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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한인작가 릴레이]가지 치기

어디부터 시작할까 고민 하다가 결국엔 밑동까지 잘라 버리기로 했다. 지난 가을부터 내내 마음에 걸려 왔는데 외면해 버린 게 화근이 되고 말았다. 이틀 전 우편물에 딸려온 짤막한 쪽지 한 장이 나를 꼭지까지 돌게 했다. “Please trim the bushes. Thank you.” 나름 동양 사람 사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시간이 날 때마다 잡초도 뽑고 집 가꾸기에 신경을 쓴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하기 사 지난해는 너무 바빠 돌보지 못한 게 사실이다. 심한 가뭄에 한쪽이 기력을 잃은 나무도있고 아예 생을 다한 나무도 있다. 사건인 즉 우리집과 옆집 사이에 시티에서 관리하는 전기 박스가 있는데 그 박스를 보기 좋게 커버하는 작은 나무들이 그만 터무니 없이 자라서 박스 전체를 덮어 버리고 말았다. 정원을 관리 해주는 사람들이 삐죽 삐죽 올라오는 순들만 깎아서 네모 반듯한 것이 보기만 좋았지 급기야 박스를 다 감싸 버리게 된 것이다. 전지 가위를 들고 중간을 확 잘라 버리리라 마음 먹고 달려들어 잘라보니 보기와는 달리 중간은 가지뿐이지 나뭇잎 하나 남아 있지 않은 것이 속 빈 강정 꼴이 아닌가? 순간 당황스러웠다. 이걸 어쩌나 하다가 집 안 밖 일이라면 모르는 것이 없는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밑동까지 잘라버리면 금방 새순이 소복하게 올라온다고 토요일 오후에 와서 거들어 줄 터이니 걱정 말라 하셨다. 부활절 전날이라 일이 정신 없이 바쁜데도 머릿속은 온통 잘라버릴 나무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집에 왔다. 언니와 남편 그리고 작은 아들까지 합세하여 거든 덕분에 시원하게 잘라내고 정리를 하니 마음이 날아 갈 듯 가벼웠다. 수고한 가족들과 동네에 새로 생긴 월남 국수 집에 가서 뜨끈한 월남 국수를 한 그릇 비우고 나니 불편했던 심기가 씻겨내려 가는 것 같았다.
덩치만 커지고 숲만 무성해진 마음속의 나무들도 이렇게 잘라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오해와 불신으로 인하여 곪아버린 마음의 상처들도 이렇게 도려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자니 갑자기 그날의 일이 떠올라 목구멍으로 뜨거운 것이 삼켜졌다. 두어 달 전쯤일 것이다. 오랫동안 알고 지내는 지인이 내가 일하고 있는 가게에 찾아 오셔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꺼내셨다. 처음 보는 여자분한테 우리 부부끼리 한말인 듯한 말을 전해 들었는데 혹시 그 말을 내게 해 준 여자분을 아냐고 물으셨다. 어떻게 아는 사이길래 처음 보는 자기한테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전하는지 모르겠다며 어쨌거나 아무리 우스개 소리라도 말을 조심해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조언하셨다. 왜 우리 부부의 이야기가 남의 입에 오르내린 걸까? 구겨져 버린 자존심, 말할 수 없는 불쾌함에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 여자가 누군지 알게 되었다. 그 여자는 전에 남편과 잘 알고 지냈던 사람이었다. 안다는 것이 불륜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때문에 자주 부딪히다 보니 편하게 얘기를 나누는 학부모였던 것이다. 우리 남편 성격이 워낙 낙천적인 데다 천성이 착해서 남의 부탁 거절도 못하고 친절히 해결해주는 편이라 사람들이 남편을 편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본인은 전혀 그런 마음이 없다 해도 상대방에서 착각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 여자의 경우도 그랬을지 모른다. 친절을 관심이 있거나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어쨌거나 우리의 이야기가 남의 입에 오르내렸다는 것만으로도 머리 속은 온통 내버려 둔 숲처럼 우거져서 내 전부를 삼키고도 남을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의문이 가시진 않았지만 남편을 굳이 범인으로 몰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을 착각하게 만드는 과잉 친절 때문에 결국 말도 안 되는 여자가 대놓고 나를 비아냥거리게 만든 것에 대한 섭섭함은 앙금이 되어 명치끝에 얹혀 버렸다.
오랜만에 통화를 하게 된 친구로부터 어떤 부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시끄러웠던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요즘엔 시쳇말로 남의 남자에게 들이대는 여자들이 많단다. 그 남자에게 부인이 있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말이다. 그 부부는 우연한 기회에 타 주에서 달라스로 이사온 지 얼마 안 되는 한 싱글 맘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영어도 잘 못하는데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 다니다 보니 낯선 곳에서의 생활이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힘든 일이 생기거나 남자의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이 집 남편에게 부탁을 하기 시작했고 안됐다는 마음에 기꺼이 도와 주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옛말은 하나도 그른 말이 아닌 것 같다. 예의를 지키고 경우 바르게 대했다면 좋은 이웃으로 오래 남을 수도 있었을 텐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여자분은 도움 받는 것을 너무나 당연히 여기고 시도 때도 없이 남의 남편을 불러 내어 아내 된 사람의 기분을 착잡하게 만들었다. 남편이 적당한 선에서 잘랐으면 좋겠는데 거절도 못하는 성격인지라 나중엔 그 집 아들 학교 면담에, 컴퓨터 수리에, 차가 고장 난 것을 핑계 삼아 운전수 노릇까지 하게 된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한번 뱉으면 어떤 경로를 통하든 들어 오기 마련이다. 그 여자가 자기랑 친한 여자한테만 한 말이 결국 이 집 부부 귀에까지 들어 오게 된 것이다. 그 여자는 헛소문이라고 펄펄 뛴다는데 그 소문의 내용은 이렇다, “골키퍼 있다고 볼이 안 들어 가냐?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데 내가 한번 찍어 볼까? 맘만 먹으면 내 걸로 만드는 건 시간 문제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것이 기껏 물에 빠진 사람 건져 주니 보따리 내 놓으라 하는 심보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성경에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욕심은 죄인 것이다. 은혜를 원수로 갚고 자기를 도와 준 사람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 그 여자의 속내는 대체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그 부부는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난 후 사람이 무서워 마음의 빗장을 걸어버렸다 한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도덕이 무너졌다 해도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 도리와 최소한의 양심은 살아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사람과의 관계도 때에 따라 가지치기가 필요한 것 같다.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제멋대로 자라 결국에는 밑동까지 잘라내 버려야 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부활절 오후, 창가에 기대어 치적치적 내리는 봄비를 바라본다. 아빠 취재 나가는 길에 아이도 따라갔다. 빗소리에 기대어 바닥까지 떨어졌던 마음을 추슬러 본다. 상처라고 생각만 하고 꺼내기 가 두려워 내 안에 가두었던 상처의 밑동을 이젠 잘라버릴 것이다. 비 온 뒤 땅이 굳어지듯 상처가 지나간 그 자리에 상큼한 새 순이 푸르게 움트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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