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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탐구] 법정통역사

1시간 통역 위해 10시간 공부 기본
공정한 심판 위해 법정 앞에선 중립

영어가 서툴러 고생하는 현장이 여러 곳이 있다. 이중 가장 힘든 곳이 법정, 병원, 행정기관에 갔을 때다. 쇼핑몰에 뭔가를 사러 갈 때나 전화로 크레딧 카드 회사와 통화하는 경우엔 내가 '갑'이기에 상대방이 내 말에 경청하므로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다. 하지만 바로 이 세 곳은 조금이라도 잘못 알아듣는다면 큰 불이익이 생길 수도 있는 내가 '을'이 되는 경우다. 을의 상황에서 완벽한 영어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통번역사에 대해서 알아보자.

법정 통역사 1호인 폴 이씨는 말이 빨랐다. 도대체 왜 이렇게 말이 빠른지. 생각이 느린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이 빠른 게 직업병이란다.

말이 느려지면 통역을 느리게 하면 시간을 끌어서 통역비용을 더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게 되니 차라리 빨리 해버리는데 이게 일상생활에서도 버릇이 됩니다."

생사를 가르는 직업병은 아니지만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는 무척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폴 이씨는 1.5세다. 한국어를 완전하게 하지 못할 환경이 있었지만 웬걸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사람들보다 한국어가 시원시원하게 토하듯 쏟아져 나왔다.



법정에서의 통역은 두 가지로 나뉜다. 민사와 형사인데 형사법정의 통역사는 준공무원이고 민사의 경우엔 프리랜서가 대부분이다.

통역은 사실 누군가를 돕는 '도우미 업종'이다. 변호사가 소송을 돕는 도우미 업종이듯 증인이나 원고.피고의 의사소통을 해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문직이다.

통역은 물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하게 된다. 그렇다고 영어를 잘한다고 해서 가능한 직종도 아니다. 통역의 상대 언어인 한국어 실력도 요구된다. 최소 SAT 한국어를 패스하는 실력은 넘어야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정도의 한국어 실력이면 더 바랄게 없다고 한다.

한국어 실력 이외에도 필요한 게 법정 중립이다. 의뢰인 입장에선 한국어를 아니까 한국 정서를 이해하고 그래서 내 편이 돼 줄 것이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변호사는 내 편이지만 변호사가 고용한 통역사는 내 편이 아니다. 절대 서비스 의뢰인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상대편 변호사나 통역사가 막아 설 것이다. 요즘은 통역 수준은 아니지만 한국어가 가능한 변호사가 의외로 많다. 통역사는 이런 점도 따져야 한다.

통역과정에서 애로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양쪽 언어의 전문 용어에 능통해야 한다. 폴 이씨는 "만일 기술기업 간의 소송이라면 기술용어가 쏟아져 나올 수 있다"면서 "통역사는 1시간 일을 위해서 10시간까지 미리 공부해야하는 상황도 가능해진다"라고 말했다.

여성에게 직업인으로서 통역사는 딱 맞는 일이기도 하다. 현역 통역사 속기사 중 상당수가 여성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선 프리랜서가 많다 보니 월급이나 연봉에 어떤 개런티가 없음으로 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남성 가장에게는 통역사가 불안정한 직업이다. 반면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연 10만 달러도 가능하다.

여성에게는 시간만 잘 맞추면 되는 매우 융통성 있는 근무환경이고 현재 남가주 한인 통역사 중 80%가 파트타임인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런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남성들은 연봉이 적은 풀타임 직장인으로 관련 회사에 취직을 선택한다.

변호사의 경우 사람 만나는 것이 싫은 사람은 직원이 대신 만나게 하면 된다. 하지만 통역사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내성적 성격보다는 외향적이어야 소득도 좋아진다. 또한 형사 법정통역의 경우엔 판사 변호사 심지어는 피고에게도 잘해줘야 한다. 그러니 속이 썩을 지경이 될 수 있으니 성격이 좋아져야 한다.

프리랜서로서 통역사라는 직업이 불안정한 수입 때문에 주저한다면 은퇴 나이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는 검사와 판사가 은퇴 나이가 없는 것과 같다.

물론 통역은 법정 이외 병원 소셜 사무소에서도 수요가 있다.

폴 이씨의 색다른 경험은 이 직업이 만들어 내는 감동적인 순간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뇌사상태에 빠진 환자를 위해서 통역사를 불러 병원에 갔다고 한다. 환자는 의식불명인 상태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본인에게 설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영어가 아닌 한국어 설명이 필요해서 이씨가 불려 갔던 것이다. 환자가 듣는지 못 듣는지 아무런 확신도 없지만 혹시라도 들을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의사는 설명을 해야 했다. 당신이 무슨 사고로 어떤 연고로 이렇게 누워 있는데 앞으로 얼마나 누워 있어야 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환자 입장에서 보면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데 의식은 있고 아무 것도 안 보이는데 이해하기 힘든 영어로 무슨 소리는 들린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확인이 안되는 상황이 며칠간 계속된다. 또한 자신이 왜 이렇게 됐는지 전혀 알 수 없어 답답한 절망 속에 있는데 갑자기 친근한 한국말로 자신에 대한 설명을 들려주는 폴 이씨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이씨는 상상하면서 슬픔에 함께 빠진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무죄가 증명돼서 풀려난 피고인을 보면서 느낀 감동보다 벽에다 대고 통역하는 기분이었던 뇌사 환자를 보면서 느낀 감흥이 훨씬 컸습니다. 내가 직업으로 이것을 하고 있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그 누군가를 이렇게도 도울 수 있구나 새삼 깨달았죠. 그 환자에게 제 목소리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경력 30년 폴 이씨
한인 자격증 1호
3대째 통역업

통역사 경력 30년인 폴 이씨는 1988년에 마침 생긴 법정 자격증 1호를 딴 특이한 기록이 있다. LA폭동의 도화선이 됐던 두순자 사건을 맡아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비스를 기업화하기 위해서 '이통번역 서비스'(Yi Translation)를 개업했다. 이용 가능한 언어도 일어 중국어 이탈리아어 불어 독어 등 10여개까지 넓혔다.
사실 이씨는 3대째 통역업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가 역관이었고 아버지도 이민국 통역관 2호였다. 자녀도 능력이 되고 원한다면 통번역을 시키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한다.
▶문의:(213)675-1739
통역사 종류만 3가지
통역에도 3가지가 있다. 한쪽에서 말하면 바로 통역해주는 순차통역, 잠깐의 순간만 허용되는 동시통역, 읽으면서 바로 통역하는 시각통역이다. 물론 법정에 서자마자 술술 통역이 되는 경우는 없다. 법정시간이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이라서 편해 보이지만 점심은 법원 카페테리아에서 대충 때우고 토요일, 일요일 가리지 않고 번역일 이나 통역 고객도 만나야 한다. 의뢰인의 편은 될 수 없어도 정확한 통역이나 번역은 해줘야 한다. 다른 프리랜서 직업들이 그렇듯이 24시간이 모두 근무시간이다. 꿈에서도 고객을 위해서 통역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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