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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화·끈기·근성’ 정창화 감독이 말하는 ‘성공의 열쇠’

10회 뉴욕아시안영화제 평생공로상 수상 정창화 감독

미국서 쿵푸열풍 일으킨 ‘글로벌 감독 1호’
“생활에 와 닿는 ‘완득이’ 아주 좋은 작품”

한국 영화의 ‘대부’ 정창화(83) 감독이 뉴욕아시안영화제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미국에 쿵푸 열풍을 일으켰던 한국인 ‘글로벌 감독 1호’의 주인공이다. 수상을 앞둔 지난달 30일, 맨해튼 키타노호텔에서 정 감독을 만났다.

- 소감이 어떠한지.

“평생공로상을 받게 돼 영광스럽네요. 3월에 연락이 왔어요. 평생공로상을 준다 그래서 처음에는 멋쩍었죠. ‘아이 뭐 내가 그걸 받을 일이 있겠느냐’라고 했더니 주최 측에서 꼭 오라고 거듭 말해 시간을 냈지요.”

- ‘죽음의 다섯 손가락’은 당시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는데요.



“상당히 감동을 받았죠. 그런데 역시 영화라는 건 새롭게 도전하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 작품을 만들 때는 신비한 이야기를 끄집어 내고 싶었죠. 한국 감독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중국 감독에 비해 중국 역사의 신비한 면을 많이 볼 수 있었어요. 결국은 제가 신비하게 느꼈던 부분들을 미국이나 유럽 등 외국 감독들과 관객들도 느꼈고 그 부분이 맞아 들어갔어요. 주인공을 캐스팅할 때도 당시엔 ‘핸섬가이(Handsome Guy)’를 흔히 캐스팅하는 분위기였는데 저는 서민적인 얼굴을 택했어요. 관객이 ‘아 내가 바로 주인공 같다’라고 느끼도록. 관객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캐스팅했어요. 같은 무술 영화지만 리얼리티를 중시했기 때문에 그 동안 홍콩 영화가 보여줬던 이야기와는 차별화할 수 있었고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 다음 작품을 위해 시나리오 찾고 있다고 들었는데, 좋은 시나리오는 느낌이 바로 오는지요.

"물론 느낌이 오죠. ‘이건 뭔가가 물건이 될 수 있겠다’라는 생각도 해요. 그런데 저는 작업을 할 때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특유의 도전적인 정신이 있어요. 그 작품을 제가 100% 수용하기보다는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죠. 다른 사람들보다는 사전 작업에 2달~3달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일해요.”

- 감독님 스타일로 만드는 것의 핵심 포인트는 무엇인지.

“건물을 지을 때도 설계도가 중요하잖아요. 설계도가 엉성하면 영화가 나와도 성공을 못하고요. 설계도를 탄탄하고 완벽하게 만드는 게 제 스타일입니다.”

정 감독은 1960~70년대 홍콩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홍콩이 여건도 좋았고 할 수 있는 일들도 많았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영화 작업이 ‘허가제’였다. “허가해줄 테니 오라”는 박정희 정권의 초청을 받곤 한국으로 가서 영화사를 설립하고 후배들과도 함께 작업했다.

1년 반은 괜찮았지만 갑자기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박해’가 시작됐다. 후배들과 함께 제작한 영화 29편이 모두 검열에서 10분~20분씩 난도질을 당했다. 관객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됐다. 당연히 히트작은 없었다. 병원에 혈압으로 쓰러져서 2번 입원했고 홍콩에서 감독 생활하면서 벌은 돈도 거의 바닥났다. 보다 못한 정 감독의 부인은 미국 투자이민을 신청했고 한국을 떠난 정 감독은 다시는 영화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 영화계를 떠나 있었는데.

“돌아보지 않았어요. 너무 많이 박해를 받았기 때문에…. 영화는 아예 안 봤죠. 아내가 드라마나 영화를 빌려와서 보면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영화관도 당연히 안 가고요. 한 10여 년을 그렇게 지냈어요. 그러다가 2003년에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는데 안 한다고 딱 잘라버렸어요. 계속 거절하다 제자 임권택 감독이 저한테 연락을 한 겁니다. ‘감독님이 회고전 안 해주시면 저희들은 뭡니까. 저희들 위해서라도 감독님이 꼭 회고전 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저희가 대를 이어가지 않겠습니까’라고요…. 박해 받았던 것도 나 하나로 그쳐야 하는 이야기다 싶어서 2003년에 회고전을 했죠. 그러고 나서부터 영화와의 관계가 제 자리로 돌아온 거에요. 영화도 다시 보고요.”

- 이후에 본 것 중 기억에 남는 작품은요.

“‘완득이’ 같은 작품이 좋더라고요. 우리 생활에 와 닿는 이야기죠. 젊은이하고 어른 사이의 대화, 다민족에 대해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 참 좋은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오래간만에 좋은 영화가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도 많이 봤는데 너무 많이 봐서…. 일주일에 2~3편은 극장에 나가서 봤거든요. 나중에는 제목도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하하.”

- 다시 팬들과 만남을 시작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는지?

“프랑스에서 있었던 얘긴데요. 파리 시장이 주관하는 파리 인터내셔널 필름 페스티벌에서 회고전을 했는데 ‘죽음의 다섯 손가락’ 상영회 때 1100~1200명 객석이 전부 매진됐어요. 영화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데 제 아내가 와 있는지 모르고 프랑스 여배우가 마이크를 잡더니 “왜 감독님은 그렇게 일찍 은퇴를 하셨습니까? 저는 감독님하고 같이 생활하면서 작품을 하고 싶어요”라고 하는 거에요. 하하. 거기까진 좋았는데, 객석 뒤쪽에 한인 노부부가 “감독님 연세가 어떻게 되셨습니까”라고 묻는데 얼떨결에 제 나이를 말해 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여배우가 “은퇴하실 때도 됐군요”라고 하더라고요. 하하하.”

- 굉장히 젊어 보이시는데. 건강 관리 어떻게 하세요?

“저도 모르겠어요. 모두들 불가사의라고 그래요. 저는 제 나이를 잊어버리고 사니까 그것이 하나의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운동도 매일 아침 하지요. 트래킹을 합니다. 운동은 해야죠. 기본이죠.”

- 한국 영화만이 가진 경쟁력이 있다면요.

“한국인의 근성이에요. 외국 감독들과 작품 하나를 한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그렇지만 10여 년을 한 건 다르죠. 좋은 관계도 있지만 그 속에서 텃새도 있을 거고요. 외로움이라는 것도 있죠. 그것을 이겨내고 오랜 시간 작업했을 땐 한국인의 근성과 끈기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아시아권에서 한국 영화가 정상에 올라가 있는 것도 한국인의 근성이 있기 때문에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 한국 영화 ‘글로벌화’ 테이프를 끊었는데, 앞으로 한국 영화의 방향에 대해 말씀한다면?

“늘 후배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한국 영화 시장은 좁고 앞을 내다보는 게 ‘글로벌’이라고 했죠. 이제 글로벌화 됐잖아요. 새로운 것을 찾아서 도전을 해야 된다는 거죠. 남이 하는 것, 흔히 있는 이야기로 하면 절대 성공을 못 해요. 새로운 것 탐구하고 도전하면 반드시 한국 영화가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주사랑 기자

jsrlee@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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