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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인생] 인생은 가야금 유희자씨

絃의 노래는 삶을 휘감아 돌며 흘렀다

가야금 12줄이 대신한 내 마음의 소리. 둥기당기 휘모리장단에 맞춰 널을 뛰다가 낭창거리는 여음 속에 맥을 추스른다. 현과 현 손끝과 손끝 사이에 채워 넣는다. 말로 꺼내지 않은 울림이 공기 중에 퍼져나간다. 울림이 가슴을 울린다.

#. 저리다

말씨가 소녀 같다. 눈꼬리 입가에 걸린 주름이 웃음의 흔적 같아 슬픔이나 위기란 단어를 선뜻 꺼내기 힘든 얼굴이다. 꺾는 음이 따갑게 귓가를 때린다. "이 세상에 힘든 일 없고 슬퍼본 적 없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미 예전 일이 됐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유희자(62)씨에겐 아직도 저릿한 기억이다.

"영원히 함께할 거라 생각했어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서 그런지 유독 엄마를 따랐고요. 벌써 16년이나 지났네요. 저기 벽 쪽에 서있는 가야금 네 대 있죠? 제가 유학할 때 가야금은 제일 좋은 걸로 써야한다며 엄마가 한국에서부터 싣고 오신 거예요. 힘들게 왜 그러셨는지…."



어머니를 잃은 후 유씨는 23년 동안 접었던 가야금을 다시 잡았다. 우연히 장식으로 세워둔 가야금에 손가락이 걸린 게 계기였다. 스친 자리엔 그리운 가락이 남아있었다. 근 1년간 누워있던 그를 깨우는 맑은소리였다. 가슴이 조금 놓였다.

"처음엔 중이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나중엔 일어서기만 해도 어지러웠어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엄마마저 그렇게 되니까 숟가락 잡을 힘도 없더라고요. 만사가 귀찮고 슬프고 괴롭고…. 가슴이 저리다는 뜻을 그때 제대로 이해했죠. 가야금 없었으면 아마 지금도 누워있을 거예요."

가야금은 위로였고 친구였다. 손가락 사이에 현을 끼워넣으며 오랜 친구의 손을 잡았다. 노는 건지 진지한 건지 모를 만큼 가야금 산조에 의지했다. "가야금 소리는요. 손끝에 굳은살이 배길수록 깊은 소리가 나요. 찢어져 핏방울 맺혀 본 손가락이 더 세게 줄을 당기고 맛깔나게 흔들거든요." 인생도 마찬가지다.

#. 떨리다

한 음을 쪼개고 쪼개 자지러지듯 연결된다. 팝(POP)같은 아리랑이다. 다소곳이 말아올린 머리부터 앞뒤로 흔들리는 어깨까지 어디 하나 흥겹지 않은 것이 없다. 뭉친 근육을 풀어주듯 현을 누르고 꼬집는다. "다른 악기로는 이 은은한 떨림이 안나요. 늘어질수록 여리여리한 음. 손끝의 강약으로 천의 소리를 표현할 수 있어요."

시작은 평범했다. 예술만큼 사람의 마음을 이어주는 건 없다는 아버지의 지속적인 권유에 밀려 가야금을 잡았다. 17살 때까지 고전무용을 해 온 그에게 국악은 낯설지도 않고 새롭지도 않은 가락이었다. "그냥 싫더라고요. 어느 정도 들어봤다는 오만함도 있었고 매일같이 터지는 손가락도 보기 싫고…. 아마 제일 싫었던 건 어릴 때부터 가야금을 익힌 다른 동기들과 달리 기본이 없었다는 거였겠죠. 대학 들어갈 때 실기 꼴찌로 들어갔어요. 손가락 순서 익히는 데 바빠서(웃음)."

가야금은 떨림을 지었다. 구성진 음과 엇나가는 박자에 머리보단 몸이 먼저 반응했다. 흥에 매료된 유씨는 눈 밑에 핏줄이 설 때까지 떨림을 이었다. "72년 작곡 전공으로 유학왔는데 제가 영어를 잘했겠어요? 누군가 '하이(Hi)'만 해도 무서워서 피해다녔어요(웃음). 가야금 농현(弄絃) 한 번 보여주고 특별대우 많이 받았죠. 신비로운 음색이라고. 가야금 없었으면 어땠을지 지금도 아찔하네요."

심장이 손끝에 달렸나보다. 소리보다 큰 떨림에 마음이 간다.

"사실 기교 같은 건 잘 몰라요. 진심을 담으면 가야금 소리가 깊어진다는 것만 알 뿐이에요.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 울리다

"그땐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꽹과리 없으면 냄비뚜껑으로 대신하고 공연 출연료로 25달러 받으면 하루종일 좋아서 펄쩍펄쩍 뛰어다니고(웃음)…. 열정이 있었죠. 무대의 크기 같은 건 상관없고 보이지도 않고."

작은 스튜디오 벽면이 그의 기억들로 꽉 채워져 있다. 가야금이 만든 인연이다. 대금 콘체르토 플루트.가야금 산조처럼 새로운 곡을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억지로 시작했던 가야금을 용케 기억해낸 것도 마음을 울리는 어울림에서 나왔다.

"부끄러울 때도 있어요. 실력보단 운이 따랐죠. 한참 국악이 인정받을 때쯤 가야금을 배웠고 제가 내는 울림을 인정해주는 사람들도 만났고요. 가야금 타는 고사리 손을 보며 '아 나도 그랬지'라고 할 수 있는 지금이 너무 행복해요. 아버지께 너무 감사하죠. 그때 불문과 못 가게 막아주셔서(웃음). 아무리 작은 울림이라도 한국이고 제 뿌리잖아요."

가야금 산조를 본 첫 느낌은 현란함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쓸쓸함과 여운도 따라왔다. 음에 녹아든 유씨의 감정이 눈에 읽혔다. 음과 음이 얽혀 마음과 마음을 이었다. 아마 소리를 내는 건 손가락이 아니라 마음일 테다.

"제 가야금은 최고의 소리를 내진 않아요. 흉내 내지도 않아요. 연주하는 순간만은 솔직하려고 해요. 마음을 쏟아부은 제 영혼의 소리니까." 열정은 순수하다.

구혜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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