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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김동률/서강대 기술경영대학원 교수

할머니가 들고 있는 것은 푸른색 플라스틱 ‘바케쓰’와 낡은 호미 한 자루였다. 호미는 할머니의 나이만큼이나 낡아 보였고, 또 오랜 세월 땀에 전 탓인지 반들거리고 있었다. 공항철도 객실 안, 승객들의 화려함과 출국의 들뜬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남루한 차림의 할머니는 섣불리 동화하지 못한 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런 할머니의 부자유스러움을 덜어줄 의무감이라도 느낀 것일까, 나는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할머니는 지금 인천공항이 있는 영종도 바닷가 어디에 굴 따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굴은 영어 알파벳에 R자가 없는 달(月)엔 먹을 수 없지 않은가. 독성이 가장 강한 하절기에는 먹기 위험하다는 것은 웬만한 사람들은 아는 상식.

그래서 굴을 따서 뭣하시느냐고 궁금해하자 뜻밖에 삶아서 먹는다고 답했다. 독성이 강한 여름철이긴 하지만 그래도 푹 삶아 먹으면 괜찮고, 또 먹고 나면 몸이 한결 든든해진다고 덧붙인다. 하긴 노쇠한 할머니가 딸 수 있는 굴이 제철에는 어디 남아 있겠는가.

공항으로 가는 반 시간 남짓 할머니와 나의 대화는 계속됐다. 남쪽 바닷가 작은 마을이 고향인 할머니의 나이는 올해 여든, 슬하에 2남2녀를 두었다며 아들 내외와 같이 산다고 한다. 동사무소에서 노인에게 지급되는 무료 기차표를 얻어 틈만 나면 공항철도 편으로 영종도에 가서 굴, 홍합 등을 채취하는 게 취미라고 한다. 늙은이 취미생활로는 딱이라는 게 할머니의 설명. 그러나 깊은 주름이 가득한 얼굴과 남루한 옷차림으로 봐서 반드시 취미생활은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고향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에 나와의 대화는 더없이 좋은 분위기에서 이어졌고 어느 정도 진입장벽이 허물어지자 할머니로부터 뜻밖의 얘기가 나왔다. 아들 집에 같이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조그만 방을 하나 얻어 혼자 산다고 했다.

주로 이웃 식당에 가서 설거지해 주고 용돈을 벌어 살고 있다는 것이 할머니의 고백. 그러면서 아들 집에 얹혀살기보다 혼자 사는 것이 백 배 편하다고 애써 강조한다. 그런 할머니의 얼굴에서는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과 서운함이 동시에 배어 나온다.

열차는 공항에 점차 가까워지고 보름간 유럽 출장길에 나선 나는 할머니와의 대화를 계속하면서 이유 없이 조금씩 초조해져 갔다. 주섬주섬 내뱉는 할머니의 말에 담긴 삶의 무게가 점점 물에 젖은 솜이불처럼 무겁게 내게 전해 온다.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다. 할머니가 가장 힘들어하고 있는 것은 혼자만의 삶으로 인한 진한 외로움과 막막함이다. 자식이 있어도 없는 것과 같은, 이른바 무연 사회의 ‘나홀로 삶’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할머니와 같은 처지의 독거 노인이 2000년 55만 명에서 올해 119만 명으로 2.2배 증가했으며 2035년에는 무려 343만 명이나 될 것으로 추산됐다. 1인 가구가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2010년에 이미 24.4%에 이르렀다. 문제는 1~2인 가구의 70%가 60대 이상의 가난한 노인들이라는 것.

숫자는 가족 울타리에 의지하던 과거의 ‘가족 안전망’이 최근 들어 급격히 해체되고, 지금의 풍요를 이룬 어머니 세대의 삶이 급속히 고단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정부가 책임지는 ‘공적인 안전망’이 있긴 하지만 성긴 안전망에 보호받지 못한 가난한 노인들의 삶은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고 있는 것이다.

빠르고 쾌적한 공항철도는 서울역에서 불과 한 시간 못 미쳐 흥분과 기대에 들뜬 여행객들을 인천국제공항에 토해 놓았다. 할머니와 나의 대화도 이제 끝에 다다랐다. 플랫폼에서 헤어지면서 나는 가만히 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할머니 손에 쥐여 드린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시다가 언젠가 공항철도에서 또다시 만나자는 나의 작별인사에 이름도 성도 모르는 할머니의 눈가는 이미 물기가 가득했고, 나 또한 울컥해지는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

방학과 휴가철을 맞아 나라 밖 여행에 공항이 미어터지는 2012년의 여름, 대한민국은 적어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 벨기에 브뤼셀 한 호텔방, 어머니 세대, 어느 가난한 할머니의 야윈 삶에 불편해하며 이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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