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겪은 4·29 폭동] 1. 에밀 맥 LA시 소방국 부국장
결혼식 사흘 앞두고 긴급 출동
총격전 한 가운데서 생사 고비
▶1992년 4월 29일 오후 6시
사흘 뒤면 결혼식이었다. 신혼여행 꿈에 부풀어있던 소방대원은 이날도 약혼녀와 함께 저녁을 먹고 사우스 센트럴에 있는 집으로 가기 위해 프리웨이를 탔다. 110번 남쪽 방면 프리웨이를 타고 달리는데 오른쪽에 연기기둥이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불이 났나? 소방대원이라는 의무감에 눈길을 거두지 못했지만 동료를 믿으며 프리웨이를 계속 달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연기기둥이 올라오는 것을 목격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1992년 4월 30일 새벽 0시30분
긴급 출동 호출이었다. 불기둥은 LA를 휘감고 있었다. 불을 다 끄기엔 인력이 너무 모자랐다. 출동하기 전 소방국장은 전 대원들을 불러 방탄조끼 착용을 지시했다. 모두들 긴장한 얼굴로 국장을 바라봤다. 이번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모두들 말하지 않아도 느끼고 있었다. 살아 돌아오라며 동료들과 농담처럼 인사를 나눴지만 가슴에 남았다.
▶1992년 4월 30일 오후 2시
밤새 불을 껐지만 새롭게 불이 나는 곳은 늘어만 났다. 지쳐갔지만 멈출 수 없었다. 8가와 버몬트. 한인타운에 드디어 들어섰다. 버몬트의 한 한인 업소가 활활 타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준비하는데 길 건너편에 차량 두대가 스르르 도착했다. 차 문이 열리자 흑인 7~8명이 차 안에서 내렸다. 그들은 차에서 내리자마자 총을 꺼내더니 우리가 서있던 쇼핑몰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소방대원들이 바로 눈 앞에 있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다. 쇼핑몰 안에 있던 한인 업주들도 나와서 함께 총격전을 벌였다. 동료들과 나는 소방차 뒤에 숨어 땅바닥에 엎드렸다. 현장을 피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총을 쏘던 흑인들은 내가 사랑하고 아끼던 흑인 이웃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서 머리 속이 혼란해졌다. 마음이 아팠다.
에밀 맥 LA시 소방국 부국장이 돌아본 20년 전 LA폭동의 모습이다. 흑인 가정에 입양돼 성장한 맥 부국장은 지금도 스스로를 '한인이자 흑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부모님과 형제들은 사랑이 넘쳤으며 입양아라는 사실이 내게는 큰 축복이었다"며 "특히 인종차별운동이 한창이던 때 흑인 부모에게 입양된 덕분에 평등사상을 배울 수 있었고 인종에 상관없이 많은 친구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맥 부국장은 하지만 LA폭동을 통해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의무감을 갖게 됐다고 밝혔다. 한인 커뮤니티에 대한 의무감을 갚기 위해 다인종 커뮤니티를 위해 일하기 위해 내년 LA시의원 선거에서 13지구 시의원 후보직에 도전하게 됐다는 맥 부국장은 "한인 커뮤니티와 흑인 커뮤니티 라틴계 커뮤니티와 함께 일하면서 화합을 일궈내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말했다.
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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