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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가시 찔리며 욕정 이겨낸 그의 흔적이…

가톨릭서 가장 사랑 받는 성자 프란체스코

가톨릭 수도원의 역사를 훑다보면 두 개의 거대한 봉우리를 만난다. 하나는 성 베네딕도(480~547)이고, 또 하나는 성 프란체스코(1182~1226)다. 베네딕도는 서양 수도원에 주춧돌을 놓았고, 프란체스코는 무소유의 삶으로 수도원에 영적 나침반을 제시했다. 특히 성 프란체스코는 가톨릭 역사를 통틀어 신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성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이탈리아 중부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수도원은 ‘프란체스코’란 이름 하나만으로 세계적인 순례지이자, 여행지가 됐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북쪽으로 3시간 가량 달리면 아시시에 도착한다. 산 중턱에 걸친 마을이 멀리서 봐도 참 아름답다. 이탈리아의 촌락은 주로 산 위에 있다.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삶의 방식이다. 아시시도 그랬다. 야트막한 산의 정상에는 옛날 봉건영주가 살았던 성이 있다. 그리고 아래에는 귀족들이 살았고, 그 아래에는 서민들이 살았다고 한다.

아시시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까만 하늘에 별만 초롱초롱했다. 공기도 무척 맑았다. 이탈리아의 시골 마을에 왔다는 실감이 났다. 800년 전, 프란체스코 성인이 이곳에 살던 때의 풍경과 그리 큰 차이는 없지 싶었다. 아시시의 주택은 오래된 고가(古家)들도 많았다.

아시시 마을 입구의 호텔로 들어갔다. 그런데 호텔 입구에 ‘프란체스코 수도회(작은 형제회)’의 상징인 동상이 서있었다. 알고 보니 예전에는 수도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이었다. 그걸 인수해 호텔로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숙소의 내부 구조는 수도원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이튿날 아침이었다. 밖으로 나갔더니 아시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은 언덕의 왼쪽 끝에 웅장한 규모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이 있었다. 그곳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본산이었다. 프란체스코가 살았을 때에는 그곳이 공동묘지이자 처형장이었다. 다시 말해 아시시에서 가장 추하고, 가장 비참하고, 가장 낮은 공간이었다.

프란체스코는 “내가 죽으면 저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유가 있다. 죽음의 순간까지 예수를 따르고자 했던 거다. 예수도 이스라엘의 공동묘지이자 처형장인 골고타 언덕에서 숨지고, 묻혔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

숙소를 나와 거리를 걸었다. 산 아래 마을에는 커다란 성당이 있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여기에도 프란체스코의 흔적이 녹아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성당 안에 또 성당이 있었다. 거대한 성당 안에 움막처럼 생긴, 낮은 지붕의 조그만 성당이 또 하나 있었다. 그게 프란체스코가 생전에 세웠다는 성당이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효시인 셈이다.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예배당이었지만, 남다른 분위기가 풍겼다. 벽에는 오래된 성화가 그려져 있고, 여기저기 칠이 벗겨져 있었다. 그리고 세계 각국에서 온 수녀들이 무릎을 꿇거나, 자리에 앉아서 묵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800년 전에 살았던 프란체스코를 향해 묻는 것처럼 보였다. ‘예수와 하나가 되려면 어찌해야 합니까? 당신은 그 길을 어떻게 갔습니까’라고 말이다.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당 안의 조그만 정원에는 장미도 있었다. 성당 안내인은 “저 장미에는 가시가 없다”고 말했다. 자세히 쳐다봤다. 아무리 봐도 가시는 보이지 않았다. 안내인이 말을 이었다. “젊었을 때 프란체스코 성인에게 여성에 대한 욕정이 일어났다. 그걸 이겨내기 위해 그는 이 근처에 있는 장미덩굴 위에서 자신의 몸을 굴렸다. 가시가 몸에 찔리고, 피를 흘리고, 고통스러웠을 거다. 그걸 통해 그는 욕정을 극복하고자 했다. 그런데 계속 장미 가시 위에서 뒹굴자 하늘이 장미의 가시를 없앴다고 한다.”

대성당 안에는 프란체스코가 숨을 거둘 때 둘렀던 수도복 허리띠가 유리병 속에 담겨 있다. 당시 이탈리아 사람들은 돈이나 귀중품을 넣은 허리띠를 두르고 다녔다. 프란체스코도 이 허리띠를 둘렀다. 그러나 돈이나 보석을 넣은 것이 아니라 ‘가난’을 넣은 허리띠였다. 이 허리띠에는 세 개의 매듭만 있었다. 청빈과 순결, 순명을 상징하는 매듭이었다.

