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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 넘쳤던 '팝의 황제'…그의 웃음소리가 그립다"

전기 작가 J. 랜디 타라보렐리가 전하는 마이클 잭슨

"마이클 잭슨을 이해하는 것은 전기 작동법을 이해하는 것보다도 어렵다."

마이클 잭슨. 오늘(25일)이 그의 사망 3주기다. 잭슨의 전기 'The Magic and the Madness(마법과 광기)' 작가 J. 랜디 타라보렐리(56)는 13살 때 다이애나 로스의 소개로 두 살 어린 잭슨을 처음 만났다. 당시 그는 로스 팬클럽의 회장이었다. 잭슨이 사망하기 2년 전까지 약 40년 동안 잭슨과 수 백여 차례의 인터뷰를 가진 타라보렐리. 그가 본 잭슨이 궁금했다. 엔시노=글 원용석 기자 사진 백종춘 기자


완벽함 추구 성격에 계속 성형
아동 성추행 사건으로 큰 충격
한국공연 무산…가족불신 커져
내면 세계 있는 그대로 노래해
난이도 높아 흉내내기 힘들어
인간적인 면 부각…사후 평판 ↑



-잭슨의 말년 얘기부터 듣고 싶다.

"(그의 저택이었던) 네버랜드 고용인들에게 월급을 지불하지 않은 모습에 크게 실망했었다. 하지만 내가 너무 비판적이었다. 아동 성추행 사건 이후 그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다. 마이클은 이후 여성 심리치료사를 대동하며 꾸준히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잭슨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는 점을 소개해 달라.

"유머가 넘쳤다.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게 안타깝다."

-잭슨은 1983년에 최고의 스타였다. 성형수술로 얼굴을 계속 바꾼 이유를 모르겠다.

"마이클의 머릿속을 이해하는 것은 힘들다. 완벽함을 추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조 잭슨)가 싫어서 그와 닮은 부분을 모조리 없애려 했다는 말도 있지만 내가 볼 때는 그냥 더 어필할 수 있는 외모를 원했다. 마음대로 얼굴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기뻐했으니까. 마이클은 성형을 하나의 '힘'으로 생각했다. 또 성형은 중독성이 있다."

-'천재는 괴짜.' 잭슨은 이 말을 믿었나.

"모두 마이클의 언론 플레이에서 시작됐다. '150살까지 살기 위해 산소탱크에서 잔다' 등 황당무계한 스토리들은 마이클이 다 지어낸 얘기였다. '천재' 소리를 듣고 싶어서는 아니라고 본다. 그 자신이 유명세에 비해 실제로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흥미로운 캐릭터로 만들고자 이런 얘기를 언론에 흘린 것이다. 엄청난 계산 착오였다. 나중에는 언론이 스토리를 더욱 가공해 나갔고 사람들은 '마이클이 미쳤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마이클도 이 부분을 굉장히 후회했다."

-책에서 통일교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는데.

"1989년 쯤이었다. 통일교에서 최규선 씨를 시켜 마이클의 한국 공연을 추진했다. 최 씨는 '마이클 잭슨'이라는 말만 들어도 환장한 엄청난 팬이었다(웃음). 여하튼 이 일로 마이클의 부모가 직접 한국에 가서 통일교 관계자들과도 만났다. 그 쪽에서 애국가와 가요도 3곡 불러달라고 했다. 하지만 마이클은 형제들과 한국 공연을 극구 꺼려했다. 그때부터 통일교의 선물공세가 이어졌다. 마이클의 보디가드 빌 브레이가 특별한 이유 없이 50만달러를 받았으니까. 하다못해 브레이의 여자친구도 벤츠를 선물로 받았다."

-결국 마이클이 한국 공연 제안을 수락했는데.

"최 씨가 마이클에게 전화로 '제발 한국으로 와라. 안 그러면 난 자살할 것'이라며 울면서 간곡히 부탁했다. 어머니의 뜻도 있고 해서 마이클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마이클도 롤스 로이스 동상 등 많은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나중에 통일교 문선명 교주가 돈이 너무 많이 지출된 것에 화가 나서인지 마이클의 출연료를 계속 깎아 소송이 이어지게 됐다."

-최 씨가 나중에 잭슨과 만났나?

"소울 트레인 시상식 때 만난 뒤 최 씨가 곧바로 무릎을 꿇고 마이클의 손에 키스를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당신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은 성자입니다'고 했다. 일본에서는 공연하는데 왜 한국에서는 안 하냐고도 했다."

-만약에 공연이 일정대로 됐다면 언제쯤 열릴 예정이었나.

"1989년 8월이었다. 하지만 4곡만 부르고 나머지는 형제들 공연으로 메우는 식이었다. 마이클이 가족에 대한 불신이 커진 것도 이 일이 결정적이었다."

-잭슨이 사망한 뒤 그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으로 바뀌고 있는데.

"영화 'This Is It'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마이클의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켰다. 그의 재단에서 '마이클 잭슨' 브랜드를 잘 관리하고 있어 다행이다."

-그의 음악이 남긴 업적은.

"'Thriller'나 'Black or white' 뮤직 비디오가 데뷔했을 때 그것은 하나의 커다란 이벤트였다. 시대를 앞서갔다. 그리고 종전과 다른 음악 세계를 보여줬다. 그의 노래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한다. 그만큼 난이도가 높다. 휘트니 휴스턴 노래는 여러 아티스트들이 곧잘 부르지 않는가. 멋있어 보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른 아티스트와 가장 큰 차이점이다. 내면세계를 있는 그대로 가공없이 노래로 표현했다.

-잭슨과 어느 정도로 친했나.

"절친이란 말은 하지 못한다. 과거에 정말 친할 때도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때는 그냥 기자로서 나를 대했다. 언론인 가운데서는 나를 가장 믿었다. 그에 대한 세인의 평가가 부정적으로 돌아섰을 때 내 조언을 구했다. 조디 챈들러 사건 때는 자주 통화했다. 마이클이 정말 힘들어했다. '왜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냐'고도 물었다.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을 때 일화가 있다. 당시 그의 결혼에 대해 '웃기는 일'이라고 한 음악잡지에 썼는데 그걸 보고 마이클이 내게 불같이 화를 냈다. 남의 성스런 결혼을 어떻게 그런 식으로 표현할 수 있느냐고 따졌다. 내가 정중하게 사과했다."

-그와 가장 즐거운 추억은.

"그의 헤이븐허스트 집에서 함께 농구했을 때. 그리고 네버랜드에 초대 받았을 때가 떠오른다. 그리고 70년대 중반 뮤지컬 영화 '위즈' 촬영을 위해 뉴욕으로 갔을 때 그의 희망찬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지금은 무엇보다 그의 웃음소리가 가장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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