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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엽 기자의 귀연일기] 푸르른 날, 텃밭 작물에 물 줄 때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

지천명이 넘은 나이라지만 시골 생활을 기준으로 한다면 나는 두 살배기도 아니다. 지난해 9월에 귀국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아직 돌도 채 안 된 셈이다. 온 산과 들이 푸르른 요즘 어린 아기처럼 나는 그 푸르름을 온 몸으로 새롭게 느낀다.

그 가운데 먹을 거리 얘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마당 앞 텃밭은 녹색이 주종인 청과물 가게나 다름없다. 종류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지만 싱싱한 채소들이 저마다 푸르름을 뽐내며 자라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 흐뭇하다. 깻잎 상추 케일 토마토 오이 등은 열흘도 더 전부터 아침 저녁으로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꽃이 핀지 꽤 되는 가지와 고추들도 머지 않아 밥상에 자리를 잡을 것이다.

나는 "농약 절대 불가"를 외치고 아버지는 "농약 없이는 농사 못 짓는다"며 불편한 대립을 계속하고 있지만 어찌됐든 내 손으로 심고 가꾸어 먹는 채소 맛은 남다르다. 맛있게 먹어주는 것은 내 입 속에서 최후를 맞는 채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수도 있겠다.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기 시작하는 늦은 오후면 거의 매일 빠짐없이 밭으로 달려가는데 다름 아닌 물을 주기 위해서이다. 지난 수개월 동안 비다운 비는 구경하지 못한 탓에 논 밭 할 것 없이 요즘 가뭄이 아주 심각한 상황이다.

다행이 밭 가장 자리에 2개의 샘을 확보해 놓았기 때문에 다른 집에 비해 물 걱정은 없는 편이지만 한 낮의 더위와 씨름하는 작물들을 보면 마음이 타 들어가는 기분이다. 저녁 때는 텃밭에 심어진 예의 채소들에 더해 감자 고구마 옥수수 토란 생강 강황 마늘 참깨에도 물을 준다.

뒷산을 타고 오르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물을 줄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팔자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어머니와 아이 엄마 앞에서 지금껏 몇 차례나 "내가 태어나서 세상에 무슨 좋은 일을 했다고 이런 복을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것도 작물들에 물을 줄 때이다.

눈은 말할 것도 없고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녹음을 감상하며 한가롭게 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은 내겐 특권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180도 다른 아버지는 "농사는 지긋지긋하다"고 틈 나는 대로 불만을 토로하지만 내겐 올해와 같은 정도의 농사라면 축복 그 자체이다.

해가 길어지고 여름이 성큼 다가오면서 막노동은 상대적으로 기온이 낮은 오전에 주로 해치우는 편이다. 오전 5시부터 대략 낮 12시까지 일하고 어쩌다가는 오후 6시부터 8시까지 해거름에 보충적으로 막노동을 할 때도 있다. 요즘은 헛간 공사를 일단 끝내고 원두막을 짓기에 바쁜데 즐거워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상시 퉁퉁 부어 오른 상태의 오른 손가락 마디마디들이 일을 다소 버겁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막노동을 끝내고 해질녘에 물 주기는 그래서 더욱 누워서 떡 먹기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물은 보통 2시간~3시간 정도 주는데 그 물을 받아 먹는 채소들은 하루가 다르게 눈에 띌 정도로 키가 크고 녹색이 더 진해지는 것 같다. 가뭄을 미쳐 이겨내지 못하고 일부 말라 죽은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만하면 잘 자라주는 것이라고 치부하는 편이다.

돈으로 치면 1달러 가치도 없겠지만 엊그제는 우리 집을 찾은 친구에게 상추를 1봉지 싸 주기도 했다. 한 달 이내로 수확하게 될 감자와 이제 뿌리를 막 내리기 시작한 고구마는 상당히 넉넉하게 심었으므로 이 곳 이스트밸리를 찾는 친지와 친구들에 대한 방문 기념 선물 역할을 톡톡히 해낼 것이다. 호주머니의 현금은 서서히 말라가고 있지만 밭이며 산이며 들의 푸르름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평화롭고 풍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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