성 다미아노 성당

성 다미아노 성당 안에는 성 프란체스코의 영적 동반자였던 클라라 수녀의 유해가 있다. 아시시의 높다란 언덕을 올랐다. 무척 오래된 마을이었다. 바닥에는 돌이 깔려 있었다. 길 양옆의 집들도 수백 년 된 흔적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었다. 심지어 프란체스코가 태어났다는 건물도 남아 있었다. 온전한 상태였다. 거기에 성 다미아노 성당이 있었다. 프란체스코 당시에는 반쯤 허물어져 폐허가 된 성당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이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야, 내 집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보이지 않느냐. 가서 그것을 일으켜 세워라.” 처음에 그는 문자 그대로 해석했다. 그래서 벽돌을 가져다 이 성당을 다시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훨씬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중세의 교회는 세속에 찌들어 있었다. 그래서 예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세속의 권력에는 점점 가까워졌다. 예수의 이름을 앞세워 세속의 욕망과 권력을 채우려 했다. 그래서 프란체스코가 내건 ‘가난의 영성’은 교회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닌다.

성 다미아노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거기에는 프란체스코의 영적인 동반자였던 클라라 수녀의 유해가 있었다. 아시시의 귀족 집안 출신인 클라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뿌리치고 프란체스코를 따랐다. 11살 아래였던 클라라 수녀는 프란체스코에겐 친구이자, 누이이자, 함께 영성의 길을 가는 동반자이기도 했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 프란체스코는 아시시의 처형장이었던 이곳에 자신을 묻어달라고 했다. 그가 묻힌 뒤 ‘죽음의 언덕`에서 ‘낙원의 언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언덕길을 올라서 서쪽 끝으로 갔다. 그곳에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이 있었다. 실은 ‘프란체스코가 죽은 곳’이다. 그 위에 성당을 세운 거다. 이스라엘의 골고타 언덕도 마찬가지다. 예수의 무덤 위에 성당을 세웠다. 로마에 있는 베드로 대성당도 그렇다.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대성당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이곳의 의미가 더욱 각별하다.

프란체스코 성인의 유해를 훔쳐 가려는 도굴 시도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석관에 유해를 담고, 도굴방지책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게 지금까지 성인의 유해가 도굴되지 않고 남아있는 이유라고 한다.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 규모는 굉장했다. 프란체스코에 관한 책에서 봤던 그림들이 벽마다 가득했다. 지하 예배당으로 갔다. 그곳에 프란체스코 성인의 유해가 담긴 석관이 있었다.

프란체스코 당시 성서는 라틴어로만 읽혔다. 라틴어는 귀족이나 교육받은 이들이 쓰는 언어였다. 서민들이 책을 읽는다는 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게다가 성서는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종교개혁에 처음 불을 지폈던 독일의 루터도 그걸 넘어서고자 했다. 그래서 루터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해 널리 퍼뜨렸다. 루터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살았던 프란체스코도 그런 생각을 했다. 라틴어로만 읽히는 성서에 반기를 들었다. 그래서 아시시 지방의 방언으로 그는 ‘평화의 기도’라는 찬미가를 지었다.

프란체스코는 44세에 숨을 거두었다. 죽기 2년 전에 그는 동굴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몸에 오상(五傷)이 나타났다고 한다. 오상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의 몸에 난 다섯 상처다. 두 손과 두 발, 그리고 창으로 찔렀던 옆구리의 상처를 말한다. 프란체스코 성인은 이탈리아의 수호 성인이다. 무소유의 정신으로 가난한 이들을 헌신적으로 돌봤던 그의 수도회는 중세 신분사회를 크게 흔들어 놓기도 했다.

예배당에서 바깥으로 나왔다. 널따란 공간이 있었다. 안내인은 “여기가 옛날에 아시시의 처형장이었다”고 말했다. 그곳에 섰다. 예루살렘의 골고타 언덕이 떠올랐다. 그랬다. 그곳은 죽음의 장소가 아니었다.

프란체스코 당시에 아시시 사람들은 이 언덕을 ‘죽음의 언덕’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프란체스코가 이곳에 묻힌 뒤에는 ‘낙원의 언덕’으로 바꿔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아시시 사람들은 그곳을 ‘낙원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죽음을 낙원으로 바꾼 힘, 그게 프란체스코의 영성에 담겨 있다.

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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