나들이가 될 듯하다. 유홍준 교수의 경복궁 이야기를 함께 감상한 후 방문하면 숨은 그림을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국의 궁궐은 '자연과의 어울림'이다. 화려함을 자랑하기보다는 고즈넉한 자연을 담장 안에 들였다. 물은 그대로 흘러가게 하고, 아기자기한 조형물들은 해학의 미소가 넘친다. 위엄과 단아한 자태의 조화는 산과 산 사이에 고요히 머문다. 영욕의 치열함은 잠들었지만,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궁궐은 한적한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이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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