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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원의 추억의 "프로야구"] 한국 최고의 제구력 투수 임호균 ①

하늘이 낸 인재를 천재(天才)라고 하고 그 재주를 노력으로 이룬 인재를 수재(秀才)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천재는 타고났다는 표현을 쓴다.
 
1983년부터 너구리 장명부와 삼미 슈퍼 스타즈에서 투수의 축을 이루면서 화려한 선수 생활을 했던 임호균 선수도 투수의 생명이라고 하는 제구력에서 하늘이 낸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다. 한국 야구에서 임호균을 빼놓고 제구력에 대해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할 정도다. 그 뒤를 이어 빙그레 이글스에서 활약하던 이상군 투수을 들 수 있다.
 
임호균 투수는 인천 태생이지만 인천과 부산을 오가며 야구 인생을 살아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 허약한 몸을 단련시키기 위해 시작한 야구가 그의 평생 직업이 될 줄은 자신도 몰랐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공부가 더 좋아 야구를 그만 두려고 했다가 그래도 자신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고 그만 두어도 후회가 없지 않겠냐는 작은 아버지의 끈질긴 권유로 다시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팀의 에이스로 자리 잡게 되고 야구명문 인천고등학교에 특기생으로 입학할 정도의 실력에 이르게 됐다. 그러나 그는 당당하게 시험을 치르고 입학했다.
이 때부터 임호균은 고교 야구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1974년 고교 3학년 시절 최강으로 꼽히는 대구상고와 휘문고를 상대로 역시 노히트 노런을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기록하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세웠다.


 
“고등학교 때도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다. 키가 170cm 정도로 작아서 체구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다. 그래선지 어릴 적부터 내가 살 길은 강속구가 아니라 타자가 직구를 기다릴 때 커브를 던질 수 있는 영리한 수읽기와 칼 같은 컨트롤이라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이것이 임호균이 제구력의 달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계기였다. 그러나 야구라는 것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자로 잰 듯한 볼 컨트롤을 갖고 싶지 않은 투수가 어디 있겠는가?

 노력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재질이 보태줄 때 기량도 한껏 증가하게 되는 것이다. 임호균이 인천고등학교에 처음 입학했을 때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본다. 감독이 하루는 야구하는 친구를 데리고 와서는 “엄청난 물건이 하나 들어왔다”고 하면서 홈 플레이트 위에 박스를 설치해 놓고 직구, 슬라이더, 싱커 위치에 담배에 불을 붙여 한 개피씩 세워 놓았다. 임호균에게 공을 던지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담배는 쓰러뜨리지 않고 불만 껐다고 한다. 그래서 감독 친구가 “인천 야구에도 빛이 뜨는구나”라고 탄성을 질렀다고 하는 조금은 과장된 이야기가 있다.
 
임호균은 선동렬의 제구력에 실질적인 스승이기도 하다. 대표팀 시절 선동렬은 빠른 볼에 비해 볼 컨트롤이 약했다. 이것이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 대부분의 약점이다. 선동렬이 임호균과 함께 연습을 하면서 임호균이 깜짝쇼를 보여줬다. 임호균이 홈 플레이트 위에 공을 놓고 두 번에 한번은 그 공을 맞추는 것을 보고 선동렬이 그 비법을 전수받아 지금의 선동렬로 태어났다고 그 시절을 회고한다.

 비록 고교 시절 전국대회에서 우승기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를 찾는 대학이나 실업팀은 줄을 섰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어려워지자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명문대를 제쳐놓고 당시 최하위 팀이었던 철도청에서 실업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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